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51
51화 말괄량이가 말괄량이가 아님
***
“나는 바야르 칸이다.”
한순간 뿜어져 나온 기세는 가히 거악(巨嶽)을 연상케 했다.
붉게 물든 두 눈에선 투쟁심이 용암처럼 끓어올랐고, 피를 갈구하는 듯 흉포함 마저 느껴졌다.
마치 숨 쉬듯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실체를 떠올리게 했다.
패배를 모르는 전사. 광활한 초원의 지배자.
저 칼 자이드조차 상회할 법한 초강자의 여유가 왕녀의 전신에서 물씬 풍겨왔다.
그러니까, 처음 한 1분 정도는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 의기양양한 자세로 서 있는 왕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걸까.
그녀는 쉰 목소리로, 벌써 네 번째 본인 소개만 반복하고 있었다.
바야르 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물론, 저것이 두골 제국 전대 황제의 이름이라는 건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그 영혼이 왕녀에게 씌었다는 사실도.
저것이 왕녀의 고유능력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한 저주인지는 판별이 불가능했다.
비슷한 능력의 소유자를 한 명 알고 있긴 하나, 녀석은 아직 생성된 상태가 아니었고, 또 능력 자체도 엄밀히 따져보면 저것과는 유형이 달랐다. 녀석은 그저 자신이 부리는 귀신을 다른 이에게 덮어씌우는 것뿐이었으니.
저렇듯 자아를 지닌 유령(?)이 사람의 몸을 자신의 의지로 차지하는 건, 솔직히 말해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이에 대하여 어떠한 신기함도, 또는 불안이나 경계심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저 늙은 목소리의 왕녀가 도통 나와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 본인 이름은 이제 잘 알겠거든요? 근데, 그래서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왕녀는 무사한 건가요? 내게 바라는 게 있습니까?”
이러고 물으면,
“나는 바야르 칸이다.”
그냥 또 저러고 마는 것이었다.
하, 씨······.
이것으로 다섯 번째였다.
슬슬 고민이 되었다.
‘어떻게 제압이라도 시도해 봐야 하나?’
변화하기 전(?) 왕녀의 혼잣말로 미루어 보건대, 분명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전에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현상이고, 한동안 잠잠했으나, 오늘 웬일로 흥분한(?) 저 노인의 영혼이 대뜸 튀어나온 상황 정도랄까.
짐작하건대, 시간이 좀 지난다거나 하면 돌아오긴 할 것이다. 그것이 으레 소년만화 속 능력들의 특징이니까.
다만, 그럼에도 당장 제압을 생각하게 되었던 이유는 저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두 눈 때문이었다. 어느 소년만화에서건, 저러고 붉은 눈빛을 줄기차게 뿜어대는 녀석들의 경우, 대개 맛이 간 상태니까.
“나는 바야르 칸이다.”
여섯 번째.
딱히 붉은 눈빛으로 판단할 이유도 없었다. 저건 그냥 맛이 간 게 맞다.
나는 조용히 손을 풀었다.
말로 대화가 안 되면, 몸의 대화라도 시도해 봐야지.
솔직히 긴장이 되긴 했다. 지능이 뚝 떨어져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저 몸에서 풍기는 기세 자체가 거짓인 건 아니었으니까.
이어, 슬쩍 덮칠 기회만 엿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실로 대범한 녀석이로군. 무려 여섯 차례나 이름을 말했는데도, 공경의 예를 취하지 않다니.”
왕녀가 나를 보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음?”
“음이라니. 고얀 놈이로고.”
당혹스러웠다.
딱히 다른 말을 못하는 게 아니었다. 정신도 똑바른 듯 보였다.
심지어 내용엔 반전까지 들어 있었다. 내가 오히려 본인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
나는 잠깐의 숙고 끝에, 조금 전 상황이 어째서 발생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로 간에 문화적 몰이해로 인한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좀 있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웨스트랜드 쪽 사람이라 이곳의 문화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나요?”
“무릎을 꿇고 공손히 예를 올려야지. 건방지게 황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다니.”
“예? 저는 딴 나라 사람인데요?”
“이 땅에 두골 제국의 하늘을 벗어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 또한 마찬가지. 몰랐다니 한 번만 봐주도록 하마. 무릎을 꿇어라. 나는 바야르 칸이다.”
“······.”
뭐,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발언은 아니었다.
그럴 수 있지. 명색이 황제였다고 하니까. 저와 같은 태도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다만 문제는, 내가 그런 신분제 따위 코웃음 치며 무시할 수 있는 문화권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 양반은 현직도 아니지 않는가. 대충 오래 해먹었다 싶으면 속세의 저 미련과 같은 영화(榮華)는 훌훌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하여, 나는 이 뭣 모르는 늙은 유령에게 본인 처지를 각인시켜주기 위해, 굳이 그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기로 결심했다.
절대 꼴 보기가 싫었던 건 아니고.
“아, 됐고, 노인장. 왕녀는 어디 있지? 혹시 같이 있나?”
그러자,
“역시! 개똥같이도 말을 안 듣는군! 너 같이 시건방지고 대범한 녀석을 기다렸다. 오랜 만에 피가 끓는 기분이군······ 물론 피는 없지만서도! 크하하!”
버럭 화를 낼 줄 알았더니 반대로 껄껄거리며 웃는 게 아닌가.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아니, 진짜 왕녀는 어떻게 됐냐고.”
“여기 잘 있다. 이거야 이 녀석 몸이니까.”
왕녀는 그러곤 주먹으로 본인의 명치부근을 툭툭 쳤는데, 아무래도 음흉한 의도가 섞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근데 어? 정확한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거 싫다는 것 같던데 어린 여자의 몸을 그렇게 강제로 차지하면 어떡합니까? 살만큼 살다 간 양반인 거 같은데.”
“오해하지 말라고. 나 또한 다른 선택사항이 있던 게 아니니까. 나를 담을 수 있을 만한 그릇이 이 녀석뿐인 걸 어쩌라고. 물론, 지금 하나 더 생긴 것 같긴 하다만.”
그러곤 입맛을 다시며 음흉한 눈으로 나를 슥 훑는 게 아닌가.
“허······.”
하여간에 왕녀의 몸으로 저러고 있으니 참······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러니 실제 원작에 등장하지도 못한 거겠지.
보는데 느낌이 묘했다. 뭐랄까, 작가의 음습한 욕망이 그대로 반영된 캐릭터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코코아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등장 예정이었으나 전개상의 문제로 그것이 보류된 캐릭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애당초 여기 이스트랜드 자체가 전체 이야기 내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 했으니까.
이에 대한 이유는 간단한데, 이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에피소드의 순서가 ‘미들랜드’로 건너가기 직전으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즈음엔 독자들이 모두 미들랜드로 건너간 다음부터가 이야기의 본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괜히 이스트렌드에서 어물쩍 거리는 걸 심히 마땅찮아하는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그 내용 또한 도깨비들을 출연시키는데 많이 할애되어 있다 보니, 그 외의 캐릭터들이 조망 받을 기회가 그다지 많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그럼 왕녀의 능력이 아니라는 건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저 바야르 칸이라는 영혼이 왕녀의 고유능력에 의해 생성된 건 아닌 듯했다. 말만 들어보면, 빙의 대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듯 느껴졌으니.
그즈음 왕녀의 탈을 쓴 노인이 본인을 훑어보는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가슴을 쭉 편 채 다가와 말했다.
“어쨌거나 내가 지금 나온 건······.”
“나랑 힘겨루기를 하려고?”
“옳지. 잘 아는군.”
그야 본인이 직접 말했으니까.
나는 더 듣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섰다.
“그럼 후딱 하고 들어갑시다. 나는 지금 그쪽 노인장보다 몸의 원 주인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러고 팔을 슥 내밀자,
“썩 치우지 못할까!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이 미친 노인이 또 한 번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하······ 왜 또.”
“계집도 아니고 그 따위 팔씨름을 누가 한다고! 전사라면 자고로 전신 박투로 겨뤄야지! 물론 몸은 없지만서도! 크하하!”
“······.”
어이가 없었다.
그건 애초에 힘겨루기가 아니지 않나?
물론 따지고 드는 것도 우스워질 것 같아, 딱히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내가 노인장과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왕녀나 돌려주시죠.”
“끌끌, 어림도 없는 소리. 힘겨루기를 하기 전까진 절대 돌아가지 않을 테다. 전부터 몸이 근질근질 거리고 있었다고! 물론 감각은 없지만서도!”
머리가 아팠다.
“지금 왕녀가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주위에 암살자들이 지천이라고요. 함부로 소란을 피웠다가 무슨 사고가 일어날 줄 알고.”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암살자들? 모조리 목을 날려 버리면 그만이지.”
“하······ 그리고 박투? 뭐 그런 걸 하려면 적어도 장소는 구비가 되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하다못해 자그마한 링 같은 거라도. 근데 여기는 배 안이라고요. 죄송한데, 그따위 장소는 없으니 대충 포기하고 사라져 주시는 게 여러모로······.”
바로 그때였다.
“있어.”
갑작스레 등 뒤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응?”
“있다고.”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코코아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둘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장소.”
“······날 뛸 생각 없는데.”
대충 보아하니 우리 얘기를 다 들은 듯했다.
“그리고 설마 그 장소라는 게······ 바다로 뛰어들라는 건 아니지?”
“바보 주걱턱.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어디. 여기 그런 장소가 어디 있다고.”
그러자 코코아가 가만 손가락을 펴 천장을 가리켰다.
“······.”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뭔 뜻이야. 천장?”
“위라고. 위.”
“위?”
“이 배의 최상층. vip들의 놀이터. 거기 다 있어.”
이에 당황한 나는 코코아의 무심한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훑었다.
어째 이상했다. 그리로 가자는 말처럼 들려서.
“그래서 올라가자고? 근데 너 여기도 오기 싫어했잖아.”
“여기는 길이 아니니까.”
“······거기가 길이라고? 하지만 너 여태 아무 말 안하고 있다가······.”
“지금 막 보였어. 그리고 가야 돼.”
묘하게 단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
길이라니 뭐.
어쩔 수 없을 듯했다. 솔직히 좀 뜬금없긴 했지만.
“최상층? vip들이 있는 곳?”
“응.”
“흠······ 일단 알았어. 객실매니저에게 한 번 말해보지 뭐.”
“박투!”
“아, 알았으니까, 일단 왕녀부터 돌려놓으라고요. 장소 알아볼 테니까. 그 정돈 기다릴 수 있죠?”
“시끄럽고, 당장 안내하도록. 나는 한 번 마음먹은 이상엔 절대 중간에 멈추지 않아. 그걸 실현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하.”
얼어 죽을 개똥같은 소리를 근엄하게도 내뱉고 있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
“됐고, 알아보러 갔다 올 테니까 여기 조용히 있으쇼.
소란 피우지 말고.”
나는 그러곤 도망치듯 객실을 빠져나왔다.
*
“신규 vip신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만?”
“신규?”
“갑자기?”
남자의 말에 일순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현재 항해 3일 차.
vip등급을 신청하기엔 퍽 늦은 때였다.
웬만한 이들은 이미 승선 전 몇 달 전에 끝내놓는 절차였으니.
“누구지요?”
“우리가 모르는 이가 타 있었다고?”
“어느 쪽 인물이죠?”
흥미로운 일이긴 했던 모양이다.
물음들이 쏟아지자, 남자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간단하게 답했다.
“그냥 모험가랍니다. 그것도 이제 막 자격시험을 마친.”
그러자,
“허, 헛······.”
“웃기지도 않네요.”
“한낱 햇병아리 모험가 따위가 무슨······.”
몇몇이 헛웃음을 내며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있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고위관료이거나, 왕족, 혹은 각 대륙의 재계를 주름잡는 거부들이었기 때문이다.
모험가가 일반인은 감히 꿈꿀 수 없는 선택받은 이들이라는 건 세간의 공통된 인식이었으나, 그들은 이미 숙련된 모험가들을 몇이나 부하로 부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갓 모험가가 된 풋내기의 신청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 중 몇몇은 어느 한 인물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꿨다.
“물론 모험가들 전부를 무시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모험가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지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사실이니. 하지만 모험가에게도 다 급이란 게 있는 법.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의 변명 같은 말을 들은 한 빨강머리 청년이 무심한 얼굴로 귀찮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렇죠. 모험가라고 다 같은 모험가는 아니죠. 그리고 그 친구도 그걸 잘 알 것이고 말입니다. 분명 신청의 근거가 더 있을 텐데? 그냥 모험가, 그게 끝인가요?”
그러자 처음에 말을 꺼냈던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한 가지 더 있긴 하더군요. A급이랍니다.”
이에,
“A급?”
“오······ 꽤 등급이 높긴 하군요.”
“그래도 조금은 부족한 수준 아닌가? 이제 겨우 A급이 된 정도라면······.”
다시금 주위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잠깐, 이제 갓 자격시험을 마치고 모험가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햇병아리가 A등급?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한 가지 사실을 콕 집어냈다. 그리고 이는 분명 꽤나 의미가 있는 정보였다.
곧이어, 모두의 시선이 빨강머리 청년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그의 무심하기만 하던 표정에도 약간의 변화가 서려 있었다.
“자격시험에서 1등이라도 했나보죠?”
그러자,
“정답.”
소식을 가져왔던 남자가 씩 웃었다.
곧이어 장내의 웅성거림이 폭발하듯 증가했다.
곧이어,
“한 번 불러보시죠. 후배 얼굴이나 보게.”
빨강머리 청년, S급 모험가 사비에르가 무심한 투로 내뱉었다.
*
“지금 바로요?”
“예, 바로 와주십사 요청하셨습니다.”
허락은 해주겠다. 다만, 지금 당장 얼굴을 비춰라.
나는 급해 보이는 객실 매니저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코코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래요, 갑시다.”
나는 그러곤 옆에 앉아 있던 왕녀를 슬쩍 쳐다봤다.
“나, 나도?”
“가야지. 납치된 사람이 혼자만 있으려고?”
왕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vip들을 보러 간다하니, 어쩌면 아는 사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는 내게도 변수이긴 했다.
“그 괴팍한 늙은이는 이제 안 나오나?”
“······몰라. 한 번 들어가면 다시 잘 안 나오긴 하는데, 목적을 달성하고 들어간 게 아니었으니.”
“다신 나오지 못하게 조심하도록.”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다행히도, 그는 내가 도망쳤던 그 잠깐을 못 참고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사라질 당시에 ‘두고 보자, 주걱턱 녀석!’ 이라는 저주를 남긴 채 사라졌다고 하여 약간의 께름칙함은 남았다.
이윽고,
딩동-.
“여기입니다.”
우리를 실은 엘리베이터가 배의 최상층 칸에 도착했다.
최상층은 마치 펜트하우스 마냥 입구에서부터 문으로 막혀 있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보고를 드렸으니 아마 곧 출입이 가능하실 겁니다. 그럼 이만.”
이어 다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코코아가 입을 열었다.
“길이 끝났어.”
황당한 소리였다.
“뭐? 여기가 아냐?”
“아니, 맞아. 끝났어.”
“······끝났다고?”
나는 그 순간, 코코아가 선택한 표현으로부터 위화감을 느꼈다.
길이 끝났어.
코코아가 이제껏 길을 이끌다가 마지막에 썼던 표현은 ‘길이 끊겼어’였다.
코코아는 내 얼굴에 뜬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친절히 한 마디를 덧붙여줬다.
“어쩌면······ 여기가 종착지일지도?”
“······.”
길의 종착지라는 건 다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이곳, 이스트랜드에서 내가 수행해야 할 임무의 최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란 건, 단순히 왕녀를 모험가 협회로 데려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 이후 연계될 모든 의뢰를 포괄한 것이지.
한 마디로, ‘왕녀를 황제로 이끄는 길’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즈음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명제가 선명히 떠올랐다.
이 문 너머에 왕녀의 암살을 주도한 흑막이 있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