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주걱턱이라는 존재
***
나는 깨진 유리창 파편 중 하나를 슬쩍 집어 들었다.
그냥 유리였다.
딱히 강한 힘을 주지 않아도 빠각 하고 부서졌다.
“흠······.”
객실매니저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어떠한 충격으로도 꿈쩍 하지 않을 강화유리에, 최첨단 경비센서가 방안 구석구석 다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러한 ‘엄중 경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침입자들이 들어온 지 이미 30초가량이 지났음에도,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다. 사람이 달려온 것도 아니고, 심지어 방 안의 불마저 다 꺼져버린 상태였다.
침입자들의 사전준비가 아주 철저했다거나 혹은, 이 방의 경계시스템을 누군가가 풀어놨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을지도.’
물론, vip들의 모임에 초청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긴 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눈앞의 침입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좀 다르긴 한가?’
확실히 처음에 맞닥뜨렸던 암살자들 ‘1’, ‘2’, ‘3’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제법 다르긴 했다. 살기도 살기인데, 좀 더 여유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다만 희한한 건, 저들의 행동이었다.
당장 나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왕녀의 위치를 묻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무기조차 꺼내들지 않았다.
게다가 열 명의 암살자들은 기본적으로 그다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히 나를 무시해서 하는 행동은 아닌 듯했다.
가만 보니, 저들은 외려 본인 옆의 인원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뭐야······ 설마 지금 순서 정하는 중인가?’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몇 명은 앞으로, 몇 명은 뒤로 슬쩍 물러나고 있는 게 아닌가.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물론 나로선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었지만, 희한하게 기분이 나빴다.
다 같이 덤벼도 모자를 판에 말이야.
하여, 굳이 한 마디를 던져주었다.
“한꺼번에 덤벼, 괜히 후회하지 말고. 너네 그 정도 아니야.”
그러자,
“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녀석이로군.”
“죽고 싶어 환장했나보지?”
성질 급한 몇몇이 반응해왔다.
모두 먼저 앞으로 나선 녀석들이었다.
역시나 실력 순이 맞는 듯했다.
먼저 나대는 놈들은 약한 놈. 그리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판단한 녀석들은 뭐······ 덜 약한 놈 정도?
사실 웃긴 건 녀석들이 뭘 어떻게 나누고 준비를 했든지 간에, 정작 내가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들끼리 순서를 짜고 말고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나는 애당초 저들을 차례차례 상대해줄 마음이 없었으니.
나는 곧바로 현 상황에 필요한 고유능력을 흉내 냈다.
바로,
얀의 것이었다.
곧이어 나와 똑 닮은 주걱턱 유령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뿅-.
뿅-.
뿅-.
⁝
총 아홉 마리였다.
“오우, 여긴?”
“여어, 주걱턱 오랜만이군. 나 기억하나?”
“너 주인! 얘 유령! 나도 유령!”
“나 네 번째야? 내가 넷째인가? 그럼 형이라고 불러 이 자식들아!”
⁝
유령들은 여전히 활기차고, 또 시끄러웠다.
“다들, 조용. 딱 봐도 뭘 해야 할지가 보이지? 한 놈씩 맡아 처리해.”
곧이어, 내 명령에 따라 유령들이 암살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여 버려!”
“나는 이 녀석!”
“나는 이 못생긴 놈!”
“그럼 나는 얘!”
그리고,
“이, 이것들은 다 뭐야?”
“공격이 안 통해!”
암살자들은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나는 와중에 유령의 선택을 받지 않은 마지막 암살자를 쳐다봤다.
웬 사슬낫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 또한 나의 시선을 알아채곤 내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딱히 응전(應戰)을 각오한 눈빛은 아니었다. 난데없는 유령들의 등장에 당황했던 탓일까, 외려 녀석의 두 눈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음을 맹렬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 하나 남은 암살자와 싸울 마음이 없었다. 싸울 마음은 커녕, 손 하나 까딱할 생각도 없었다.
녀석은 내 몫이 아니었다.
저 사슬낫의 암살자를 상대할 것은,
쿠궁-.
바로 ‘대장’이었으니까.
나는 눈앞에 등장한 거대 주걱턱 유령을 감격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나와 체형이 똑같은 유령들에 비해 족히 세 배는 더 커다란 덩치였다. 초호화 객실이라 방이 무척이나 컸음에도 불구하고, 꽉 차 보이는 크기였다.
“······좁군.”
이야······ 녀석은 목소리마저 중후했다. 대장다웠다.
실제로 대장 유령을 소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재 기본 유령들 또한 현재의 나와 엇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대장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얀이 처음 이 열 번째 유령인, 대장을 소환하는 건 ‘보물 라미레스 쟁탈전’이 한창일 무렵인데, 나는 이 당시 소환된 대장을 보곤 감탄해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갑작스레 두둥 등장한 거대 유령이 적들을 쓸어버리는 게, 하여간에 대단히 인상 깊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대장은 당시 얀의 대장보다 강하다.
나는 씩 웃으며 사슬낫 암살자를 가리켰다.
“대장, 저기 저 녀석 보이지? 처리해줘. 터트리거나 죽이지는 말고.”
“으음······ 개미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는데······.”
우리의 대화를 들은 사슬낫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이어,
“흐, 흐에엑!”
대장의 손가락에 허리가 잡힌 사슬낫이 죽어라 비명을 질러댔다.
뭐, 겁에 질릴만했다. 대장이 조금만 손가락을 비틀어도 그대로 척추가 나가는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울어대면······ 다른 암살자들은 어떡하라고.’
마침 다른 암살자들 또한 이를 의식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게 보였다.
이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소리쳤다.
“단 한 녀석도 놓치지 마!”
그렇게 사슬낫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정리되었다. 맞상대하던 유령들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인데, 딱 봐도 대장격인 유령이 등장해 암살자 하나를 조져(?)버리고 있으니, 자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물론 저들이 보다 준비된 상황에서, 방심하지 않은 채 유령들을 맞닥뜨렸다면, 이처럼 쉬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명색이 왕녀를 쫓으려 고용된 암살자들이 아닌가.
다만, 실전은 단 한 번뿐이라는 점.
그나마 냉철함을 유지하던 녀석들이 몇 차례 나를 노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으나, 그 또한 얼마 가지 못했다.
그렇게 끝.
쉬운 결말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드러누운 열 명의 암살자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한 뒤에도, 나는 곧바로 유령들을 돌려보내진 않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창가 쪽 커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도 슬슬 나오지?”
······.
잠시 후,
“······눈이 좋군.”
“기척을 읽었나?”
두 명의 암살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몹시 뚱뚱했고, 하나는 몹시 홀쭉했다.
함께 있어 더욱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한 쌍이었다.
‘흐음······ 꽤 치는 녀석들인가?’
열 명의 암살자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튀어나오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적어도 끝까지 상황을 보려했다는 점에서, 다른 암살자들보다는 좀 더 뛰어난 녀석들이라 보는 게 맞을 듯했다.
마침,
“미리 말해두지만, 우린 거기 누워있는 녀석들과 같은 레벨이 아냐.”
뚱뚱이가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야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고.”
나는 이어 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장, 두 녀석 더 부탁해도 되지?”
“개미잡기는······ 조금 지겨운데······.”
“왜, 그래도 한 녀석은 좀 더 통통하긴 하잖아. 다음엔 좀 더 커다란 녀석으로 대령해 놓을게.”
“······그럼 좋아.”
그러고 대장 유령을 출격시키려 할 때였다.
“······잠깐.”
그제까지 가만히 있던 홀쭉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암살자들의 무서움은 은밀함과 그 끈질김에 있지. 대놓고 공격하는 건 본래 우리 스타일이 아냐.”
“아, 그래?”
“장기전으로 돌입한다. 항해가 끝나기까지는 아직 일주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지. 그 기간 동안 너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할 것이다. 말라죽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려주도록 하지.”
“······.”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잡히면? 그게 계획대로 안 되지 않을까?”
그러자 슬금슬금 창가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후후······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두고 보자고. 울고, 불고 살려 달라 애원하게 해주겠어.”
그러곤 그냥 냅다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허······.”
황당한 녀석들이었다.
도망가겠단 말을 희한하게도 돌려서 하네.
*
“······느낌이 좋지 않은데.”
테르미스는 세상 편히 잠든 치누아비와 코코아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막인지 뭔지를 쳐놓은 상태라 웬만해선 들키지 않을 거란 말을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두골 제국 내 ‘전쟁파’의 대표 격인 타마르 대신에게 걸리고 말았으니.
그는 혼담 얘기와는 별개로, 애초에 자신을 포함한 마이닌 왕가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적으로서 간주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연합정부 회의 때마다 매번 시비를 걸며 호시탐탐 싸움을 걸 궁리만 하는 작자였으니.
그는 기본적으로 두골 제국의 정신을 ‘정복’이라 생각하는 자였다.
타마르가 암살자를 보낸 주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뭐가 됐든 자신의 얼굴을 직접 확인한 이상 그냥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당장 쓰려고 하지 않을까.
하여, 슬쩍 옆방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주걱턱이 별도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한 게 있나 싶어서.
이어,
“저, 저게 뭐야······.”
테르미스가 보게 된 광경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주걱턱과 똑같이 생긴 유령들이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암살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들겨 패고 있었다.
특히 다른 것들에 비해 족히 세 배 이상은 커다란 거인 주걱턱. 그 거대한 유령 손에 잡힌 암살자는 한순간 그 처지에 동정이 갈 정도로 불쌍하고도 가냘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짓뭉개지기 직전의 개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지막 암살자가 정리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 테르미스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이어, 저 ‘주걱턱’이라는 존재에 대해 되뇌었다.
‘뭘까, 저 녀석.’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에게 납치당하는 그 순간부터.
일단 인간의 그것이라 보기 힘든 그 놀라운 힘.
애당초 자신과 엇비슷할 정도의 힘을 가진 자조차 거의 본적이 없던 테르미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패기.
제아무리 모험가 협회가 뒤에 있다고는 하나, 모험가들 또한 각 대륙별 정부와 나라, 도시의 권력자들에겐 한 수 낮춰줄 수밖에 없다. 일단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머릿수가 다르니.
그 중에서도 타마르 대신은 두골 제국이란 거대한 나라의 실세 중 실세였다. 제아무리 유명하고 잘나가는 모험가라 할지라도,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라는 것.
헌데 주걱턱은 되레 그를 몰아세웠다. 설사 그의 정체를 제대로 몰랐다하더라도, 스무 명이 넘는 vip들 앞에서 그를 말로써 압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헌데 심지어 저 타마르 대신이 기에 눌렸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으니.
마지막으로 저 능력.
솔직히 이전에는 그의 힘 자체가 그가 타고난 능력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간신히 이해하 가능한 차원의 힘이었으니까.
헌데 저 유령들을 부리는 모습이라니······ 유령들 하나하나의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봐선 고유능력임이 틀림없었다. 특히나 저 거대 유령은 그 존재 하나만으로 가히 제국의 자랑이라는 기병대 서넛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보면 볼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저게 ‘진짜’라는 걸까.
덕분에 모험가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뀔 정도였다. 이제껏 자신을 모험가라 칭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많이 봤지만, 주걱턱과 같은 ‘진짜’는 처음이었다. 자격시험 1위라는 타이틀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나저나······ 이유가 뭘까.’
그가 가진 능력과는 조금 별개의, 새로운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는 대체 왜 나를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분명 명령을 받고, 어떠한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자였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테르미스는 어째선지 그의 목적이 그리 합리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본인의 감정에 따라 그 목적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목적이 마치 테르미스 자신이라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대체 왜······.’
바로 그때였다.
-그 이상 관심 갖지 마. 그 녀석은 내꺼니까.
“으앗!”
순간 테르미스가 놀라 소리쳤다.
그가 사라졌다가 이토록 금방 다시 나타난 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바야르 칸.
테르미스는 강력히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지, 지금은 안 돼! 저리 꺼져 이 늙은이야!”
-말하는 것 좀 보게. 이 시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이어, 그가 무척이나 놀라운 말을 했다.
-네 몸, 뺏을 생각 없다.
“······뭐? 정말?”
-뺏어봐야 얼마 가지도 못하니까. 네 년, 엄청 약해져 있더군.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픽 나가버리고 말았어. 나를 버티지 못한다는 거다. 알고 있었느냐?
“그야······ 그간 잘 못 먹기도 했고.”
-이유야 어찌되었건 좋지 않다. 너 이대로는 안 돼.
“뭐?”
-배에서 내리는 즉시 전사의 길을 걷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려면 너는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본래의 네 몸보다도 더욱.
역시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들었어? 귀도 밝지. 내 일엔 관심 없는 척하더니만.”
-그 길은 내가 만든 거다. 듣기 싫어도 귀가 자연히 쫑긋거릴 수밖에 없다고. 어쨌거나 현재 그 몸으로 통과하긴 쉽지 않을 거다. 더군다나 여자가 걷는다? 곳곳에서 방해공작이 펼쳐지겠지. 언젠가부터 제국에도 좀생이들이 가득 차 버렸거든. 못난 놈들 같으니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던 것. 고유능력. 너는 그걸 개방해야 한다.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테르미스는 또 다시 반복되는 얘기에 염증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이 늙은이는 늘 그것에 대해 얘기했다. 고유능력. 그것을 발현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제껏 매번 실패해왔다. 방법을 모르는 데 어찌 하냐고. 실제로 그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그 때문에 이 늙은이의 방문도 점차 뜸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실망해서.
“내가 싫어서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고유능력의 발현 시기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몇 가지 유형이 존재하지. 첫째, 그냥 날 때부터 되는 녀석들. 축복받은 놈들이지. 그리고 두 번째, 감정적 계기가 있을 때. 분노나 위기, 행복감······ 등등의 감정 변화로 촉발되어지는 것인데, 네 경우엔 해당사항이 없다. 내 살다 살다 너만큼 화급한 계집은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방방 날뛰는 데도 발현되지 않았다는 건······ 그쪽 루트가 아니라는 거겠지.
“······알고 있다고.”
-그리고 마지막 유형. 이를 끌어내 줄 수 있는 존재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즈음, 바야르 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끌어내 줄 수 있는 이?”
-강한 힘은 또 다른 힘을 끌어당기는 법이지. 저 주걱턱 녀석이 어쩌면 네게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옆에 잘 붙어있어 보거라.
“······주걱턱이?”
-네겐 재능이 있다. 너의 그 단단하고도 강한 몸은 그저 너의 능력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물일 뿐이야. 물론 영영 능력을 깨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이를 발현시킬 수만 있다면······ 혹시 또 모르지 않느냐. 네 꿈을 이루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을지도.
“······꿈.”
그 순간, 테르미스는 바야르 칸의 말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제국의 대장군.
곧이어 빛처럼 떠오른 이미지에 잠식당한 테르미스는, 이후 이어진 바야르 칸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혹은 그것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마치······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
항해 8일차 아침.
“흐음.”
나는 홀로그램에 표시된 문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모험왕 연재가 재개되었습니다] [챕터20 헌팅턴 도적단(1)]슬슬 시작될 모양이었다. 나의 약화가.
이전 ‘18’, ‘19’가 잠시 쉬어가는 챕터였다면,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챕터였다.
재미가 있네 없네 말들이 쏙 들어가고, 지나간 인물들에 대한 그리움이 잠시 걷히며, 레오의 행동에 독자들의 모든 주의가 집중되기 시작하는 시기. 내가 서서히 잊히기 시작할 시점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약해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시작되지 않을까.
‘······조급해질 건 없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스트랜드를 바라봤다.
어느덧 대륙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음에도, 배 안은 조용했다. 역시나 도망간 게 맞았던지 뚱땡이와 홀쭉이는 그날 이후 보이지 않았고, vip쪽도 잠잠했다.
암살자들의 습격 이후, 별다른 사건 없이 잠잠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이대로 항해가 마무리될 리는 없다. 저 vip실의 ‘흑막’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이 잠시간의 고요도 금방 끝이 나겠지.
곧 폭풍이 밀려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똑똑-.
누군가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객실 매니저였다.
“이스트랜드 도착을 기념하여, vip들을 위한 특별연회가 오늘 저녁에 열릴 예정입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주최자께서 꼭 좀 참석을 부탁드린다고······.”
주최자라······ 대충 느낌이 왔다. 뭐, 그 흑막 녀석이겠지.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