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59
59화 요정도
***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정면의 창을 투과해 들어온 빛이 눈을 찔러왔다.
어울리지 않게 볕이 그득한 침실이었다.
“왔느냐.”
네르구이는 침실 한 구석에 가만 앉은 채 독서 중이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이 궁 내에서 저 바깥의 태양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저 남자는 이제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까.
“들으셨습니까?”
“무얼 말이냐.”
“아시지 않습니까. 제일 먼저 들으셨을 텐데.”
“뭐든 제일 먼저 듣기는 하다만······ 네가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구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네르구이는 남자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웃는 것이야말로 그의 특기였으니.
“모른 척 하시니 말씀드리죠. 테르미스 왕녀 말입니다. 마이닌 왕국의 제2왕녀. 형님께서 청혼하셨던.”
“아아, 그녀 말이구나. 들었다. 이번 전사의 길에 참가등록을 했다지?”
“반응은 그게 끝입니까? 성격도 참 좋으시네요.”
“그럼 내가 어찌 반응했어야 하느냐?”
“아무리 그래도 언짢은 기색 정도는 내비치는 게 맞지 않습니까? 형님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말을 타고 칼을 잡겠다는데? 그것도 한 나라의 왕녀가 말입니다.”
네르구이는 이번에야말로 남자의 얼굴에 반응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웃음기 하나 없이.
“뭐, 그럴 법하지 않느냐. 애당초 그녀에게 어울리는 건 예복보다야 갑옷일 테니. 물론,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리고 연합정부가 들어선 이때 나라의 구별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 아니겠느냐.”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무의미했다면, 전쟁이 나네 마네 하지도 않았겠죠. 연합정부란 건 허울뿐입니다. 다른 대륙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곳은 다릅니다. 이스트랜드는 아직 약육강식의 법칙이 살아 있는 세계입니다. 강자와 약자만이 존재하는.”
네르구이는 제국의 국민이라면 마땅히 피가 끓어 동의할 법한 정론을 펼쳤다. 이는 지나가는 세 살배기 아이라도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일 말이었다.
다만, 남자는 그저 지그시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초대 황제 우미르 칸 때부터 줄곧, 두골 제국은 딱히 경계선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야 그렇다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세워둔 울타리를 넘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부숴버릴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지요.”
남자의 눈이 한층 깊이 가라앉았다.
“······전쟁을 원하더냐?”
······.
“바래져가는 옛 영광을 추구할 뿐입니다.”
네르구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스스로를 조소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거짓으로 점철된 말이었으니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야망이 있다면 머리로 하지 말거라. 두 다리와 긍지로 하는 게 옳다.”
“······.”
남자는 그러고 말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즈음 네르구이는 이번에도 자신이 어째서 이곳을 찾아왔는지를 까먹고 말았다.
약을 올리려 했었나? 그가 화난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니면 그저 비웃기 위해?
매번 머릿속에다 할 말을 정리해둔 채 이곳을 찾지만, 늘 남자의 앞에만 서면 충동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렇게 의견인지, 투정인지 모를 헛소리만 해대다 돌아서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별 생각 없이 내뱉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하신 겁니까? 정말 좋아서 하신 겁니까?”
“무엇을.”
“청혼 말입니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냥 나온 물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쿡······ 쿡쿡.”
남자가 웃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 같은 무표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의 입가가 씰룩대고 있었다.
“미안한 짓을 해버렸지. 사실 나도 이런 사달이 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거든.”
그는 진심으로 난처하다는 듯, 머리까지 긁적거렸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남자의 저와 같은 모습은 근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거 아느냐? 그걸 내게 물은 사람이 여태 아무도 없었다는 거? 대개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만 줄기차게 파내려 하더라고.”
“······그랬습니까?”
“하지만 너라면 언젠가 이걸 물을 줄 알았지. 늘 내 생각보다도 감정을 먼저 궁금해 하던 너였으니.”
“······.”
“가지지 못한 걸 탐하는 거야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그리고 이어진 남자의 말은, 어째선지 네르구이의 가슴을 강하게 후벼 팠다.
그토록 강렬한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강한 인간도.
······.
그 순간, 네르구이는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그랬지.
바로 저 눈빛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런 심술궂은 마음을 먹게 된 것이.
어째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덕분에 잊고 있던 목적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는 저와 같은 눈을 해서는 안 됐다.
무언가에 진정 감명을 먹었다는 눈을, 정말로 동경에 빠진 것 같은 눈을.
적어도 자신 앞에서는 말이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강한 인간은······ 바로 눈앞의 남자였으니까.
“······여인치고 꽤나 우악스럽긴 하더군요.”
“우악스럽다니. 보는 눈이 형편없구나.”
“물론, 뭇 이들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형님의 놀라운 점이긴 하지요.”
네르구이는 씩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때,
“너는 뭔가 심술궂은 마음을 먹을 때마다 그렇게 웃곤 했지. 왕사에게 듣기를, 선상에서 왕녀의 암살을 시도한 이들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남자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랬나요?”
“칸도 아닌 내가 네 행위를 저지할 순 없겠지. 다만, 기어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너도 알 것이다. 그 여인은 강한 사람이야, 그녀를 얕보지는 말거라.”
“뭐······ 운이 따르는 것 같긴 하더군요. 난데없이 웬 괴물이 붙는 걸 보면.”
그 괴물은 정말이지 생각 외의 변수였다.
여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잘 알겠지만, 전사의 길은 단순한 병사 선별시험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한 의식에 가깝지. 혹, 장난을 칠 생각이라면······.”
“죄송하지만, 저는 더 이상 다섯 살배기 어린 애가 아니라서요. 어쨌거나 충고는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쉬십시오, 1황자님.”
네르구이는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침실을 나섰다. 속의 말은 가만 숨겨둔 채로.
‘물론, 여전히 장난치길 좋아하긴 합니다만.’
*
모험협회 바란토르 지부는 숙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이번엔 왕녀와 함께 지부를 방문했는데, 이는 혹여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실은 협회 직원들의 반응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목표 대상을 함께 대동한 채 방문하면 과연 어떨까 하고.
솔직히 저번 난마 지부에서 약간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암만 사무직이라지만, 너무 의뢰 대상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으니. 여기가 만화 속 세계라, 행적적인 절차가 영 엉망인가 싶기도 했고.
그래서 한 번 데려가 봤더니,
“수고하셨습니다. 두 번째 의뢰 또한 성공하셨네요.”
이번에도 역시나, 협회 직원은 아무런 확인 작업 없이 의뢰 확인 증서에 도장을 찍었다.
쾅-!
옆에 선 여인이 왕녀인지 아닌지조차 관심이 없는 듯했다. 현재 두골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을 데려오라는 증서에 화인 도장을 찍으면서도.
심히 놀라울 정도의 무신경함이었다.
‘허······ 이러니 비리 협회원이란 배경이 나올 수밖에.’
나는 잠시간 내 배경목록 한 쪽에 잠들어 있는 녀석을 떠올렸다.
[퇴출된 비리 모험협회원]그때였다.
“아, 그리고 연계 의뢰가 있네요.”
“뭐죠?”
“예, 여기 있는데······ 흐음. 잠깐만요.”
의뢰서를 훑어보던 직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곧이어,
“의뢰는 어······ 다음 의뢰가 올 때까지 이 도시에서 대기하라는 것이네요.”
굉장히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예?”
“일단 대기하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다만 저희가 따로 주걱턱 모험단을 찾아가지는 않을 테니, 다소 귀찮으시더라도 며칠에 한 번씩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
“안녕히 가세요.”
숙소에 도착할 즈음에야, 나는 현 상황에 대해 간단히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 작가는 꽤나 당황한 상태이다. 그래서 일단은 지켜보려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선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도 내가 전사의 길에 참가 등록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정말로 아예 생각을 못했다고? 내가 거기에 지원할 줄?’
흐음.
물론 작가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할 소지는 충분했다. 실은 나 역시도 본래는 전혀 참가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유야 간단하다. 전사의 길을 돌파하는 게 내겐 아무런 이득도 없기 때문에. 외려 피해야 한다면 피해야 할 일이지.
이 전사의 길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두골 제국을 위해 충성할 전사를 뽑는 일이다.
이것에 통과할 경우, 두골 제국 내에서의 권한과 자유도는 상승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두골 제국의 누군가에 충성맹세를 해야 하니까.
만약 통과해놓고 나 몰라라 떠난다? 그랬다간 되레 두골 제국을 적으로 돌려버리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제국을 기만했다고 여길 수도 있으니.
한 마디로, 이는 나 같은 모험가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여, 작가 또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대충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느낌으로 보는 듯했고.
하지만 이 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이 전사의 길을 택한 이유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왕녀를 보호하기 위하여.
짐작하건대, 이 전사의 길을 치르는 와중에도 왕녀를 노리는 놈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전쟁을 원하는 녀석들이 이 같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
물론, 이번에 그들은 왕녀를 죽이려 하진 않을 것이다.
왕녀가 시험을 치르는 도중 죽는다? 이 경우에 전쟁은 발발하지 않는다. 외려 동정론이 생성되며, 괜한 압박으로 왕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비난만 쏟아질 뿐이지.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왕녀가 스스로 시험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이럴 경우, 단순히 결혼이 하기 싫어 전사의 길로 도피했다는 여론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1황자를 모욕한 것에 모자라, 전사의 길까지 모욕한 건방진 왕녀.
그 즉시 왕녀는 뼈도 추리지 못할 만큼 비난받게 될 것이고, 이는 고스란히 마이닌 왕국을 향한 제국의 분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전쟁파 입장에선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라고나 할까.
하지만 물론, 원작에선 이 같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왕녀 스스로 이 전사의 길을 통과해냈다. 그 방법까진 모르겠지만.
어쩌면 정말 그 놀라운 힘으로 죄다 뚫어버렸을지도.
다만 현재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미 나의 개입으로 전개가 꽤나 뒤틀린 데다, 왕녀를 해하려는 녀석들이 그때에 비해 좀 더 화가 많이 난 상태라는 것.
하여, 솔직히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숙소를 둘러싸고 있는 거뭇한 녀석들의 수만 보더라도 제법 위협적이라 생각될 정도였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넘기기엔 솔직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두 번째.
그야 당연히, 뭐 좀 보여주려고.
사실 이 이유가 제일 컸다. 책임감이고 뭐고 간에, 메인시점이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접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흠흠.”
현재 나는 이번 챕터의 메인 캐릭터였다. 한 장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면, 그래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뭔가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 챕터의 지속기간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예상기간은 기껏해야 3, 4일 정도.
그러니 짧은 시간 내 어떻게든 파격적인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를 일이긴 했다.
잘만 해낸다면, 좀 더 기간이 연장될지도?
하여, 나는 좀 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연출법에 대해 죽어라 궁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
전사의 길 예선 당일.
우리는 수많은 관객석으로 둘러싸인 웬 종합경기장 같은 곳에 나와 있었다.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사실 유목민족의 일상과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건축물이긴 했지만, 놀랍게도 팔백 년에 달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경기장 한 쪽에는 특이하게도 바위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작게는 어린아이만한 것에서 크게는 멧돼지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특히나 가장 커다란 바위는 거의 코끼리 성체만한 크기였다.
왕녀가 말하길, 시험과제야 매번 바뀌지만 관객의 관람이 가능한 ‘예선’과 ‘최종관문’은 고정이라고 했다. 이 두 관문에서 시험 보는 것은 전사에게 요구되는 자질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직관적인 것이라고.
그 중 예선에서 보는 것이 바로 ‘힘’이었다.
예선 과제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본인 힘에 맞게 저기 쌓여 있는 바위들 중 하나를 들어 올리는 것.
상대평가라 여기서 지원자의 하위 70%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현재 참가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했으니, 이 돌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시험에서 무려 이천 명이 넘게 떨어지는 셈이었다.
이윽고,
-그럼, 전사의 길, 그 첫 번째 서막! 예선 ‘돌 들어올리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잘해라!”
“힘을 보여주라고!”
예선이 시작되었다.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스무 명이 먼저 바위더미로 향했다. 스무 명씩 로테이션 되는 구조인 듯했다.
돌은 무릎 위로 들어 올려야 하며, 5초를 버텨야 한다. 그 전에 떨어뜨리면 곧바로 실격이다.
별 것 아닌, 지극히도 단순한 시험이었으나 생각보다 보는 맛이 있었다.
끙끙대며 돌을 들어 올리는 참가자들을 향해 관객들의 환호가 끊이질 않았다.
“들어!”
“멍청한 녀석아, 그게 네 힘으로 되겠냐!”
“포기하지 마! 들어, 그렇지! 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되자, 슬슬 합격 컷이 되는 바위들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대충 성인 하나만한 크기의 바위가 그 기준이었다.
다만 힘이 있는 자들은 보다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려 했는데, 이는 예선결과에 따라 본선에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혜택이 뭔데?”
“그야 모르지. 매번 달라지니까.”
어쨌거나 무거운 걸 들수록 유리하긴 하다는 것이었다.
“흐음.”
물론, 내게는 그리 유의미한 정보는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들 것은 정해져 있었으니.
얼마나 지났을까.
약간이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무렵, 갑작스레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 차례에 뭔가 유명한 녀석이 등장한 모양이었다.
그 녀석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돌 앞으로 이동한 20인 중, 유독 커다란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덩치만 따지자면 나보다도 큰 대머리 녀석이었다.
때마침,
“어어?”
왕녀가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저걸?”
그러나 이와 반대로, 관객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놀라 입이 굳어버렸던 것일지도.
대머리 거한이 선 곳은 가장 커다란 ‘코끼리 바위’ 앞이었다.
곧이어 녀석이 그걸 잡고는,
“······끙!”
힘을 쓰기 시작했다.
“으으······ 크어어!”
이내 바위가 점차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뜨, 뜬다!”
“떴어!”
“괴물이다!”
번쩍 허공으로 떠올랐다.
순간, 경기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쏟아졌다.
바야흐로, 첫 번째 괴물의 등장이었다.
대머리의 차례 이후 한동안 용암처럼 들끓던 관객석이 다시금 안정을 찾아갈 무렵,
“이제 다음이 나야.”
왕녀의 차례가 되었다.
“쉬엄쉬엄 들라고.”
“저걸 들 생각이야.”
왕녀가 가리킨 건, 역시나 ‘코끼리 바위’였다.
“괜찮겠어? 힘들면 그 유령할배라도 부르던가.”
“무시하지 마. 나도 저 정돈 들 수 있어. 어디 가서 힘으로 져본 적 따윈······ 벼, 별로 없으니까!”
잠시 후, 왕녀의 등장에 잠잠해졌던 관객석이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왕녀가 여성이기에 그런 건지, 아니면 두 번째 ‘코끼리 바위’의 도전자기에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 여자야!”
“설마 저걸 들어 올릴 생각인가?”
“미쳤어! 말이나 되냐고!”
관객들은 기대 반 의심 반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기대 1, 의심 99 정도로.
이윽고,
“흐아압!”
왕녀가 바위를 잡고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드, 들었어!”
“괴물이다!”
“여자 괴물이야!”
그녀는 앞서 대머리 녀석보다도 더욱 빠르고, 쉽게 바위를 들어올렸다.
“허······.”
역시나 저 여자도 괴물은 괴물이었다.
왕녀는 돌아온 뒤, 짤막하게 소감을 남겼다.
“꽤 무겁긴 했지만,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당신이라면······ 어쩌면 두 개를 들 수 있을지도 몰라.”
“흐음, 그래?”
이어 다시 몇 차례 순번이 지나간 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참가자들 앞으로!
나는 두어 차례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바위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어쩌지.”
사실 그즈음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였다.
물론 저 ‘코끼리 바위’를 들지 못할까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다.
바로 연출 때문이었다.
만약 그전까지 저 바위를 아무도 들지 못했더라면, 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냥 가서 저것만 들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헌데 이미 둘이나 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여자이고. 내가 세 번째로 저걸 들어봤자, 딱히 파격적인 느낌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머리 아프네······.”
그러고 터벅터벅 코끼리 바위 앞까지 가니, 그래도 관객들의 환호성이 터지긴 했다.
“이야!”
“저 주걱턱도 코끼리 바위에 도전하려나 봐!”
“힘내라!”
‘아니, 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차라리 이 바위가 몇 개 더 있었다면 고민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두 개, 세 개 들면 되니까.
‘이걸 들고 묘기라도 해야 하나······ 다른 거랑 같이 들고 저글링이라도 해볼까.’
그러고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 주걱턱! 거기는 고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들지 못할 것 같으면 옆으로 이동해 다른 바위를 드세요. 시간낭비하지 말고!
사회를 보던 이가 나를 보고 한소리 했다.
이어,
“우우!”
“못 들 거면 꺼져!”
“아무나 들 수 있는 건 줄 아냐!”
관객들도 곧바로 돌변하여 내게 욕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뭐 얼마나 지났다고.
‘하, 시끄럽네.’
심지어 꺼지라는 말과 먹던 음식을 던지는 인간도 있었다.
그때였다.
‘······던져?’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 하는 느낌이 났다.
던진다라······ 던진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던질만한 곳, 던질만한 곳······.
마침,
‘아, 저기 있네.’
적당한 과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귀족석인 듯, 호화롭게 꾸며진 관객석 한 쪽에 멀뚱히 앉아있는 한 왕자님의 얼굴이.
네르구이였나, 메로구이였나 하는 녀석.
물론 이 같은 행동이 후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어쩌면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며 귀찮은 일이 적잖이 생길지도.
하지만 나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쇼맨쉽이 중요하지, 그까짓 뒤탈이 중요할까. 게다가 악당 역할이야 뭐, 익숙할 만큼 익숙하니.
그리고 한번쯤은 녀석에게 제대로 된 경고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코끼리 바위’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곤 곧장 이를 들어 올렸다.
-아니, 거기 주걱턱! 실격처리 하기 전에 어서 다른 바위나 들······ 어? 어······?
‘그래도 꽤 무겁긴 하네. 저기······ 넘길 수 있으려나?’
관객석까지의 거리는 대략 40~50m 정도.
솔직히 긴가민가하긴 했다.
그래도,
‘에이, 몰라. 메인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어째 좀 더 힘이 세진 것 같은 느낌도 있었으니.
“들었어!”
“쉬, 쉽게 든 것 같은데?”
“저 주걱턱도 괴물이야!”
하지만 나는 관객들의 웅성거림에도 우쭐해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거 하나 든다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할 수 있겠냐고.”
이어,
“이 정도는······ 해야지!”
나는 바위를 냅다 4황자가 있는 쪽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부웅-.
물론 녀석을 그대로 노린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위, 아슬아슬하게 객석을 넘길 요량으로 던진 것이었다. 인명피해를 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건 그저 ‘경고’일 뿐이니.
그리고 다행히도.
부우웅-.
바위는 아슬아슬하게 객석 위를 넘어갔다.
······.
장내는 고요했다.
이어,
쿠왕-!
바위가 날아가 무언가를 폭파시킨 듯한 굉음이 들려왔음에도, 객석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적막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경기장을 가로지른 채,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허공을 향해 씩 웃어주는 건 잊지 않았다.
“요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