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60
60화 죽이세요
***
근래 조용할 날 없던 대전이 또 한 번 들썩거렸다.
“이게 당최 말이나 되는 행위입니까!”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하오!”
마치 지난 밤 꿈이 현실로 들어난 것 마냥, 지난 회의 때와 똑같은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몇몇이 불같이 화를 내고, 몇몇이 그런 그들을 자제시키고.
매번 같은 말이 반복되듯 흘러나오고.
건방지네 마네. 혼쭐을 내줘야 하니 어쩌니.
다만 이제까지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긴 했다. 바로 대상. 건방진 인간을 손봐주자는 것 자체는 동일했지만, 그 대상이 달랐던 것이다.
“분명 우리를 노리고 던진 거 아니겠소!”
“인명 피해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만약 넘어가지 않기라도 했다면······.”
“그 주걱턱 녀석!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됩니다.”
성격이 급한 자들 몇몇이 그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나같이 전쟁을 부르짖던 ‘전쟁파’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허나 이미 전사의 길에 들어서 있는 자를, 그것도 예선통과 자격까지 획득한 자를 강압적으로 끌어내 처벌하기는 좀······.”
“게다가 과거의 죄가 드러난 것도 아니고, 힘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을 문제 삼는다? 이는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소이다.”
이들은 만류하는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연합파’였다.
보통의 경우, 보다 과격한 성정의 ‘전쟁파’ 인사들이 좀 더 소리를 내곤 했지만 오늘은 유독 ‘연합파’ 인사들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이는 이전 ‘테르미스 왕녀’ 건과는 달리, 그 주걱턱에 대한 여론이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거리에선 아직까지도 ‘주걱턱’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올 정도였으니.
또한 ‘전쟁파’ 측의 수장이라 볼 수 있는 타마르 대신이 좀처럼 입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 역시도 이 같은 상황에 일조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같은 ‘전쟁파’ 쪽 인원들조차 의아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거 바위 좀 들다 삐끗한 거 가지고 뭘 그리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그거 좀 찔끔했기로서니 지금 장안의 화제인 자를 잡아넣겠다고? 참나, 그 무슨······ 쯧쯧.”
“삐끗은 무슨! 두 번 삐끗하면 아주 그냥 경기장 전체를 박살내겠구먼! 그리고 찔끔하긴 누가! 그놈의 불경을 문제 삼는 거지, 누가 겁을 먹었다고 했소!”
지금은 다들 현역에서 물러났다지만, 과거엔 모두 전사로서의 길을 걸었던 자들이다. 역시나 과열된 분위기는 쉽사리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전사의 길이 우리 두골 제국의 신성한 의식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죄의 성역이 되어선 곤란하지요. 잘못을 한 게 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놀랍게도, ‘연합파’의 일원인 왕사(王師) 바타르였다.
마치 진영을 착각한 듯한 그의 발언에, 다들 입을 다문 채 바타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늙은이는 그에게 딱히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그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자를 소환하여 잘잘못을 가리는 게 아주 틀린 일만은 아니겠지요.”
“허어······.”
“하지만······.”
이에 웅성거림이 조금씩 심화되려 할 즈음이었다.
바타르가 재차 입을 열었다.
“다만 몇 가지만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여태 1황자님의 부탁을 받고 테르미스 왕녀를 쫓아 내려갔던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마이닌 왕국은 물론이고, 저기 저 웨스트랜드까지 넘어갔었죠. 물론 금방 다시 돌아오기는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때 이스트랜드로 다시 넘어오는 배 안에서, 저는 그자를 봤었습니다. 주걱턱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배엔 여기 네르구이 황자님과 타마르 대신께서도 함께 타고 계셨죠.”
그 말엔 다들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두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선 대충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 배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잘 모르실 겁니다.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주걱턱 그자는 배 안에서 S급 모험가와 한 판 붙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호오, S급 모험가?”
“이름이?”
“이스트랜드에서 활동하는 자요?”
몇몇 이들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등급이 높은 모험가는 어디에서도, 또 누구에게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법이었으니.
“이 늙은이는 그것까진 잘 모릅니다. 아마 그에 대해 아는 분은 따로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그즈음엔 자리에 있던 이들의 눈이 모두 자신을 향했다. 말을 마친 바타르가 자신을 힐끔거렸기 때문이다.
다만, 네르구이는 그저 무심히 앞에 놓인 차만 훌쩍거릴 뿐이었다.
그때 성미가 급한 누군가가 대뜸 물었다.
“결과는?”
“일방적이었습니다. 아니, 일방적이라는 표현조차 적합하지 않겠군요. 그만큼 압도적이었으니. 주걱턱은 단지 한 손가락만으로 S급 모험가를 제압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양 진영이 모두 동일했다.
움찔거리며 말없이 침을 삼키는 것.
“어쨌거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잘잘못을 가려야겠지요. 다만 그를 직접 소환하고 추궁한 뒤, 합당한 벌을 내리고자 하는 분들은 단단히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자를 제압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테니까요.”
······.
장내에 내려앉은 침묵 즈음이 길어질 즈음,
“먼저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르구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 군병이 움직일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 나와 본 것이었으나, 역시나 괜한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게다가 주걱턱이 목표로 잡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마침 녀석이 바위를 던지기 직전, 녀석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마치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눈을.
솔직히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코끼리만한 바위를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짜고짜 집어던지는 인간이 아닌가. 아니, 인간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겠고.
어쨌거나 웃기는 일이었다.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데 무슨.
‘······괜히 지들이 호들갑 떨기는.’
그러고 막 회의실을 나와 침소로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멀찍이서 시종이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뭐지?”
“찾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그는 어쩐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보고 내용도 수상했다. 본디 방문객의 정체와 그 목적부터 밝히는 게 기본이거늘.
“정체는?”
“모르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거야 있나. 능력 밖의 일인 거지. 어디에 있지?”
“일단은 정원에서 기다리라 일러뒀습니다. 제 권한 상 인적이 드문 곳이라야 그곳밖엔······.”
“가지.”
네르구이는 곧바로 정원으로 향했다.
이윽고,
“저기, 저자들입니다.”
시종이 말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이었다. 몹시도 뚱뚱한 남자와 몹시도 홀쭉한 남자.
그들이 네르구이를 보곤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천천히 다가왔다.
“누구신지.”
“주위부터 물려주시겠습니까?”
경계가 되긴 했으나 네르구이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만약 이들이 해코지할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에 움직였을 테니.
“······그러지.”
네르구이의 명에 시종이 저만치 물러나자마자, 둘 중 홀쭉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재를 삼킨 뱀입니다.”
순간 네르구이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재를 삼킨 뱀.
의뢰를 맡긴 암살단 중, 수위를 다투는 집단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의뢰완수 대금을 반환한 암살단의 이름이기도 했고.
네르구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재를 삼킨 뱀이라······ 그게 뭐죠? 뱀 장수들이신가?”
“암살단입니다. 시간낭비를 좋아하지 않으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4황자님께서 저희를 아시는 것만큼 저희 또한 의뢰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의뢰인에 대한 조사는 시작부터 끝내놓는 주의라서.”
“호오.”
“원칙에 다소 어긋나는 일이긴 하나, 말씀드릴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뭐, 이 이상 발뺌할 순 없을 듯했다.
“그래요 뭐, 사실 나 또한 한 번쯤은 보고 싶었으니. 유일하게 대금을 반환한 양심적인 분들이 아니신가. 이를 책임감이라고 봐야 하나요?”
“어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흠, 그래서 찾아온 이유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작업에 꽤나 지장이 갈지도 모를 일인지라.”
“뭐죠?”
“혹, 다른 암살자들을 따로 고용하셨습니까?”
“······다른 암살자?”
네르구이는 그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일단 그 물음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기도 한데다, 방금 말만으로도 이 수준급의 암살자들이 문제 삼을만한 또 다른 암살자가 활동하고 있단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저희와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정보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혼선을 빚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현재 내가 고용한 암살자들은 당신네가 끝입니다. 물론 의뢰를 계속 진행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죠. 다만, 암살자는 아니지만 내 개인 수하들이 따로 움직이고는 있습니다. 설마 이들의 정보가 필요하단 말은 아니겠지요?”
분명 자신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홀쭉한 남자의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석연찮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왜 그러시죠?”
“낯익은 얼굴들이 보여서요.”
“누구?”
“혹, ‘조련사’라는 집단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생소한 이름이었다.
“전혀.”
“······정말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홀쭉한 남자는 이어 ‘조련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은 2,3년 전쯤 이스트랜드에 등장한 신흥세력으로, 실제 단체명이나 조직원 수, 근거지를 비롯한 모든 정보가 베일에 가려진 비밀집단이라고 했다. ‘조련사’라 부르는 이유는 조직원들 모두가 ‘신수’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신수요? 그······ 전설상의?”
“예. 전해 내려오는 것만큼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진 않지만, 분명 특별함이 느껴지는 동물들이긴 하더군요. 정확한 건 저희 또한 모릅니다.”
“······신수라.”
그는 이어 덧붙이길, 암살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은 아니나 간혹 그와 비슷한 일을 하기도 해 가끔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지금 여기 와 있다?”
“예. 아직 그 목적까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하여, 혹 황자님께서 고용하셨나 싶어 물으러 왔던 것입니다.”
“아뇨, 전혀.”
홀쭉한 남자는 네르구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 방해될 만한 요소는 없습니까? 가령, 제 개인 수하들 같은 경우는?”
홀쭉한 남자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네르구이는 씩 웃으며 말을 흐렸다.
이 건방진 말라깽이가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을 줄은 몰랐다.
‘저 또한 실패해 뒤꽁무니나 쫓는 주제에 건방은······.’
이어 돌아서려던 그때,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혹, 의뢰를 그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
잠시간 질문의 의도를 생각해보던 네르구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를 재차 확인한 이유에 대해선 금방 추론이 가능했다.
저자도 아는 것이다. 왕녀를 죽이는 게 더는 ‘전쟁’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외려 방해만 될 뿐이지. 전쟁을 하려면 왕녀가 시험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만,
“물론이죠. 의뢰내용은 그대로입니다.”
네르구이는 이에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전쟁은 처음부터 목적이었던 적이 없으니.
“죽이세요.”
*
숙소 부근의 어느 한 공터.
“후······.”
나는 한 차례 길게 심호흡했다.
가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괜스레 긴장감이 올라왔다.
하긴, 이번 관문은 저 소꿉장난 같던 ‘바위 들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험난한 것이었으니.
곧이어 나는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현재 내 몸이 고작해야 뻐근함 따위에 짓눌릴 만큼 나약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내 머릿속 깊은 곳에 내장되어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 의하면, 어쨌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기 전 스트레칭은 필수에 가까웠다.
“헛둘, 헛둘······.”
그렇게 팔과 다리를 쭉쭉 당기고 있을 때였다.
“······여기냐!”
멀찍이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음성이었다.
돌아보니, 붉은 눈을 한 왕녀가 흉흉한 기세를 뿜어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셨소, 유령 할배.”
“네놈! 천둥벌거숭이 같은 짓을 했더구나! 귀족들을 향해 바위를 쳐 던져버리다니! 크하하하!”
“그거야 뭐······ 별 것도 아닌 걸.”
“그래서 이젠 나를 한 번 던져보겠다고? 내가 바로 그 바야르 칸이라는 걸 알고서 하는 소리더냐!”
“그래요, 아니까 불렀지.”
“크하하하! 이 건방진 녀석이!”
나는 그러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흐음.
내가 굳이 저 말 많고 사나운 유령을 호출한 데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메인시점이 적용되어 있는 지금을 한시도 허투루 쓸 수 없기 때문에.
이 전사의 길은 예선이 끝나고 하루, 본선 1차와 2차가 끝난 후 또 하루, 이렇게 총 이틀을 쉰 다음 최종 관문이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즉 예선이 끝난 지금, 하루가 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여, 내겐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대신 뭐라도 좀 할 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저 유령 할배와의 대결은 꽤나 볼만한 콘텐츠가 될 수 있었다. 일단 보기에 특이하고, 캐릭터의 개성도 뚜렷하며, 무엇보다 강력하지 않은가.
또한 나는 그를 등장시킴으로써 약간이나마 작가의 호감도를 상승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또한 공들여 설정된 캐릭터일 텐데, 원작에서는 등장조차 못하지 않았던가.
양심이 있으면, 고마워 좀 하라고. 작가야.
두 번째, 별 거 없다. 일전에 약속을 했었으니까. 한 판 붙기로.
그리고 사실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기세도 기세지만, 대충 들어보니 저 바야르 칸이라는 유령의 업적이 제법 굉장했던 터라.
영토를 기존의 다섯 배가량으로 넓혔다는 둥, 그 당시 없애버린 왕국의 수만 백여 개에 달하고, 이스트랜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할 뻔 했다는 둥······ 어디 말만 들어보면 칭기즈 칸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를 끌었던 건, 그의 믿기 힘든 ‘힘’에 관한 일화들이었다.
천 명을 상대로 한 줄다리기에서 이겼다는 둥, 식량을 구해오겠다며 나간 뒤 잠시 후 거대 코끼리 두 마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는 둥, 어느 무인도에 고립된 이들을 위해 뗏목 용 자재를 육지에서 섬으로 직접 ‘던져서’ 날라줬다는 둥······ 하여간에 황당한 것들 투성이였던 것이다.
한 번 겨뤄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마지막 세 번째, 시험해 볼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실은 이번 전사의 길을 앞두고, 배경쇼핑을 좀 했었던 것이다.
이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하고, 관문을 쉽게 통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투를 할 때 보다 ‘멋있게’ 보일 수 있기 위함이었다.
물론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고유능력이 포함된 것들은 애당초 익힐 수가 없었으니.
가령, [무기3종 전문가]라든지 [어설프게 이것저것 배운 무예가], [진 적보다 이긴 적이 많은 길거리 싸움꾼], [도끼질을 엄하게 배운 나무꾼]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배경들 안에 ‘무기술’이니, ‘전투감각’과 같은 히든 특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여, 본선 관문을 앞두고 이에 대해 한 번 시험해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저 흉포한 인간을 시험 상대로 쓴다는 게 조금 걸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뭐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리하여,
“크하하하! 이제 와 울고불고 빌어도 늦었다. 혼쭐을 내주 마, 이 건방진 주걱턱 녀석아.”
“예예, 그러든가 말든가.”
이렇듯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왕녀와 대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
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지만, 역시나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가히 거대한 산악을 연상케 하는 위세.
투쟁심이 불처럼 타오르고, 마치 피를 갈구하는 듯한 흉포함이 이글거리는 두 눈.
더욱이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여유와 강인함은 절로 몸을 떨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물론,
“준비됐으면 오든가. 늙은이.”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가 메인챕터를 맡았을 경우, 그에겐 한 가지 절대적인 의무가 따라붙는다.
바로 지지 않는 것.
챕터를 짊어진 것만큼의 무게감을 보이는 것.
그것이 설사 연습시합이라 할지라도 결코 져서는 안 된다. 독자들의 실망감을 자아내는 순간,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테니.
‘후······ 해볼까.’
그렇게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있을 즈음,
“크하하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 그럼······ 간다, 주걱턱 애송아!”
왕녀의 모습을 한 바야르 칸이 내게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