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61
61화 바야르 칸과의 대결
***
박투.
바야르 칸과 나의 대결 종목은 바로 이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냥 치고 박고 싸우기.
단순한 힘 싸움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이 종목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허들이 하나 껴 있었다.
바로 상대가 여자라는 것.
실제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바야르 칸이지만, 어쨌거나 그가 왕녀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보이는 모습만으론 가녀린 여인’인 그를 덩치 큰 내가 후려치는 모습이 보기에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는 사람도 많은데.
이 ‘소년만화’라는 장르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꽤나 보수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추구하는 방향성이 확실한 만큼, 다소 꺼리는 유형의 캐릭터와 등장해선 안 되는 장면의 기준도 명확하고, 그것에 대한 독자 피드백도 확실한 편이다.
즉, 악당도 아닌 정도(正道)를 따르고 있던 캐릭터가 악당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다?
반응이 좋게 나올 턱이 없었다.
더군다나 당장은 현 상황을 쉬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독자들로선 왕녀가 갑작스레 말투와 목소리가 변한 이유도, 바야르 칸이니 뭐니 하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유도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몰입하기 힘든 상황에, 다짜고짜 동료인 줄 알았던 여인을 팬다? 독자들을 위해 기획했던 전투가 외려 불쾌함만 조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대뜸 허공에다 대고 주저리주저리 상황설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와 같은 이유로,
“크하하하! 이 애송이 녀석! 어딜 쥐새끼 마냥 도망만 치는 게냐!”
“거참, 거······ 가슴부터 좀 들이밀지 말라고!”
“변명 한 번 기똥차구나!”
쾅!
내 마음껏 받아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간단한 주먹질 한 방으로 코앞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박살낸 그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진정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쪽을 당하게 생겼다.
때마침,
“에잉, 재미없는 거. 혹 시간을 끌어 내 힘을 빼려는 속셈이냐?”
바야르 칸 또한 영 마땅찮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하······ 거 혹시 본 모습 드러내는, 뭐 그런 능력 같은 건 없습니까?”
“뭐? 본 모습?”
이어,
“쯧, 설마 설마 했더니······ 지금 내가 왕녀의 몸에 깃들어 있어서 때리지 못했다, 이 말이더냐? 왕녀를 때릴 수가 없어서?”
바야르 칸이 슬쩍 팔짱을 끼며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는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당사자가 저렇게 말해줌으로써 나로선 한결 짐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독자들도 ‘아, 도망만 치는데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을 테니. 물론 그 행위의 타당성에 대하여 공감할지는 의문이지만.
“아니 그것보다도······ 일단 당신 모습이 너무 가녀리잖습니까! 이거 반칙 아니냐고! 예? 누가 보면 나를 욕하겠어! 덩치 큰 악당이 나쁜 짓 한다고!”
나는 기회가 생겼을 때 열렬히 성토했다.
물론 추가적으로 상황 설명까지 덧붙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뭐랄까, 그건 너무 속보이는 수작이었으니.
“아니, 지금 여기 누가 있다고······ 에잉, 네놈 전사의 그릇이 아니로구나! 전사라면 응당, 생김새 따위에 구애받지 말고 적을 처단할 수 있어야 하거늘!”
바야르 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곧이어,
“완전하게 내 모습을 구현할 순 없다. 다만······ 유령만치로 어렴풋이 덧씌운 듯 보이게 하는 건 가능하지. 뭐, 그렇게라도 해주랴?”
그러고 슬쩍 덧붙이는 것이었다.
생김새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고 나를 꾸짖긴 했지만, 왠지 그 또한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렇듯 친절히 반응해주는 걸 보면.
“아니, 그럴 수 있었으면 미리미리 했어야지! 당장 해주시죠!”
“에잉, 귀찮게스리. 쓸데없이 힘만 빼게 하는구나.”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웬 증기 같은 게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증기는 이어 곧장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선명하고 또 리얼한 느낌이었다. 마치 정말로 왕녀가 유령에게 잡아먹힌 듯 보일 정도로.
게다가 유령의 크기가 실제 인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또 험상궂었기에, 그냥 딱 봐도 악령 느낌이 났다.
“이야, 연출 좋은데요? 저더러 일부러 더 힘내라고 그렇게 변하신 건가요? 크고 포악하게?”
“무슨 소리냐! 네놈이 내 생전 모습을 원하지 않았더냐!”
“오우, 그게요?”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유령의 크기는 가히 코끼리만 했으니. 그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들이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시각적으로 한층 나아진 모습이었다.
이젠 어느 정도 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제대로 붙어봅시다.”
“크하하하! 이제 군말은 말거라.”
곧이어, 나와 유령을 뒤집어쓴 왕녀가 충돌했다.
쾅-!
*
“네 녀석······.”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그 다음에 이어진 감정은 다름 아닌 감탄이었다.
바야르 칸은 눈앞의 덩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봤다.
주걱턱.
가히, 육신을 잃은 후 처음으로 만난 호적수라 칭할 만했다.
시작은 박투였다.
대충 간을 볼 요량으로 돌진해 갔더니, 녀석 또한 망설임 없이 맞부딪쳐왔다.
‘호오······.’
몸에 가해지는 충격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묵직하다.
곧이어 절반 이상의 힘을 실은 채 주먹과 발을 연달아 날렸음에도, 녀석은 곧잘 막아냈다.
손날로 목을 노리면 어깨와 팔을 동시에 들어 올려 이를 방어해냈고, 무릎으로 복부를 찍으려하면 손을 교차시켜 사전에 이를 차단했다.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막은 채 기회를 노렸으며, 급소가 아닌 부위로의 공격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한 채 반격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진정 박투에 어울리는 전법이었다.
더욱이,
“놈! 무예를 익혔느냐!”
어설프긴 하나 무리(武理)에 맞는 동작들도 곧잘 선보였다.
다리를 공격해 무너뜨리려 하니, 뒷발에 중심을 둔 채 이를 흘리고 방어해내는 꼴이 제법 태가 나왔다.
또한 허초도 어느 정도 판별해낼 줄 알고, 힘의 강약에 따라 맞춰 대응할 줄도 알았다. 이는 투로(鬪路)에 대한 이해도가 있지 않고선 나올 수가 없는 반응으로, 필시 일정기간 이상을 무예 수련에 쏟은 게 틀림없었다.
다만 희한했던 것은, 그러면서도 아주 기초적인 실수를 한 번씩 한다는 것이었다.
잘 막다가도 간단한 동작에 헛손질이 나온다든지, 거리조절을 위해 몇 발자국 물러난 걸 따라잡겠답시고 쫓아오다 저 홀로 발이 꼬여 휘청거리기도 했다.
또 타격이 아닌 잡기를 위해 소매나 가슴팍을 공략하려 하면, 웬일인지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 손쉽게 목표 지점을 잡아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주 희한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무예에 익숙한 듯 보이면서도 기초가 부족했고, 또 어설피 배웠다고만 여기기엔 현묘한 동작들이 가끔씩 튀어나왔다. 무리를 알고 펼친다기보다는, 마치 몸에 배어있는 듯 움직이기 일쑤였다. 마치 기억을 잃은 고수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한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이들과 대결해온 자신으로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진정 기억을 잃었던 건지, 아니면 뭐 이걸 천부적인 격투 감각을 지닌 것으로 해석해야 할지.
다만, 이 녀석과의 박투는 놀라움보다는 아쉬움 쪽이 더 컸다. 어째 점차 치열해지고 거칠어지는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본래 진흙탕에 뒹굴 듯, 볼장 다 보며 겨루는 게 진짜인 법이거늘.
녀석의 능력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녀석의 자세 혹은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이 녀석은 재는 게 너무 많았다. 그나마 방어할 때는 괜찮았지만, 공격할 때만 되면 자꾸만 멈칫멈칫 거리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싸움방식 자체가 육참골단(肉斬骨斷 : 살을 내어주고 뼈를 끊는다)의 경향이 짙어, 더욱더 녀석과의 합이 좋지가 않았다. 몸을 들이밀면, 저도 따라 물러나는 게 곧장 느껴질 정도였으니.
‘피곤한 녀석이군.’
하지만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그와 비슷한 경향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평생 여인과 결투하지 않은 까닭도 실은 같은 이유 때문이었으니.
하여,
“놈! 시시하구나! 차라리 힘 대결이나 해보자꾸나!”
종목을 바꿨던 것이다.
두 번째, 힘 대결.
바야르 칸은 주걱턱 녀석과 두 손을 맞잡은 그 순간, 비로소 그간 얻고자 했던 만족감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 녀석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것.
바위 따윈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의 거력이 녀석의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위압감이 들 정도의 힘이었다.
바야르 칸은 웃었다.
다 흩어져 먼지가 되어버린 줄만 알았던 맞수가 여기, 존재하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게 진정 네놈의 전력이란 말이더냐! 가소롭도다! 덩치가 울겠구나!”
“아니, 본인 덩치나 생각하라고! 지금 그거 당신 몸 아니잖아! 유령이 본체잖아!”
“건방지게 대꾸할 힘이 남아 있나 보구나!”
이어 마주잡은 두 손아귀에서 거력이 폭발했다.
푸욱-!
돌바닥이 움푹 패여 들어감과 동시에, 충격파가 단숨에 주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바야르 칸은 멈추지 않고 더욱더 힘껏 힘을 밀어 넣었다. 건방진 녀석의 기세를 확 눌러주기 위하여.
헌데,
‘허······ 고작해야 약간 우세한 정도라니.’
주걱턱 녀석의 몸은 조금씩 뒤로 밀리기만 할뿐, 여전히 팽팽히 맞서오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직접 겨루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 녀석의 힘은 그만큼 대단했다.
“네깟 놈이 버틴다는 게 말이 되느냐! 살아생전 내 힘의 반의반만큼도 따라온 놈이 없었거늘!”
바야르 칸은 노호성을 내지른 뒤, 잠재되어 있던 힘을 대거 끌어올렸다.
테르미스를 만난 이후 이 정도의 힘은 써본 적이 없었다. 이 몸이 자신의 힘을 버티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케이, 인정할게요. 영감님 좀 세긴 세시네요. 근데······.”
이 녀석이 밀리지가 않았다. 황당하게도, 밀리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건······.
“나도 다 쓴 건 아니었거든?”
“뭐, 뭣이!?”
그때였다.
“엇?”
밀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밀리고 있었다. 녀석의 힘이 갑작스레 증가했던 것이다.
바야르 칸의 눈이 흔들렸다.
‘이, 이만한 힘을 아끼고 있었다고?’
이미 두 다리는 땅 아래로 푹 꺼진 뒤였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지면이 진흙마냥 뭉개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몸이 고정되지가 않았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박히고 있었다.
“어어······?”
“흐읍! 슬슬 인정하시죠······.”
“무, 무엇을 말이더냐!”
“뭐긴.”
순간 주걱턱이 씩 미소 지었다.
“패배지.”
이어,
“자, 잠깐······ 잠깐만!”
주걱턱의 얼굴이 하늘을 뒤덮었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땅 속에 콕 박히고 말았다.
녀석을 누르지 못하고, 되레 자신이 짓눌리고 말았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힘에서 눌렸다.
물론 전력은 아니었다. 그 정도 힘은 생전에도 몇 번 낸 적이 없었으니. 이 몸에선 발현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패배했다. 대두골 제국의 칸이 졌다. 바야르 칸이 꺾였다.
“크, 크하하······ 크하하하!”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하고.
다만, 놀람과 자조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즈음,
홱-.
얼굴 위로 한 무더기의 흙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시끄러워요.”
“······.”
곧이어, 바야르 칸이 빽 소리를 질렀다.
“흐, 흙은 덮지 마, 이 빌어 처먹을 녀석아!”
*
사실 꼼수를 좀 쓰긴 했다.
[성장하는 힘]이는 후에 엑스트라마냥 깔짝 등장하고 사라지는 ‘지미’라는 녀석의 고유능력으로, 말 그대로 발동하는 순간 힘이 상승하는 능력이다.
이름만 보자면 칼 자이드의 [멈추지 않는 성장]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 그리 대단할 건 없는 능력이었다. 단순히 힘만 올려주는데다, 그 상승 폭 또한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상점 내 ‘고유능력 카테고리’에서 가장 싼 값에 팔리고 있었겠는가.
다만 한 가지 장점이라면, 발동여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솔직히 중간에 좀 안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계에 이르렀는데, 이 할배는 아직도 여력이 남은 듯했으니.
하여, 몰래 이를 흉내 냈던 것이다. 질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저 유령 할배가 본인의 힘뿐만 아니라, 왕녀의 힘까지 더해 쓴다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는 2대 1인데, 나도 뭐······ 능력쯤 쓸 수 있지.
고로, 저기 저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길에도 나는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뭘 자꾸 봅니까?”
“······.”
“뭐요, 왜요? 억울해요?”
“네 녀석······ 강하구나.”
“아니, 그걸 여태 몰랐다는 겁니까?”
“내 생각보다도 더욱 강했어.”
“뭐, 아시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덤비겠단 소리는 하지 마시고······.”
그때였다.
“네 놈에게로 옮겨가야겠다.”
“······에?”
“이 허약한 계집애의 몸에선 힘이 제대로 안 나와. 반의반도 안 나왔다고! 그러니까 무효다.”
당혹스런 말이었다.
“어······ 당신은 왕녀의 고유능력 아닙니까? 왕녀가 소환한 유령이라거나······.”
그러자 그가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무슨 소리냐 그게. 유령화 하는 건 내 고유능력이다.”
“······유령화요? 당신, 죽은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맞아. 이 능력은 내가 유령이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다. 물론 생전에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나도.”
“······.”
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였다.
고유능력이 무슨 빙의형 귀신이 되는 거라니.
“꿈 깨쇼. 난 몸을 내어줄 생각 따윈 없으니까.”
“흐흐, 그게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으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딱히 뭔가를 하려 하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왕녀를 떠나지 않으리란 걸.
“거기나 그냥 계속 붙어 있으시죠. 나름 나쁘지 않은 몸일 텐데. 그리고 뭐······ 꽤 친한 사이 아닙니까?”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간의 침묵 후,
“······본래도 떠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가 슬쩍 입을 열었다.
“왜죠?”
“이 녀석이 고유능력을 얻지 못하는 게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바야르 칸은 왕녀의 자질은 그 누구보다 출중하나, 어떤 이유에선지 고유능력이 생성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날 때부터 발현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 어째선지 꽁꽁 묶여있는 듯하다고.
그는 이어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주걱턱, 네가 좀 도와라.”
“엥? 뭐를요?”
“얘 고유능력 발현시키는 거.”
황당한 소리였다.
“제가요? 갑자기?”
“그래, 왠지 느낌이 오거든. 네놈이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허.”
감 좋네.
물론, 나는 아마도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유령 할배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조연급 캐릭터들이 어떤 때 어떤 패턴으로 각성을 하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동기가 부족했다.
“제가 왜······.”
“도와주지.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예?”
“언제고 내 힘을 빌려주겠다는 말이다.”
“당신의 힘을요? 근데 그거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 않나······.”
그러자,
“이 건방진 녀석! 이 계집애의 몸이 약해서 내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건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힘만 센 귀신인 줄 아느냐!”
바야르 칸이 광분해 소리를 내질렀다.
아따, 이 유령 할배 성질머리 하고는.
“뭐가 더 있습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이스트랜드 전역에 내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어느 궁이든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만약 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고 이 대륙 전체가 네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게다.”
“······오호라.”
그건 좀 솔깃했다.
물론, 이 양반이 뻥이 좀 심하다는 건 감안해야겠지만.
“그럼 들려주시죠. 계획 좀 짜보게.”
“응? 뭐를?”
“이번 전사의 길에 관한 것 말입니다. 아마 좋은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호오······ 벌써부터 구상에 들어가다니. 네 녀석, 생긴 것과는 다르게 부지런한 구석이 있는 놈이로구나.”
“생김새 지적은 마시고, 관문에 대한 거나 말씀해보시죠. 칸이었으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어느 정도라니. 이건 내가 만든 거다! 나만한 전문가도 없다는 거지.”
대뜸 그러고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오, 잘 됐네요.”
“하지만 세부과제는 잘 몰라. 매번 바뀌니까.”
“······.”
뭘까, 이 양반.
“하지만 물론, 유형분석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흐음······ 일단 들려주시죠.”
“간단해. 일단 이 전사의 길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인내와 용기, 그리고 의지를 시험보고자 하는 것으로 두골제국을 위해 헌신할 진정한 전사를 뽑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지. 또한······.”
당황스러웠다.
‘간단하다면서 개념설명부터······?’
그렇게 나는 이 전사의 길의 목적과 그 방향성, 전체적인 기획의도에 관해 교육받게 되었던 것이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
바야르 칸은 투머치 토커였다.
*
다음 날 아침.
전사의 길 본선이 시작되었다.
-본선 1차 관문은 간단합니다. 말을 타고 목적지인 ‘마룬산’에 사흘 내에 도착하는 것. 도착하기만 하면 통과입니다. 다만 주의하실 점은, 말과 함께 도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내자의 말마따나, 관문 자체는 별 것 아니었다.
말을 타고 목표지점에 도착하기만 하면 됐다.
약간 까다로운 점이라야, 말의 건강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것 정도?
다만, 이를 앞둔 나는 조금쯤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어, 예······ 근데 그게······.”
예선을 높은 성적으로 통과한 것에 대한 혜택은 다른 게 아니었다.
남들보다 먼저 출발하는 것.
문제는,
“얘가······ 왜 이래?”
말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말을 다루는 솜씨엔 문제가 없었다.
항구에서 수도로 오는 길에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마장 견습 기수]라는 배경까지 구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짐작되는 원인이라야 하나뿐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늪지대. 그 외엔 딱히 말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요소가 없었으니까.
뭐, 딱 봐도 불길해 보이긴 했다.
‘암만 그래도 돌아가는 것조차 거부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정면이 아니라 옆쪽으로 빠지려 해도 당최 발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뒤로 갈 생각만 하고.
그때였다.
“안 가? 그럼 나 먼저 출발한다.”
“어, 어······ 잠깐!”
왕녀가 말의 궁둥이를 찰싹 때렸다. 그녀 또한 ‘코끼리 바위’를 들었기에 선두그룹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이어 놀랍게도, 그녀의 저 ‘건방진 흑마’ 녀석이 뚜벅뚜벅 앞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녀석 또한 약간 주춤거리는 기색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씩씩하게 잘 나아갔다.
내 말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하······ 씨.”
나는 고민하기를 멈췄다.
별 수 없었다. 왕녀만 따로 먼저 보낼 순 없으니.
이 앞에 어떤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 줄 알고.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가지가지 하네.”
히이잉-!
그러고 나는 냅다 말을 어깨에 들춰 멘 채, 왕녀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