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64
64화 네로
***
검은 고양이 네로.
이 녀석을 본 건 만화가 막 초반부를 지나, 중반의 시작을 향해 달려갈 즈음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마 레오 일행이 웨스트랜드에서의 S급 모험의뢰를 마치고 바다 건너 남쪽으로 내려간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녀석은 이스트랜드가 아닌 사우스랜드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캐릭터였다.
사우스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공원이란 명칭을 달고는 있지만 무려 노스랜드 대륙 전체가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지역이다.
네로는 레오 일행이 ‘진화병’에 걸린 신수를 치료하기 위해 찾은, 공원 내 한 동물농장의 일원이었다.
녀석은 농장주의 옆에 딱 붙어 있던 세 동물 중 하나였는데, 딱히 별다른 역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두 동물과 함께 그저 농장주의 액세서리 기능만 담당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녀석.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을 기억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그 생김새 때문에.
에메랄드 마냥 영롱히 빛나는 왼쪽 녹색 눈과 사파이어 마냥 신비로움을 머금은 오른쪽 푸른 눈. 그리고 목에 걸린 붉은 색 루비.
마치 세 개의 보석을 달고 다니는 듯 보인다며, 따로 보석고양이라고까지 불렸던 녀석.
그 고양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 더군다나 악질적인 행위를 반복한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은 내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곳 동물농장은 물론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레오 일행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는 곳이다. 동료인 신수의 병을 치료해줬으니까.
그리고 이후로는 ‘회수되지 못한 떡밥’ 마냥 딱히 등장한 적이 없었기에, 이토록 대륙 단위로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악당들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네로가 나를 보는 것만큼이나, 당황한 눈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때마침,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녀석이 의문에 차 물었다.
“어, 그게······.”
일단은 좀 모른 척 하기는 해야 할 듯싶었다. 녀석도 녀석이지만, 자칫 함부로 말을 놀렸다간 독자들의 의구심마저 증폭시킬 수 있을 테니.
“진짜 네로였어?”
“뭐?”
“아, 별 것 아냐. 전에 사우스랜드 국립공원 내의 한 동물원에서 일했었거든. 그때 네 소문을 들었지. 두 눈에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예쁘장한 고양이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고?”
네로는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지만, 딱히 그 이상 더 묻지는 않았다.
나도 나지만, 왠지 뒤의 녀석들을 신경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짐작하건대, 이는 ‘사우스랜드 국립공원’이라는 단어 때문인 듯했다. 현재 점조직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고, 저들은 그저 본진과의 연결고리 없이 이곳 이스트랜드에서만 부리는 수하에 불과하다면, 저와 같이 경계하는 모습 또한 충분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더 묻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내게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때였다.
“저, 저희가 하겠습니다!”
“따로 나서실 것 없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뒤에 있던 세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네로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녀석들이 믿음직스러웠다기보다는, 나에 대해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다만,
“다 같이 덤벼. 바로 끝내줄 테니까.”
나는 녀석에게 그리 많은 여유를 선사해줄 마음이 없었다.
곧이어,
그르렁!
그르릉!
그르······.
녀석들의 명령을 받은 세 마리의 노랭이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실은 두 마리는 벌떡 나왔고, 한 마리는 스리슬쩍 뒤로 물러선 채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신수는 신수네. 학습능력이 있는 걸 보면.’
몇 바퀴 돌다 날아간 경험이 확실히 녀석의 눈치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준 듯했다.
이어, 나는 앞으로 튀어나온 두 마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묘한 녀석들.
내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엔 별 게 없다. 녀석들이 현재 고유능력 발동을 비롯한 모든 행동들을 인간에 의해 제어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야생의 신수가 아닌 이상에야, 신수가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말을 따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저들과 같이 주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은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처음에 느꼈던 것과 같이 약간 기계화된 느낌이랄까.
‘설마······ 만들어진 신수?’
흐음. 아냐.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노스랜드의 미친 과학자’는 물론 오래전부터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설정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우스랜드의 동물농장 쪽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그쪽은 동물이 아닌 ‘과학’이 주인데다, ‘만들어진 신수’ 또한 ‘만들어진 능력자’의 시험모델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잠깐 스치듯 나오는 게 전부랄까.
무엇보다 그렇게 노스랜드와 사우스랜드가 다 엮여 있다고 보기엔, 작중에 공개되지 않고 묻혀버린 떡밥이 너무나도 많고 또 사안이 컸다. 솔직히 작가의 이야기 구성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차라리 그냥 동물농장 쪽이 별도의 제어 약품 같은 걸 개발했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그즈음,
“공격해!”
“불덩이를 날려!”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라고!”
뒤쪽에서 고래고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따라 노랭이들의 몸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한 녀석은 입에서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고, 한 녀석은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한 놈은 불이고, 한 놈은······ 전격 종류인가?’
남은 한 마리는 아직 아무런 능력도 발동시키지 않고 있었지만, 녀석 또한 이와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불이나 물을 내뿜는다거나, 전기를 발산하는 식의 능력.
추측의 이유는 비단 녀석들이 닮은 꼴 삼형제라서가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신수들이 쓰는 능력엔 인간들만큼 다양하고 확장성 있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그냥 불을 내뿜고 물대포를 쓰는 식이랄까? 또 기껏해야 몸의 크기를 조절하고, 발톱의 재질을 바꾸는 정도. 제아무리 등급이 높은 신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아무래도 신수가 ‘동물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원치 않은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인 듯했는데, 이것에 딱히 불만을 제기하는 독자는 없었다.
그제까지 신수에게 적용된 설정들이 워낙 과하다시피 했기에(고유능력을 쓰고, 말을 하며, 인간의 가까운 지능을 가졌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여겼던 게 아닐까.
더군다나 신수에겐 따로 ‘진화’라는 파워업 포인트까지 존재했다.
외려 고유능력의 제한마저 없었더라면, 레오의 모험왕 경쟁상대로 신수들이 대거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와 같은 이유로, 신수를 상대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단하다. 고유능력이 특별하지 않다는 건, 상성이고 공략법이고 할 것 없이 더 큰 힘으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니.
나는 농구공만한 불덩이가 내게로 날아오는 걸 보며, 하나의 고유능력을 발동시켰다.
순간, 내 몸에서 튀어 오른 스파크에 불덩이가 녹아 없어졌다.
연이어 날아든 구체 형상의 전기파 역시 가까이 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약자멸시’는 신수를 상대로도 훌륭히 적용되었다.
“저, 저······.”
“말도 안 돼······.”
사실 이는 녀석들을 대상으로 쓰기엔 과한 감이 있는 능력이지만, 약간의 팬 서비스 차원에서 발동한 것이었다.
이즈음 독자들은 또 한 번 흥분하게 되었을 것이다. ‘약자멸시’가 주는 뽕맛도 뽕맛인데다, 뭣보다도 이것이 레오의 고유능력과 같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을 테니.
나는 멈추지 않고 곧장 노랭이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검지에다 잔뜩 번개를 밀어 넣은 뒤, 녀석들의 이마를 차례로 꾹꾹 눌러주었다.
두 녀석은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쓰러졌고, 남은 한 녀석은 자기가 먼저 고개를 들이밀며 나의 세례를 자청했다.
“그래, 편히 쉬거라.”
파지직-.
이어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인간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흐음······.”
녀석들은 뒷걸음질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괴, 괴물······.”
“어, 어떻게 하죠?”
“도, 도망이라도 쳐야······.”
겁에 질린 녀석들이 내 무심한 표정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즈음 내 머릿속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독자들의 반응.
아마도 지금 이 시간부로 독자 커뮤니티가 내 능력의 대한 의문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걱턱이 전부터 모든 이들의 능력을 돌려쓰고 있다면서.
어쩌면 내가 이스트랜드로 넘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묻혔던 지난날의 의문들 또한 덩달아 깨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어떻게 되려나······.’
물론 이는 나로서도 꽤나 조심스레 접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목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로 인해 파생될 결과는 그리 좋지만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와는 달리, 현재 내 능력은 전혀 오픈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남의 능력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 정도야 대충 짐작들 하고 있겠지만, 상세한 조건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
이는 자칫 잘못하다간, 칼 자이드에게 들이닥쳤던 ‘파워밸런스 조정 건의’와 같은 독자들의 칼이 내게로 향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와 같은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나는 내 고유능력의 흉내 조건에 대해 공개해야 했다. 이것이 그리 만능이 아니고, 꽤나 전제조건이 까다로운 능력이라는 것을.
또 그에 더해, 그 조건들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그간의 행위들을 성립시켜줄 ‘또 다른 개연성’을 함께 동봉해야 했다.
나는 이를 ‘도깨비’에게서 끌어올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작가로서도 쏟아지는 독자들의 관심을 달래기 위해선 내게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양날의 검과 같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물론, 자신이 있어 휘두르는 것이지만.
‘그건 그렇고······.’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어느새 전장은 고요해져 있었다.
그즈음엔 세 명의 얼간이들은 어디가고, 네로만이 우두커니 남은 상태였다.
녀석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고양이라 그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일단 제압부터 해야 하나?’
물론 저 녀석은 꽤 강하긴 할 것이다. 전투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일단 외형 자체가 강하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문제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둘, 셋 정도가 더 있다면 또 모를까······.
하여, 내가 막 움직이려 할 때였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
난데없이 주위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주위가 웬 노란 불빛들로 가득 찼다.
눈이었다. 짐승들의 눈.
“······호오.”
나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짐승들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갈색의 털에 쫙 째진 노란 눈. 스라소니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에, 그보다 두 배 가량은 더 큰 덩치. 저게 진짜 산쾡이들인 모양이었다. 그즈음 풍겨오는 냄새가 이제껏 맡아온 그것과 완전히 동일했던 것이다.
이 녀석들이 갑작스레 출몰한 이유에 대해선 짐작이 갔다.
지배.
이는 격이 높은 신수들의 특기 중 하나로, 자신보다 아래 격의 짐승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딱히 고유능력은 아니고 사람으로 따지자면 ‘히든 특성’에 가까운 것인데, 이렇게까지 대규모 무리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는지는 몰랐다.
더군다나 산쾡이들은 야생 짐승들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공격대와 예비대, 퇴로 차단대가 각기 따로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이는 ‘지배’를 통해 이 녀석들을 꽤나 디테일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네로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너 이 자식, 굉장한 고양이구나.
다만,
“······그렇다한들 얘네로 뭘 할 수 있다고.”
고작해야 야생짐승들일 뿐이다.
이 산쾡이들이 아니라, 아까 그 노랭이들이 이만큼 몰려오더라도 내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홱-!
“······.”
순간 무엇인가가 내 뺨을 훑고 지나갔다.
네로였다.
녀석은 그러곤 곧장 산쾡이들 사이로 숨었는데, 작고 까맸던 탓에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얕게 생채기가 난 뺨을 슬쩍 매만졌다.
“빨라서 약간 놀라긴 했는데······ 근데 고작 그게 전략이냐?”
뭔가 치고 빠지고, 숨고······ 뭐 이것저것 해보려는 모양이긴 한데, 한참 잘못 생각했다.
나는 단숨에 전력(電力)을 끌어올린 뒤, 전 방위로 널리 내뿜었다.
곧이어,
파지지지지지직-.
파지지지지지직-.
감전된 산쾡이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풀썩-.
풀썩-.
풀썩-.
⁝
녀석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이 많은 산쾡이들을 모조리 태워 죽이려 했으면 꽤나 힘을 써야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소 빈틈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 아마 그게 네로 녀석이 노린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단순히 기절만 시키는 정도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미안한데, 너네 그 노랭이들 수준의 번개가 아니라고.”
“······.”
네로는 어느새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번개의 힘을 느끼곤 놀라 잽싸게 피한 모양이었다.
“거기 계속 있을 거 아니지? 더 보여줄 거 없어?”
그러자,
폴짝-.
네로가 아래로 뛰어내린 뒤, 다시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도도한 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주걱턱······ 네 놈, 강하군.”
“왜 다들 그걸 늦게 알지? 희한하네······ 내가 그렇게 약하게 생겼나?”
“전력으로 부딪쳐주마.”
곧이어,
“오······ 설마?”
네로의 몸이 갑작스레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흥분했다. 이걸 독자들 앞에서 보여줄 수가 되다니.
네로는 지금 진체(眞體)로 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현 시점에서 3단계 진화가 된 신수가 있을 리 없으니, 아마도 2단계 모습이지 않을까.
이윽고,
팟-.
한순간 발산한 빛이 점차 흩어지며, 그 사이로 새로워진 모습의 네로가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대박이었다.
퓨마? 재규어? 정확한 종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검정의 고양잇과 동물 한 마리가 떡 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멋있다 너.”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크르렁-.
살기를 실은 으르렁거림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즈음엔 나도 약간 긴장이 되었다.
솔직히 조금 전 고양이 상태에서의 공격 또한 제법 빠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체로 변했을 때의 공격력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빠르고 강할 테니.
하지만 물론,
“와봐, 야옹아. 놀아줄게. 우쭈쭈.”
그렇다고 도발은 참을 수 없는 법.
“······찢어 발겨주마.”
순간 녀석의 발톱이 쇳덩이마냥 검게 변했다. 고유능력이 ‘강철화(化)’인 모양이었다.
이어,
크아앙!
녀석이 나를 덮쳤다.
*
얼마나 지났을까.
네로와의 놀이(?)는 즐거웠다.
생각보다 스릴도 있었고, 발톱에 긁히면 이게 아무리 장난이라도 좀 화가 나긴 하는구나······ 하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발톱을 여덟 개째 부러뜨렸을 즈음, 나는 슬슬 전투의 종막을 준비했다.
사실 끝내려면 이전에도 충분히 끝낼 수 있었지만, 독자들을 위해서 잠시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했던 것뿐이다. 다만 더 하기엔 혼자 남겨둔 왕녀 쪽이 약간 염려가 되어, 그만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는 서서히 번개를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전기저항이 만만찮은 녀석이라 전력에 가깝게 힘을 끌어 모아야 했다. 이번에도 쓰러지지 않고 설쳐댄다면, 그때는 꽤나 귀찮아질 소지가 다분했으니.
“후······.”
이제 끝낼 시간이었다.
내 두 손으로 응축된 번개가 스산하게 날뛰었다.
파지직-.
그즈음엔 네로 또한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많이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도 녀석은 의연히 발톱을 갈았다. 확실히 꽤 터프한 녀석이었다.
“끝내자, 야옹아. 재밌었다.”
그러고 막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그만. 거기까지!”
갑작스레 느닷없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아한 심정으로 네로를 바라봤다.
황당했다. 그 내용도 황당했고, 상황도 황당했다.
분명 말을 한 건 네로였다. 헌데, 이제까지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기야, 여기.”
자세히 보니, 네로가 말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음성은 네로가 목에 차고 있던 붉은 루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됐다고, 그만 하라고. 그러다 우리 고양이 죽겠어. 원하는 게 뭐야?”
“······.”
어이가 없었다.
“아니, 지금 무슨······.”
“됐고, 네로! 지금 너 있는 데가 어디지?”
그러자,
“······이스트랜드.”
네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아, 거기야? 잠깐, 이스트랜드라······ 아까 흰 새라고 했었지? 음······ 아아, 백응. 그 녀석이구나.”
이어 루비는 저 혼자 묻고, 저 혼자 답했다.
“그 흰 매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 녀석 안 건드릴 테니까, 고양이는 그냥 놔둬. 허튼 짓 하지 말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그보다 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허튼 짓? 그럼 자기네가 이제껏 하던 짓은 뭐고.
내가 그 뻔뻔함에 말문을 잃었을 무렵,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녀석이다.”
네로가 나직이 한 마디 했다.
녀석은 루비 속 음성과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우리의 근거지 또한 알고 있을 가능성이······.”
“그래서 뭐.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 같으니라고. 네가 저 녀석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 하냐?”
“······.”
“어이, 거기. 듣고 있지? 어때? 서로 갈 길 가는 건. 이때까지 일은 모두 잊고.”
흐음.
어차피 네로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저렇게 귀엽고 멋있는 고양이를 어떻게 죽일까. 후환을 남겨뒀다고 답답해하는 독자가 분명 있을 수도 있지만, 죽였을 때의 후폭풍이 훨씬 더 클 게 분명했다. 이미 몇 명은 벌써부터 녀석의 팬이 되었을 테니까.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야 어렵지 않긴 한데······ 그러려면 일단 그 원인부터 끊어내야지.”
그러고 나는 조심스레 구구를 주머니에서 빼들었다. 녀석은 아직까지도 몸을 떨고 있었다.
“야, 야! 나, 나는 왜······.”
“가만있어 봐.”
나는 구구 녀석의 발찌를 가리켰다.
“이것만 없애주면, 그냥 조용히 사라져주지.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없던 걸로 하고.”
그러자,
“뭔데, 자세히 봐봐.”
“발찌야.”
“발? 흠, 발이면······.”
“굴종의 굴레.”
“아아, 그렇지.”
루비와 네로가 뭔가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뭐, 어렵지 않지.”
루비 속 음성이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 당장······.”
“사우스랜드로 와.”
“······뭐?”
“여기로 오면 끊어줄 수 있어. 그게 아니면 안 되고.”
황당한 말이었다.
“그게 뭔 소리야.”
“어쩔 수 없어. 금제란 게 그리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허······.”
별 수 없었다.
“그럼 나도 저 고양이를 그냥 보내줄 순 없지.”
“어디 해봐.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다, 주걱턱.”
이에 네로 또한 다시금 발톱을 세웠다.
그러고 다시 분위기가 심각해져갈 무렵,
“잠깐, 잠깐. 사실 하나 방법이 있긴 한데······.”
루비에서 슬쩍 한 마디가 더 흘러나왔다.
“······본론이 있었으면 빨리 얘기하라고.”
“근데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아서.”
“뭔데?”
“직접 끊는 거야.”
“직접?”
“그게 굴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야. 스스로 머리를 숙였던 녀석은, 다시금 제 스스로 깨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 복종의 굴레를.”
“······그래서 뭐 어쩌자고.”
“방법 자체는 간단해.”
그리고 이어진 말은, 뭐랄까······ 무척이나 소년만화스러운 것이었다.
“스스로 맞서야 돼. 본인의 머리를 수그리게 만든 그 굴레에게. 그리고 이겨내야지.”
“그게 무슨······.”
“모르겠어? 그 녀석이 지금 네로와 맞서면 된다고. 다만, 혼자 힘으로.”
당혹스러웠다.
고작해야 작달만한 비둘기에 불과한 녀석이 저 고유능력까지 사용하는 고양이에게 뭔 수로 맞선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난! 괘, 괜찮아······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야, 너······.”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구구에게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어려울 거라고 했잖아. 걔는 안 돼. 굴레에 완전히 속박된 상태니까. 지금 기절하지 않고 있는 것만도 대단한 걸?”
“······.”
녀석의 말대로였다. 구구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녀석은 네로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목에 걸린 루비를.
하지만,
“······별 것도 아닌 걸.”
나는 이대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건 일종의 ‘캐릭터 각성’과 같았다.
그리고 바야르 칸에게 자신했듯이, 나는 캐릭터들을 각성시키는 법에 대하여 이 세계의 누구보다 빠삭했다.
실제로 이 녀석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도움만 첨가되면.
혼자 힘으로 맞서야 한다곤 했지만 뭐······ 이 정도야 괜찮겠지.
이어,
뚜벅뚜벅.
나는 앞으로 두어 발자국 나간 다음, 가슴팍을 내밀었다. 그러곤 오른손으로 내 심장을 가리켰다.
“야, 고양이! 여기를 노려. 저항하지 않을 테니까. 좀 전에 못했던 마지막 공격 있지? 그거 여기다 날리라고.”
이어 구구를 쳐다보자, 놀란 녀석이 입을 쩍 벌렸다.
“알지? 나 안 피할 거야. 네가 안 막아주면······ 나 그대로 죽는 거야.”
간단하다. 소년만화스런 문제엔 소년만화스러운 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