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69
69화 봉우리 점령전(3)
***
1. 거짓말을 해도 뭐 저따위 걸 하냐는 말이 나올 정도의 황당한 자기소개.
2. 메로구이 녀석을 닮은 얼굴.
3. 정적 후 이어진 주변의 경악어린 반응들.
4. 단기간 내에 모았다고 하기엔 영 수상쩍은, 엄청난 수의 하위 소속들.
5. 마지막으로 왕녀의 쩍 벌어진 입까지.
이를 종합해 보자면,
“허······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완전히 계 탔다는 뜻이었다.
나는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참기가 힘들었다.
칸이란다. 두골 제국의 현 황제.
간단히 말해, 이 나라에서 가장 만나기 힘든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물론, 나는 이 황제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독자들 또한 이 인간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게 없다는 뜻과 같다.
본디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은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로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작가야 그 캐릭터의 역할과 배경, 필요성 등을 다 알고 있지만, 독자들에겐 그저 새로 학습하고 받아들여야할 수많은 캐릭터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무런 조짐도 없는 상태에서의 등장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다만, 예외의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첫 등장부터 독자들의 흥미를 잡아끌 수 있는 3요소 ‘외모’, ‘능력’, ‘신분’ 중 하나라도 최상급일 경우.
이때부터는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피로감이고 뭐고 간에, 흥미가 동한 독자들이 오히려 갈구하듯 눈을 빛낼 테니까.
그래, 바로 지금과 같이 말이다.
“두골제국의 황제라······ 설마하니 대우를 받고자 밝히신 겁니까? 전장에서?”
다만, 나는 나의 놀람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속내와는 별개로, 어쨌거나 내 캐릭터는 유지해야 했으니까.
“본론이나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만.”
칸은 그런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호오, 역시 꽤나 강단이 있는 편이네? 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어,
“어쨌거나 잘 됐네. 괜히 쫄거나 했다면 재미가 떨어졌을 테니. 안 그래?”
본인의 옆에 있던 웬 멀대같은 녀석을 보며 키득거렸다.
멀대는 다만 대답 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호위인가?’
제법 눈길을 끄는 녀석이었다. 단순히 키가 큰 것 때문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외려 타오르듯 빛나는 강렬한 안광 때문이었다. 그냥 딱 봐도 ‘나 좀 칩니다’ 하는 분위기가 난다고나 할까.
물론, 실제로 어떤지는 직접 봐야 알겠지만.
“아참! 본론에 대해 얘기해야지.”
칸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치더니,
“혹시 원하는 종목 같은 게 있나?”
은근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어째 표정만 봐선, 내가 말하는 것만 쏙 빼놓고 할 느낌이었다.
“뭐든 괜찮습니다.”
“에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후회할 일 없습니다. 뭘 하든 질 리가 없으니까.”
순간,
“오······.”
“오우······.”
지켜보던 이들 몇몇이 짤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약간 과했나?
그래도,
“재밌네. 뭐든 괜찮다? 좋아, 내가 원하는 걸로 정하지 뭐.”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칸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한층 짙어졌던 것이다.
이어, 그가 제시한 대결종목은 다음과 같았다.
5vs5 박투.
양 측 진영에서 다섯 명을 뽑고, 한 명씩 나와 근접박투를 벌이는 것.
승자는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가는 방식.
한 진영의 다섯 명이 모두 패하게 되면, 그 즉시 대결은 종료.
진 쪽은 깔끔하게 산을 내려가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합리적이기도 하고 깔끔하기도 했다. 전력손실을 최대한 방지하는 선에서, 서로의 힘을 적당히 겨룰 수 있는 종목이었으니.
또한 이는 내게도 아주 바람직한 경기방식이었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데다, 혼자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 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
독자들에게 대규모 격전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약간 아쉽긴 하지만······ 그야 뭐 차후 최종관문에서 실컷 보여주면 되는 것이고.
“대결은 내일 아침 해가 뜰 무렵에 시작하는 걸로 하고, 장소는 저기 아래 괜찮은 공터가 있던데.”
“예예, 거기로 하죠.”
“인원수가 부족해 보여 다섯으로 맞춰주긴 했는데······ 그 정도는 괜찮겠지? 오늘 하루 바짝 뛰어 다니면 다섯 명 정도야 소속으로 들일 수 있지 않겠어? 뭐, 쉽지는 않겠지만.”
“아아, 예 뭐.”
“······.”
내가 건성건성 대답하자, 칸은 약간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뒤끝이 좀 있는 편이거든.”
“아, 그렇습니까? 뒤끝은 주로 어떤 식으로 부리죠?”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혹, 그 방식이 화끈한 거라면 실제로 진행해볼 의향도 있었고.
다만,
“······궁금하면 직접 겪어보든가. 어쨌거나 내일 보자고. 내일 아침 해 뜰 무렵, 저 아래의 빈 공터야. 늦지 말라고.”
아쉽게도 칸은 이를 알려주지 않았다.
곧이어,
“가지.”
“예.”
칸과 그 옆의 멀대가 내게서 돌아섰다.
희한했던 건 칸이 곧바로 등을 돌렸던 것에 비해, 옆의 멀대가 잠시간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머뭇거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눈 가득 의미심장한 빛을 담고서.
그건 마치 전장을 앞둔 전사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여,
‘그렇게 몸이 근질근질 거리면 내일 나와 보든가.’
나 또한 녀석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그렇게 내일의 결전을 약속한 채, 두 남자가 봉우리에서 내려갔다.
*
다음 날, 새벽. 구름 너머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다녀 와.”
“그래.”
“이기고.”
“쉽지 뭐.”
“그리고······ 조심하고.”
왕녀의 얼굴은 희한하리만치 굳어 있었다.
설마하니, 정말 내가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조심은 그쪽이나 하라고. 내가 곁에 없는 상황이야. 당신을 노리는 놈들이 활동하기엔 최적의 시기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거라고.”
“······아.”
황당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라니.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대머리 덩치 녀석은 신뢰하지 말라고. 힘만 센 얼간이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오지.”
그러고 내가 돌아서 내려가려 할 때였다.
“······저, 저기!”
왕녀가 나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뭐, 왜?”
“어쩌면 어제 그 사람······ 아, 아냐.”
“뭐?”
“아냐, 그냥 가. 어차피 말해 줘도 모를 테니.”
“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그냥.”
곧이어,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 하나 나올 거야. 내 생각엔 어제 그······ 키가 커다란 사람일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아. 그도 변장을 한 상태일 테니까.”
“어제 그 멀대? 강하다고? 뭐하는 사람인데.”
“몽이라는 자야. 제국의 검이라고도 불리는 두골제국의 대장군. 그는······ 강해. 혼자서 수백의 적과도 맞서 싸운 전적이 있고, 또······ 아냐, 아니다.”
왕녀는 그러곤 심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는데, 뭐······ 웃기지도 않았다.
미안한데,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녀석들의 리스트를 시기별로 꿰고 있는 사람이라고.
뭐, 그렇다고 콧방귀를 뀔 순 없으니.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린 뒤,
“그래, 유념하도록 하지.”
곧장 결전의 장소를 향해 내달렸다.
공터엔 이미 수많은 인원들로 북적거렸다.
공터라곤 하나, 사실 그리 빈 공간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다 몰려왔는지, 웬 녀석들이 죄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세 번째 봉우리에 있던 녀석들까지 죄다 몰려온 모양이었다.
그즈음,
“주, 주걱턱이다!”
“주걱턱이 왔어!”
“녀석은 혼자야!”
“자신 있다는 건가!?”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마치 시합무대에 입장 중인 격투기 선수가 된 느낌이었다.
나름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 그래. 알았다고.’
그러고 막 공터의 중앙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빨간 깃발을 든 칸 측 무리에서 웬 녀석이 슥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응?”
“설마 혼자 오신 겁니까?”
“어어. 근데 누구?”
그러나 녀석은 내 물음에 대답은 않고 갑작스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 황당하네요.”
그러곤,
“여기 주걱턱 씨가 혼자 오셨답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나 됩니까? 대체 무슨 자신감이죠!?”
대뜸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이어,
“우우!”
“건방진 녀석!”
“끝장이 날 거다!”
어디선가 준비된 듯한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당황스러웠다.
“뭐야 갑자기. 아니, 야. 너 뭐냐고.”
“아차,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그러고 녀석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는데, 자기의 이름부터 별명, 특기, 거기다 별 궁금하지도 않는 본인의 무용담 따위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
이 녀석은 대체 뭔가 싶었다.
“그럼 네가 첫 번째 선수냐?”
그러자 녀석이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 딱히 그건 아닙니다만.”
“뭐? 그것도 아니라고?”
“예. 오늘 시합을 뛸 이들은 지금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래? 근데 왜 혼자 나와서 입을 털지?”
내 물음에 녀석이 난처한 듯 웃음을 흘렸다.
“하하······ 듣던 대로 꽤나 공격적인 분이시군요. 일단 저기 중앙으로 서시지요.”
그러고 녀석이 나를 안내하려 했으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희한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칸과 그 멀대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어느새 날은 거의 다 밝은 상태였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났다는 뜻이었다.
“일단 중앙에 서시면, 먼저 사람들에게 소개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뭘까. 왜 시간을 끄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걸까.
“됐고,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예? 아, 지금 저기서 대기 중이니 소개 후에 제가 불러 오도록······.”
그때였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뒤끝이 있다며 약속에 제때 나올 것을 신신당부하던 칸.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훑던 그 멀대같은 녀석.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굳이 남의 구역에서 하루를 머문 칸의 수많은 부하들.
“······설마.”
그 순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생각이 든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분명 기벽이 있고, 괴짜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들었다.
아니,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려 황제씩이나 되는 인물이 정체까지 숨겨가면서 이곳에 숨어든 게 아닌가. 그저 ‘재미’만을 위해서.
그런데 그런 인물이 이토록 정정당당한 승부를 제안한다?
심지어 그것으로 본인의 유희가 끝날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하······ 씨. 내가 봉우리 꼭대기에서 이렇게나 많이 내려왔었나?”
나는 좀 더 속도를 냈다.
물론, 이는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었다. ‘이상하다’는 느낌을 제외하곤 딱히 근거도 없었다. 그저 감에 불과했다.
다만,
“하······ 하하.”
어떨 땐 감이 그 어떤 논리보다 정확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내 눈에 언뜻 들어온 광경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진짜’는 봉우리에 있었다.
칸도, 멀대같은 녀석도, 또 그의 수많은 부하들 중 일부도 다 거기 있었다. 왕녀와 함께.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당하다니······.’
방심했다. 설마하니 황제라는 작자가 이리도 쉽게 거짓을 말할 줄이야.
나는 입술을 질끈 물곤, 서둘러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봉우리 전경이 시야에 잡히는 위치까지 올랐을 무렵,
“저게······ 뭐하는 거지 지금?”
아주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봉우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왕녀의 깃발을 뽑으려 하고 있지도 않았고,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외려 놀이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줄다리기’였다.
갑자기 줄다리기?
“하······ 참나. 가지가지 하네.”
내가 이를 보며 분노를 참기 힘들었던 이유는, 물론 나만 제쳐두고 다들 재미난 줄다리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굉장히 공정치 못한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엔 언뜻 봐도 근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저 아래 산비탈까지 길게 이어진 줄을 붙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엔 여자 혼자였다.
게다가 여자의 표정이 필사적인 것으로 볼 때, 결코 져선 안 되는 경기인 듯했다. 아마 몹시도 중요한 게 걸린 판이 아닐까. 가령, 봉우리 점령권이라든지.
“······.”
그럼에도 내가 당장 난입해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왕녀가 아직은 버틸 만한 듯 보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었지만, 역시나 저 여자는 괴물이다. 무려 백여 명의 힘을 견뎌내고 있다니.
물론 아직 칸이나 옆의 멀대가 붙어 힘을 쓰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은 옆에서 여유로이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힘인 건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다.’
나는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무작정 올라가는 것? 하책이었다.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의 룰은 왕녀 혼자만이 참여하도록 되어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대머리 녀석이 왕녀 뒤에서 손 놓고 응원만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아마 내가 올라간다 한들, 같은 룰을 빌미로 나를 막으려 들 게 분명했다.
물론 깽판을 칠 순 있었다. 어차피 니들도 나를 속인 것 아니었냐고. 다 무효라고.
하지만 당장 두골제국의 황제에게 대놓고 맞서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왕녀에게도, 또 내게도.
위기였다.
나는 고심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눈으로 상황을 확인했다.
슬슬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왕녀는 곧잘 버티고 있었다.
‘바야르 칸이······ 전면엔 나선 건 아닌 듯하고.’
표정이나 얌전히 힘만 쓰고 있는 걸로 봐선 여전히 왕녀였다.
그가 왕녀를 대신하지 않은 까닭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홀로 위기상황에 처해야만 각성할 수 있다’는 내 조언을 따른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는 적절한 판단이었다. 정말로 왕녀는 지금 저 상황에서 각성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물론, 그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행운을 바라기엔 상황이 다소 긴박한 것도 사실이지만.
“후······.”
분명 위기였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기회기도 했다.
위기를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넘어설 때, 독자들은 열광하는 법이니까.
내가 직접 가서 돕는 건 불가하다. 깽판은 하책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왕녀가 이기게 해야 했다. 만약 왕녀가 저기서 지고 깃발이 뽑히게 되면, 이제까지의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그것밖엔 없나.”
그즈음, 나는 지난 날 바야르 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근데 정말 힘의 반의반도 못 낸 거 맞습니까?”
“아, 그렇다니까! 사료에 적힌 내 기록만 읽어보더라도······.”
“에이, 그런 걸 누가 믿는다고.”
“허, 억울해 돌아가시겠군······ 물론 이미 죽었지만서도! 크하하하!”
“됐고, 그럼 솔직히 말씀해보시죠. 왕녀의 힘은요? 그녀의 힘을 함께 쓴 거 아닙니까?”
“으, 으응?”
“아니, 왕녀의 몸에 빙의를 한 건데, 그 힘을 못 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바야르 칸은 주저주저하다, 이내 마지못해 이를 인정했다.
“끙······ 맞긴 한데, 어차피 이 몸의 힘이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걸 왜 자꾸 따지려 드는 게냐!”
“2대 1이라고요, 2대 1. 영감님은 2대 1로도 저한테 진 거라고요. 그러니까 자꾸 다시 붙자니, 억울하다니 하지 마시라고.”
“허······ 어이가 없구나. 만약 정말로 2대 1을 하려고 했다면 빙의가 아니라, 그냥 이 녀석에게 내 힘을 불어넣는 식으로 갔을 거다. 그게 그나마 당장엔 더 효율이 좋으니까. 물론, 그렇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오, 그렇게도 됩니까? 그냥 힘을 준다고요?”
“뭐, 영혼을 더한다고 표현하긴 하는데······ 그냥 어느 정도의 힘을 넘겨줄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그건 영 어설프기도 하고 한계가 명확한 것이라······.”
놀랍게도, 굳이 인격을 교체하지 않고서도 힘을 실어주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한계라면······ 그것 또한 왕녀의 신체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줄 수 있는 겁니까?”
“아니, 그건 뭐랄까······ 반대다.”
“반대요?”
“내 쪽의 문제라고. 내가 줄 수 있는 힘이 얼마 되지 않아. 아니지, 나는 다 줬지만 그 정도 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인지?”
“내가 지금처럼 이 녀석의 몸을 대신하는 건, 말 그대로 내 본신이 강령하는 개념이야. 부족하게나마 생전의 내 몸을 재현하는 식이지. 근데 그건······ 뭐랄까, 그냥 내 영혼의 힘을 더해 이 녀석 자체를 강화시키는 개념이다. 단순히 내 생전의 근력을 넘겨주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이 가진 모두를 어······ 에이, 표현하기가 힘들군. 사실 잘 몰라. 애초에 해본 적도 별로 없는 짓이라서.”
“호오······.”
그즈음 나는 꽤나 놀랐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는 캐릭터의 ‘격’ 자체를 상승시키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으니.
짐작하건대, 저 영혼을 더한다는 행위는 신체능력 뿐 아니라, 고유능력에 여러 히든 특성들까지 모두 강화시키는 듯싶었다. 마치 칼 자이드의 그것과 같이, 성장의 범위가 능력 전반에 걸쳐 있다고나 할까.
실로 엄청난 능력이었다. 당사자는 잘 모르고 있는 듯 보였지만.
게다가 그가 이를 어설프다고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도 쉬이 짐작이 됐다.
간단하다. 바야르 칸은 그가 생전에 극도로 강력한 신체를 보유했던 것과는 반대로, 사실 그 영혼 상태의 ‘격’이 그리 높다고 볼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만화의 파워밸런스 조정 방식이기도 했으니.
*
예상컨대, 현재 바야르 칸은 왕녀에게 이 ‘영혼을 더하는 방식’을 통해 힘을 공급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칸과 멀대가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왕녀는 줄을 놓지 않는 게 고작이었으니.
“······시간이 없네.”
나는 그 즉시 생각을 멈췄다. 지금은 이것저것 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떠오른 걸 적극 실천해야 할 때였지.
이어,
“뭐, 해보는 수밖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허나 그 방향이 봉우리를 향해 있진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갔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은 으슥한 곳으로.
*
“그나저나 하나만 더 물어도 됩니까?”
“아니, 뭔 궁금한 게 그리 많아!”
“그냥······ 제가 이런 쪽에 관심이 좀 많아서.”
“허참, 뭔데.”
“그 고유능력······ 혹시 살아생전에도 썼었습니까?”
이는 정말로 궁금했던 물음이었다.
죽어서야 쓸 수 있는 능력이라니. 이상하지 않는가.
바야르 칸의 대답은 실로 간단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이 좋은 걸 왜 아껴 둬. 이걸로 재미 많이 봤지. 흐흐.”
역시나.
“오······ 난 또 죽은 다음에야 발동되는 줄 알았죠.”
“웬걸, 죽어서까지 발동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땐 정말이지 깜짝 놀라 죽을 뻔했다고. 물론 이미 죽은 뒤였지만서도! 크하하하!”
불사(不死).
나는 바야르 칸의 능력이 실제로 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세계엔 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꽤 여럿 존재하고 있었으니.
“아참,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번엔 또 뭐!”
“그······ 그 영감님 고유능력은 어떻게 씁니까? 뭐, 작동원리 같은 게 따로 있나요?”
“작동원리? 참나, 그런 건 또 왜 묻는 게냐?”
“그냥 뭐······ 궁금해서요.”
“헹, 그걸 가르쳐주면 뭐, 네가 쓸 수는 있고? 내 고유능력을?”
그의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잘하면 흉내 정돈 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빌어먹을.”
줄을 잡고 있던 손의 감각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쥐가 나는 아릿함도, 피부가 벗겨질 때의 통증도 없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은 멍했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안 되겠다, 내가 대신하마.
‘그런들 뭐가 달라질 거라고.’
테르미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바야르 칸이 몸을 차지한다하더라도, 어차피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후.”
멀리도 왔지만, 그래서 성공을 생각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끝이었다.
이제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되든, 중간에 처형을 당하든, 다시금 지난한 도피 생활을 시작하든······ 자유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테르미스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여기까진가.
바로 그때였다.
-어이.
‘응?’
-내 목소리 들리나?
어디선가 주걱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 뭐냐 네놈! 이, 이게 무슨?
-노인네 수고하셨고, 그리고, 어······ 왕녀.
이어,
-잘 버텼다.
이제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대한 힘이 몸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