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최종관문(2)
***
‘분명 번개와 관련된 능력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 같은데······.’
몽은 정면의 반투명한 거대 주걱턱 유령을 보며 눈을 빛냈다.
실로 신묘한 일이었다.
가슴에 닿을락 말락할 정도의 키에 불과했던 두 유령이,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덩치를 가진 유령 하나로 합쳐지는 광경이라니.
물론,
“네놈! 머리는 내 차지다!”
“이 몸의 주인은 바로 나다! 당장 꺼져!”
“이 멍청한 놈이 어디서 주인 행세를!”
그리 완전한 것 같진 않았지만.
적지 않은 능력자들을 상대해온 자신이었으나, 저와 같은 능력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본인과 똑같이 생긴 유령들을 대거 만들어내는 것.
‘아니지, 잠깐.’
그러고 보니 최근에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었다.
바로 왕녀와 줄다리기를 했던 날, 그녀의 뒤로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던 그 형상.
물론 색과 투명도도 다르고, 주걱턱이 아닌 바야르 칸의 외형을 하고 있다는 점도 달랐지만, 그것이 유령이라는 점에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제야 뭔가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몽은 ‘작달만한 진짜 주걱턱’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줄다리기에서 왕녀에게 힘을 준 것도 네 녀석이었나.”
그러자,
“뭐? 어······ 아, 아닌데?”
역시나 녀석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본래의 왕녀 또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우리가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거든. 더군다나 내가 들어선 직후엔 거의 체념어린 눈빛을 하기도 했었고. 무언가 희끗한 게 그녀에게로 들어간 이후 갑작스레 힘이 증가한 걸 보면, 외부의 힘이 이식됐다고 보는 게 맞겠지.”
주걱턱이 이에 대답하진 않았으나, 몽은 자신의 추론을 확신했다. 녀석이 실실 눈을 피하며 휘파람을 휘휘 부는 게, 딱 봐도 부정행위를 들킨 응시자의 그것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네놈······ 바야르 칸과는 무슨 관계지? 만약 어떠한 연관도 없을 시, 그의 모습을 도용한 죄는 크다. 이는 제국을 모욕한 것과 같으니.”
“······엉? 바야르 칸?”
“그래, 왕녀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당시 네가 그의 모습을 형상화하지 않았더냐.”
그러자,
“뭐야, 아······ 난 또! 하······ 그거 나 아냐.”
갑작스레 녀석의 태도가 달라졌다.
“뭐?”
“그건 유령이 아니라 그······ 아니지, 그것도 유령이 맞긴 한데 음······ 어쨌거나 지금 이 녀석들이랑은 또 다른 거거든?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됐고! 줄다리기 때 나타났다는 유령은 나랑 전혀 관계가 없어. 그건 오롯이 왕녀의 힘이라고. 그리고 나는 바야르진 뭔지 하는 그 늙은이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잘 모르나 본데, 나는 웨스트랜드 출신이야. 여기서 암만 유명하다고 해도 다른 대륙에서까지 알아주진 않는다고.”
“······거짓말이 서툰 녀석이군.”
자신은 바야르 칸의 유령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도, 그가 유명하다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이는 녀석 스스로 자백한 것과 같았다. 본인이 그 유령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이상 녀석을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
몽은 그저 마음이 다소 가벼워졌다는 것에 만족했다.
실은 그제까지만 해도 약간의 조급함을 품고 있던 차였다. 왕녀가 줄다리기 때와 같은 괴력을 발휘한다면, 일곱 배에 달하는 수적 우세라 할지라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하여, 일부러 친위대만 끌고 서둘러 주걱턱부터 잡으러 왔던 것이다. 녀석을 빨리 끝장낸 다음, 본대에 붙어 왕녀를 함께 처리하기 위해.
그런데 이제 왕녀의 힘마저 저 주걱턱이 제공한 거란 걸 깨닫게 되었으니, 한결 간단해진 것이었다.
왕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 저 녀석만 잡으면 된다.
이어,
‘그리고 저 진짜를 잡으려면, 일단은 이 녀석부터 처리해야겠지.’
몽은 다시금 눈앞의 거대 주걱턱 유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녀석은 정돈(?)을 마쳤는지, 혼잣말의 반복을 멈춘 상태였다. 다만, 둘이었을 적에 비해 지성이 약간 떨어진 듯했다.
“못생긴······ 거인. 가만두지······ 않겠다.”
“너를 말하는 것이냐. 주걱턱 유령아.”
“나는······ 못생기지 않······ 죽인다, 거인!”
그즈음엔 친위대 앞으로도 유령이 한 마리씩 다 붙어 있었다. 친위대 하나당 유령 한 마리. 주걱턱이 일부러 숫자를 맞춰 생성해낸 모양이었다.
‘건방진······ 친위대를 상대로 고작 일대일로 맞추다니.’
황제가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산민으로 위장한 채 이번 전사의 길에 응시한 이들 중엔 자신의 직속 전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특히나 친위대는 그 중에서도 최고들로만 구성된 이들이었다.
몽은 간단히 말했다.
“전략전술 따윈 크게 생각할 것 없다. 다들 각자 앞에 붙은 것들을 편한 방식대로 알아서 처리하도록.”
“옙!”
“옙!”
이어, 친위대와 유령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럼 우리도 슬슬 해볼까?”
몽은 눈앞의 거대 유령을 지그시 노려봤다.
유령이 두려운 건 실체가 없는 공포로서 존재할 때의 일이다.
이렇듯 훤히 드러난 대낮에, 저러고 모습까지 다 드러낸 녀석은 위험의 소지가 없다.
걸을 때 바위가 채이고,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것으로 보아 물리력이 있는 것 같긴 했으나, 그렇다고 딱히 경계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야 그저 위압용으로 만드는 풍선과 같은 것이니.
하여,
“단숨에 찢어 발겨주마.”
몽은 그리도 쉽게 생각한 채, 별다른 경계도 없이 유령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이어,
퍽-.
기절했다.
······.
몽은 번쩍 눈을 떴다.
‘뭐지? 뭐였지?’
놀라 고개를 드니, 주걱턱 유령이 두 팔을 양쪽으로 들어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한 채, 자신을 보며 히죽대고 있었다.
“에게게······ 멍청한······ 약골 거인!”
당황스럽게도, 아주 잠시간 기절을 했었던 모양이다. 녀석의 주먹질 한 방에.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다. 적을 얕보다니.
몽은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저 유령은 약하지 않다. 아니, 약한 게 아니라 신체능력만 따지자면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거인화된 자신은 힘뿐만 아니라, 맷집도 어마어마하게 증가된 상태였다. 애당초 뼈와 근육의 밀도 자체가 달라져, 강철조차 우습게 짓이길 정도였으니.
그런 자신을 한방에 기절시킨다? 풍선이 아니라, 강철로 된 것이었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정체가 뭐냐······.’
몽은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거인······ 봐줄 테니 먼저······ 공격해.”
“사양하지 않으마.”
그러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걱턱 유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들면서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기에, 몽은 그제야 녀석의 움직임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녀석은 말하는 것과는 달리,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단순히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유롭게 반격까지 가했다.
부웅-.
몽은 자신의 머리끝을 스치고 간 유령의 주먹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엄청나게 빨랐다. 마치 매가 먹잇감을 낚아채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절대 이만한 덩치에서 나올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방금도 간신히 피한 것이었다. 그것도 반사적으로 겨우.
만약 정통으로 맞았다면, 잠시 기절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이 완전히 짓뭉개졌을지도.
몽은 혹시나 싶어 몇 번을 더 맞부딪쳤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나보다 강하다. 그것도 훨씬.’
이 유령이 절대적인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어째선지 유령이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뭘 만들어낸 거냐······ 주걱턱.’
몽은 서둘러 주위를 훑었다. 만약 작은 녀석들의 능력 또한 이 커다란 녀석에 못지않다면, 친위대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예상대로였다.
“이익!”
“고, 공격이 안 되는데요?”
“피, 피해!”
“차라리 뭉치는 게 어떻습니까!”
제대로 맞붙고 있는 녀석들이 없었다.
심지어 제대로 타격을 가하고 있는 녀석조차 없었다. 친위대의 칼은 유령들의 몸을 그대로 투과할 뿐이었다.
‘설마······.’
짐작되는 바는 한 가지였다. 고유능력.
능력자인 자신은 유령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유령을 건드릴 수조차 없다는 것.
“허, 허허······.”
절로 헛웃음이 나는 전황이었다.
유령들이 오히려 놀아주고 있는 느낌이 날 정도였으니.
잘못 생각했다. 저 주걱턱 녀석은 괴물이었다.
단순히 이 전사의 길을 통과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 정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과 왕녀의 진영이 힘을 합쳐 대적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괴물.
“······.”
몽은 그즈음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던 거대 주걱턱 유령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멈춰라.”
“······으응?”
“기다리란 말이다. 그렇게 해주겠나?”
“어······ 그래. 알았어······.”
역시나. 지금 저 유령은 자신을 때려눕힐 생각이 없다. 그저 상대를 해주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이는 아마도 저 ‘진짜 주걱턱’의 뜻일 것이다.
몽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친위대 한 명을 장난치듯 상대하고 있던 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한없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몽은 고민했다.
만만히 봤다. 자신의 불찰이고 실수였다.
이대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별 수 없나.”
이곳이 아니었다면, 현재 서 있는 곳이 이 ‘전사의 대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같은 선택을 마음먹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이대로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만 이곳에서만큼은 절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두 다리를 지탱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 옛날,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한 약속이었으니까. 녀석들의 피와 살을 먹으며 되뇐 맹세였으니까.
“후······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몽은 나직이 숨을 내쉰 뒤,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친위대 전원은 즉시 전장에서 물러나라. 피에 물든 거인이 온다.”
그러자,
“예?”
“아, 안됩니다!”
“대장군님 그것만은!”
친위대들이 상대하고 있던 유령도 내버려둔 채 달려왔다.
그러나 몽 또한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너희는 저 유령들을 처리할 능력이 없고, 나 또한 현재로선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이어, 멀뚱멀뚱 이를 지켜보고 있던 진짜 주걱턱을 향해 말했다.
“살려주겠단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뭐?”
이에,
“호오, 자신감을 보이는 건 좋은데······ 근데 그 정돈 아니지 않나?”
주걱턱이 약간은 가소로워하며 되물었다.
몽은 그의 미소에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외려, 저 정도에 그치는 것만으로도 겸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정확히는,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겐 거인이 된 이후에도 한 번의 변화가 더 남아 있다. 그게 내 진력이지.”
“호오, 그래?”
“다만, 부작용이 있다. 정신을 잃고 만다는 것. 오직 피만을 갈구하는 광란의 괴물이 되는 것이지. 그 옛날······ 이곳에서의 내가 그랬듯이.”
쓰디쓴 기억이었다.
몽은 잠시간 침묵한 채, 떠오르는 과거를 묻었다.
이어,
“아마, 네 상대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집중하기 시작했다.
‘광분’ 상태가 될 경우, 자신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저 주걱턱 녀석을 최초의 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애꿎은 피해가 생길지도 모른다.
“······모두 물러나라.”
그러고 친위대가 한발 두발 물러나는 걸 확인한 뒤, 자신의 진짜 ‘힘’을 드러내려 할 때였다.
“어······ 잠깐, 잠깐만!”
주걱턱이 급하게 소리쳤다.
“그럼 그거 조금만 이따가 하면 안 될까?”
“······무슨 소리냐.”
“아껴뒀다가 메인 이벤트에다 쓰라고.”
“······뭐?”
그러나 제대로 묻기도 전에,
“아, 아니! 저기 봐! 왕녀가 위험하잖아!?”
녀석이 난데없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곤 왕녀의 진영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방방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물론, 그즈음엔 본대와 왕녀 쪽 또한 전투가 시작된 다음이긴 했다.
당연지사, 수적 열세와 산민으로 위장해 있던 기존 전사들의 역랑 탓에 왕녀 쪽이 밀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수준은 아니었다. 애당초 전투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게 아니었으니.
헌데,
“칠백 명이서 고작해야 백 명을 상대로 몰아붙이려 하다니! 내가 나서야겠군!”
그러곤 냅다 뒤로 달리는 것이 아닌가.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녀석이 말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목적지는 왕녀의 진영이었다.
“분하면 따라오던가!”
······?
*
딱 타이밍이 괜찮았다.
적당히 거인대전을 보여줬을 즈음, 왕녀 쪽에서도 전투가 발생했으니.
물론 내 기준에서 거인대전이 썩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조금 더 비등비등하고 박 터지는 싸움이 나왔어야 했는데, 내 생각보다도 ‘킹’이 더 셌던 것이다.
‘킹’은 현재 내가 뽑을 수 있는 최고수준의 유령으로, 얀이 저만한 녀석을 뽑으려면 지금으로부터 최소 열 개의 챕터는 더 지나야 한다. 한참 뒤 미래에서나 등장할, 그것도 핵심 조연이 쓰는 능력의 진수를, 원작에선 등장조차 한 적 없는 현재의 몽이 감당하기엔 꽤나 벅찰 수밖에.
하여, 사실 한 차례 더 변한 몽과도 대적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긴 있었다. 조금 더 괜찮은 장면을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에이, 아냐. 메인은 무조건 왕녀의 몫으로.’
그냥 접기로 했다. 괜히 욕심내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제정신이 아닌 몽이 죽자고 한 놈만 쫓아온다면? 그것도 그게 만약 나라면?
어우.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즈음,
“쳐라!”
“말부터 처리해!”
“없애버려!”
전투가 한창 중인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왕녀의 진영은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애당초 숫자 차이도 어마어마한데다, 자세히 보니 개개인의 무력차이도 제법 났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별다른 전술적 공격이 없었음에도, 왕녀의 전사들은 뒤로 속속 밀리고만 있었다.
그나마,
“호오······ 저 녀석?”
가장 먼저 하위소속으로 삼았던 대머리 녀석이 제법 활약해주고는 있었다. 저 녀석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왕녀의 1진이 쓸려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
‘그나저나······ 어디 있는 거지?’
나는 약간 당황한 상태였다.
분명 그녀라면 앞장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적들에게 맞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암만 둘러봐도 왕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대체 어디로······ 엉?”
때마침 내 눈에 왕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뒤쪽에 자리한 채, 자신의 진영이 무너져가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는 내가 아는 그녀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설마······ 겁먹었나?’
에이, 그럴 리가.
전체적으로 적의 수준이 높다고는 하나, 왕녀가 겁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야르 칸의 도움을 받는다면, 능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적이었다.
물론 전투경험이 적고, 피를 본 적이 없다면 약간 얼어붙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한들, 저러고 가만히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흐음.”
일단 만나봐야 알 듯했다.
사실 겁을 먹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피를 갈구하는 몽이 얼마나 강력해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현재의 왕녀로선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왕녀가 그를 홀로 이겨내도록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녀의 고유능력을 각성시켜야 했다. 아니면 내가 또 열심히 뒤에서 작업을 해야 할 테니.
이 때 ‘두려움과’ ‘위기’는 그녀를 각성시키기 위한 훌륭한 재료가 된다.
‘벌벌 떨고 있지만 않으면 뭐······.’
이윽고,
“어······ 여기서 뭐해?”
전장을 헤치고 왕녀 앞에 도달한 나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주걱턱? 그쪽은 어찌하고?”
“그냥 뭐. 위급해 보여서 일단 달려왔지.”
“······그래?”
놀랍게도, 왕녀는 전혀 겁에 질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은 차분히, 그러나 굳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전장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때’를 기다리듯이.
“나 지금 이상해 보이지 않아?”
“······뭐가?”
“그냥 그렇게 느껴져서. 나 스스로가 왠지 이제까지와는 달라진 느낌이야. 겁이 안 나.”
“원래도 그리 겁이 많았던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 어쨌거나 마치 이 순간만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느낌이야. 위급한 상황인데, 분명 겁에 질려야 하는 상황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만 같아.”
“······그러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야, 씨······ 그런 거였어?’
그즈음 내가 바야르 칸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약간 부끄러워졌다.
위기니, 두려움이니······ 왕녀가 각성하기 위해 필요한 건 그러한 내적 작용들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그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제껏 왕녀가 각성하지 못한 이유? 간단하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왕녀는 그 캐릭터가 만들어질 당시부터, 그냥 여기 이곳에서 각성하도록 짜여 있었다는 것이다.
하기사 왕녀는 실제 원작에서까지 등장한 캐릭터인데, 이 정도 설정쯤은 있는 게 맞지.
즉, 이제껏 내가 괜히 오버했단 얘기였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각성했을 그녀인데.
때마침,
“······오고 있어.”
왕녀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천천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챙챙!
죽여!
점령자가 저기 있다!
공격해!
적군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녀의 몸이 더욱더 빛났다.
‘이건 그냥 지켜보면 되겠지?’
나는 그냥 편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기로 했다. 약간의 놀라 마지 않는 표정만 곁들인 채.
이어,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적이 그녀에게 칼을 들이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왔다.”
그녀의 몸이 폭사하듯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이 가까이 있던 적군들을 덮고, 나아가 그에 대적 중이던 아군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이 대지를 덮을 무렵,
“위, 위를 봐!”
“하늘이다! 하늘이야!”
“마, 말이다!”
하늘을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칠흑의 말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