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어디, 힘 좀 쓰나 볼까?
***
-그 녀석, 결국 제 갈 길 찾아 떠나버렸지?
“······배웅 간 줄 알았는데?”
-배웅은 무슨. 엄한 놈 얼굴을 왜 또 봐.
“······흠.”
가려다가 금방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젯밤, 작별인사랍시고 한 마디 나누긴 했으니 괜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바야르 칸의 목소리는 어째 좀 풀이 죽어 있었다.
-거 목소리 봐라. 풀죽어 가지고는.
“······.”
황당했다.
“남 말하네.”
-이것 보라지. 힘이 팍 죽어버렸잖아. 아니, 잠깐. 너 혹시······.
테르미스는 순간 흠칫했다.
이 노인네가 왠지 말도 안 되는 걸 물을까봐서.
-그 녀석에게 졌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냐? 진 채로 보내서? 아니면 깔끔하게 승부를 내지 못한 것 같아서?
“······.”
다행히 아니었다.
“뭐······ 이기진 못했지. 그건 사실이야. 내가 진 게 맞으니까.”
말해 뭐할까.
최후의 일격을 날리겠다고는 했지만 실은 허풍에 가까웠다. 그즈음엔 정말 한 톨의 힘조차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그 거대 주걱턱 유령이 손가락 하나만 튕겼어도 자신은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알면 됐다. 네가 코딱지만큼 세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피라미 수준에 불과하니까. 뭐, 그나마 계속 정진하면······ 좀 더 발전할 순 있겠지만.
바야르 칸은 그러고 핀잔을 준 뒤, 은근한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근데, 그 녀석······ 대체 왜 그렇게 급히 떠나버린 거야?
“······나도 몰라. 그냥, 그냥 불쑥 가버렸어.”
주걱턱은 처음 배 안에서 느닷없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떠나버렸다. 그게 다였다.
-그래도 어제 먼저 좀 얘기하고 있었던 거 아니냐? 나 없을 때.
“노인네가 궁금한 것도 많지.”
-늙으면 원래 그래. 말 좀 해보라고.
“······진짜 별 것 없었어.”
사실 테르미스 또한 궁금해 묻긴 했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수도로 복귀하자마자 떠나려 하는 건지.
황제가 귀찮게 할 것 같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건 그냥 핑계일 뿐이었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인간이었다면, 애당초 그렇게 불쑥 떠날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그리고 결국 듣게 된 대답은······ 정말이지 별 게 없었다.
바빠서.
그즈음,
-좀 잡아보지 그랬냐.
바야르 칸이 결국 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당장 제국 내에서 네 인기가 올라가긴 했다만,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다. 너를 이용하려는 자, 시샘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들이 곳곳에 득시글거릴 테니. 녀석더러 조금만 더 머물며 도와달라고 했다면······.
“······해봤어.”
-엉?
“잡아봤다고.”
-······뭐라더냐?
테르미스가 실제로 그를 잡기 위해 한 말은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황제가 될 수도 있다고 했거든? 만약 여기에 계속 머문다면, 그쪽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거라고.”
이 말을 할 당시는 물론이고, 테르미스는 현재까지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주걱턱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정말로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도.
실제로 부미오 칸은 이미 자신과 주걱턱을 위해 대장군 직을 비워둔 상태였다. 더군다나 ‘내 아들은 칸의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기까지 했고.
-그런데?
“웃기지도 않아.”
-뭐가.
“모험왕이 되겠다잖아.”
-······뭐, 뭐라? 모험왕?
주걱턱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갈 길이 바쁘다고. 한시바삐 모험의 탑을 올라야 한다고.
칸? 그런 건 한가로운 사람이나 하라며, 괜히 자신을 쳐다보기까지.
테르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웃긴 게, 정말 그냥 모험가였더라고. 나를 도왔던 것에도 별 이유가 없었어. 그냥 모험의뢰였을 뿐이지. 무슨 극비리에 대단한 임무수행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그의 이름 앞으로 온 모험의뢰 완료증서를 봤을 땐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뭔가 있는 척 하더니, 정말 그냥 모험가 나부랭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황당하리만치 꿈만 큰.
-모험왕이라······ 크하, 크하하핫!
바야르 칸은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을 그러고 웃어댔다.
이어,
-그렇지. 모험왕을 하겠다는 녀석이 이 코딱지만한 나라의 황제 정도론 만족할 수 없었겠지. 모험왕, 모험왕이라······.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세계의 왕을 꿈꾸는 녀석이었을 줄이야.
바야르 칸은 그즈음엔 이미 모든 아쉬움을 털어낸 듯 보였다. 그만큼 크고 웅장한 이름이었으니.
모험왕. 세계의 왕.
감히 잡을 수 없다 여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험난한 여정을 걸으려 하는 이의 발을.
-그래도 계속 끈은 연결해 두는 게 좋을 게다. 녀석은 더욱더 커질 것이니. 네게도, 또 두골 제국에게도 언젠가 커다란 도움이 되는 날이 오겠지.
“······안 그래도 구구 편으로 의뢰완료 증서와 함께 내 징표를 보내뒀어. 녀석이 그걸 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잠깐, 구구? 그 하얀 매? 녀석을 보냈다고?
“응. 그 하얀······ 비둘기.”
-허, 거참······ 그냥 다른 전령을 써도 되는 것을. 하필 우미르 칸을 떠올리게 하는 신수를?
바야르 칸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원래 주걱턱의 친구였어. 구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주걱턱이 구구는 두고 가겠다 말했을 때, 테르미스는 구구의 발이 파르르 떨렸던 걸 기억했다.
슬픔과 아쉬움을 꾹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녀석을 어찌 잡아둘 수 있을까.
-그래, 뭐. 상관은 없겠지. 두 개의 상징이라곤 하지만, 어차피 말이 근본이야. 하얀 매야 뭐······ 장식품 정도지, 장식품.
바야르 칸의 말에 테르미스가 씩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을 무렵,
“그나저나 아쉽겠네? 아니지, 한시름 놓은 건가?”
테르미스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엇을 말이더냐.
“전사의 길이 마무리 되면 주걱턱과 한 번 더 붙어볼 생각 아니었어?”
-아아, 그럴 생각이었지. 네 몸도 나를 받아들이기에 제법 성장했으니. 어쩌면 꽤나 좋은 승부가 되었을지도.
“흐음······ 그래? 내 생각엔 어차피 또 졌을 것 같은데······ 그가 그냥 이대로 떠난 게 노인네 입장에선 더 괜찮은 게 아닐까? 괜히 패배횟수가 늘어나지도 않고······.”
그러자,
-뭐, 뭣이!? 이년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바야르 칸이 버럭 성을 냈다.
-네 년도 아직 모른다. 내 본래의 힘을.
“또또. 맨날 그 소리.”
-지금 네 년으로도 부족해! 내 진짜 힘을 감당할 만한 육체는······ 그래, 역시 그 녀석밖엔 없다고.
황당한 발언이었다.
“참나. 질 거 같으면 질 거 같다고 말하면 되지, 본래 힘을 내려면 주걱턱의 몸을 빌려야 한다고? 그건 그냥 안 싸우겠단 거 아냐?”
그러자,
-그 녀석 말고!
바야르 칸이 고개를 저었다.
“······응? 그럼?”
이어진 그의 말은 테르미스를 무척이나 당혹케 하는 것이었다.
-주걱턱이 소환했던 그 녀석 있잖느냐. 그 ‘킹’이니 뭐니.
“······뭐?”
지금 이 노인네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유령이잖아.”
-그게 뭐 어떻다고.
“유령이 유령한테 들어간다고? 그게 말이 돼?”
-안 될 건 또 뭐냐. 그 거대했던 녀석······ 분명 유령처럼 생기긴 했지만, 물리력도 있지 않더냐.
“하지만······ 아니 근데 이게 뭔가······.”
왠지 머릿속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게 내 머릿속에서 나온 구상인 줄 아느냐.
“······그럼?”
-그 녀석이 가면서 슬쩍 일러주고 간 거라고. 언제 한 번 맞춰보자고.
“허······.”
황당했다. 말이 되나 싶었고.
헌데 신기했던 건, 그것이 주걱턱의 생각이었다는 걸 들으니, 왠지 또 한편으론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하긴.”
매번 놀라운 일을 벌이던 사람이었으니.
테르미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때였다.
‘그나저나 잠깐. 그러고 보니······.’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엇다.
“배웅 안 갔다면서? 만나서 얘기까지 나눴어?”
-······.
테르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나, 노인네 내숭하고는.
*
뚱뚱이는 말없이 홀쭉이를 쳐다봤다.
그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주걱턱 일행의 뒷모습을 가만 응시하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사냥감을······ 아니 사냥감이라 생각했던 것을 이렇듯 바라보고만 있던 적은 처음일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시간만 낭비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뚱뚱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려고? 설마······ 계속 쫓겠단 건 아니지?”
다행히 홀쭉이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고유능력을 두 개 이상 쓰는 괴물을? 우리론 절대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이야. 인정하는 게 조금 늦긴 했지만.”
“그럼 어서 자리를 뜨자고. 괜히 더 있을 이유가 있나? 주걱턱 녀석도 이제 제국을 벗어나려는 것 같은데.”
“······.”
그러나 홀쭉이는 그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침묵을 지키던 그가 불쑥 한 마디를 꺼냈다. 그리고 그건 뚱뚱이로선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거머리의 요람에 주걱턱 암살 의뢰를 올렸다.”
“······뭐, 뭣?”
거머리의 요람.
전 세계에 활동하는 모든 일류 암살자들과 암살단, 무국적 비밀단체, 무정부주의자, 지하의 왕들과 베일에 가려진 조직들이 공유하는 뒷 세계 최대의 정보 창구.
이곳에 청부의뢰를 올리기 위한 최소금액은 무려 50억 골드이며, 수백억 골드에 달하는 청부의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에 뚱뚱이가 놀라 물었다.
“처, 청부금액은?”
“1000억.”
“······허.”
온 몸의 힘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쳤군.”
“그쯤은 되어야 관심들을 가질 테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뚱뚱이는 홀쭉이의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칙, 자존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난 것에 대한 분함 때문에?
무엇이 이 합리적인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걸까.
뚱뚱이가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쳐다볼 무렵,
“그야 간단해.”
홀쭉이가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희한하게도, 그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다.”
“······뭐?”
“이미 우리의 실패를 제국 내 모든 암살단들이 알아차린 상황이야. 정확히는, 이스트 대륙 내의 모든 암살단들이.”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들도 대부분 실패한 일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상대의 힘을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끝까지 따라붙다 결국 시간과 비용만 허비한 셈이니까.”
“······.”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그걸 본인이 언급한다는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쉬쉬하며 넘어간다? 외려 비웃음만 살 뿐이야. 우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나락까지 추락한 위상을 올리기 위해선 이 방법밖엔 없어. 도리어 우리의 실패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 그리고 이걸 모두의 관심사로 끌어올리는 것.”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근데 그게 어떻게······”
“쟁쟁한 녀석들이 모두 주걱턱을 잡는데 실패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괴물에게 도전하고도 살아남은 조직으로 인식이 탈바꿈되겠지.”
“허······.”
아주 약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숱한 의문점들이 쌓여 있었다.
“아니 그렇다하더라도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게······ 돈도 돈인데다, 또 잘못 엮였다간······.”
“돈은 지불하지 않아. 애당초 그만한 돈도 없고.”
“뭐?”
“주걱턱이 괴물이라는 빈말이 아냐. 녀석은 웬만해선 당하지 않을 거다. 그 인간을 잡으려면 전대의 암살왕들과 지하의 왕들 정도는 와야 해. 사실 그들로서도 충분할지 모르겠고.”
“그, 그런······”
솔직히 그 정도로까지 평가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만약 주걱턱이 거머리의 요람에서도 ‘건드려선 안 되는 괴물’로 자리 잡는다면? 최초로 그에 대한 청부의뢰를 한 우리의 위상은 자연스레 높아지겠지. 매번 그래왔으니.”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주걱턱이 혹, 이에 대한 사실을 알고 분노해 들이닥친다면?
암살자들의 공격이 거듭된다면 그 역시도 원인에 대해 알아보려할 것이다. 그럼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 또한 시간문제다.
이에 대해 묻자,
“뭐, 별 수 있나. 도망쳐야지.”
홀쭉이는 그러고 씩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것은,
“······돌겠군.”
그리 합리적인 게 아니었다.
*
도깨비 소굴,
우두머리 ‘노형(老兄)’의 산채.
오각(五角)의 방위로 둘러 선 괴상망측한 다섯 도깨비 조각상과 그 안 곳곳이 신묘한 문양들로 뒤덮인 원형의 대전.
그곳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대한 출입문이 일순간 벌컥 열렸다.
“노형!”
“응?”
백설이 내린 듯 허옇게 물든 눈썹이 턱밑까지 내려온 늙은 도깨비 앞으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지금 훼방꾼 터를 통해 손님들이 왔다는데요?”
산채 안으로 뛰어 들어온 이는 얼마 전 종달새 둥지의 새로운 관리인으로 뽑힌 신참 도깨비였다. 이름이 뭐라더라······ 샛동아비라고 했던가?
“손님?”
“예예.”
“누구.”
“그게 저······ 인간들이라는데요?”
“······.”
요즘 귀가 어두워져 큰일이었다.
“뭐라고?”
“인간이요, 인간.”
“······.”
이윽고, 노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하여간에 거짓말쟁이나 장난꾸러기 놈들 좀 보고관리직에 채용하지 말라니까······.”
인간이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헌데,
“죄송하지만······ 사실입니다. 훼방꾼 터의 문지기인 황개초비 어르신께서 문을 열어주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자면, 저는 장난꾸러기 신도, 거짓말쟁이 신도 받지 않았습니다. 벌써 백 번은 넘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이 새빨갛게 어린 도깨비 녀석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아닌가.
“허······.”
노형은 불호령을 내리려다가도,
“그럼 그게 사실이라고?”
한 번만 참았다. 녀석의 얼굴이 꽤 진지했기 때문이다.
“예. 저기 보세요, 종달새들이 몰려오고 있잖습니까.”
이에 돌아보니, 과연 창가에 종달새 전령(傳令)들이 한가득 몰려든 상태였다.
“······허어.”
이렇듯 갑자기? 무슨 조짐도 없이?
유구한 도깨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도깨비소굴을 방문한 적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어쩌다?”
“그냥 지나가다 들렸다던데요?”
“아니, 그게 말이 돼? 발견할 수도 없었을 텐데?”
“음······ 그것까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노형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게 이 녀석의 잘못은 아니었으니.
“그럼 딱히 목적이 없다?”
“그게······ 뭔가를 요구해왔다고는 합니다.”
“요구? 뭔데.”
“내기를 하자고 하던데요.”
“허······ 내기?”
어이가 없었다.
지나가다 들리기는 개뿔. 딱 봐도 도깨비들이 내기에 환장한다는 걸 알고서 온 게 아닌가. 뭔지는 몰라도 속내가 아주 검은 녀석들일 게 뻔했다.
그러니,
“그래서 뭘 하자고 했는데?”
빨리 가서 구경······ 아니, 파악하러 가보는 수밖에.
*
“그러니까 종목을 우리더러 정하라고?”
나는 재차 되물은 도깨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몇 번을 말해.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너희가 잘하는 걸로 하자고.”
그러자 몇몇 도깨비들이 키득키득 거렸다.
뭔가 생각만으로도 가소롭게 느껴졌다거나, 혹은 재미있을 것 같다고 여긴 듯했다.
그때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뭘 해도 상관없지. 인간에게 질리는 없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냐.”
“뭐지?”
“그쪽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이상, 우리는 내기 자체에 응할 수가 없어. 그쪽이 들어줄 수 없는 걸 요구할지도 모르니까.”
“왜, 자신이 없나? 이기면 되는 거 아냐?”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야. 설사 질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내기요건이 성립이 안 된다고. 그러니 먼저 원하는 걸 말해.”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흐음.
역시나 이 녀석들과는 얘기가 안 될 듯했다.
“됐고, 그럼 여기 우두머리를 불러줘. 거기랑 얘기할 테니까. 우두머리라면 내가 뭘 요구하든 들어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겠······?”
바로 그때였다.
“어엉? 우두머리라면 나를 말하는 게야?”
멀찍이서 웬 늙은 도깨비가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어째 외형이 익숙하다 했더니, 그가 맞았다.
노형(老兄). 도깨비들의 우두머리.
마침,
“노형이다!”
“헐레벌떡 뛰어 왔나봐!”
“무릎 나간 거 아냐?”
“저것 보라지! 노인네가 어딜 빠지질 않는다니까!?”
주위의 도깨비들이 그의 신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우성을 쳤다.
“예끼! 녀석들아! 외부에서 객(客)이 오면 내가 먼저 맞이하는 게 당연한 것이거늘! 지들끼리 모여 속닥거리고만 있어!”
노형은 이내 내 앞으로 다가와선,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에 걸어온 척 하긴 했지만, 진짜로 뛰어온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이어,
“뭐냐 넌?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귀냐?”
대뜸 그러곤 소리쳤다.
“······.”
황당했다.
손님이라더니, 웬 빌어먹으러 온 거지 취급이었다.
하지만 물론, 나는 이에 화를 내진 않았다.
오히려 씩 웃었는데, 이 늙은 도깨비의 성격에 대해서도, 또 이 자로부터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롱, 안 가르쳐 주지.”
“······.”
곧이어,
“이, 이 호랑말코 같은 주걱턱 녀석이!”
노형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내기를 하겠다고? 좋다!”
“뭐야, 이미 다 알고 온 모양이네?”
“뭘 하든 네 놈이 이기면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도록 하마! 하지만 네 녀석이 질 경우엔······.”
“궁금한 걸 물어봐. 뭐든 대답해 줄 테니.”
“······.”
그러자 노형은 약간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놈! 좋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종목은 내가 정하도록 하겠다. 우리가 받을 보상이 좀 더 가치가 낮으니. 동의하느냐?”
“좋아.”
“좋다! 그럼 내기 종목을 말하겠다. 그것은······.”
나는 가만 숨죽인 채 기다렸다.
아마 ‘그것’이지 않을까? 레오 일행도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 그걸 했었으니.
“주걱턱 네놈, 덩치를 보니 힘 좀 쓰나보군. 좋다, 어디 한 번 마음껏 써 보거라! 종목은 바로 도깨비 씨름이다!”
나는 씩 웃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도깨비 씨름.
본래의 씨름과 규칙은 동일하다. 상대를 넘겨 먼저 바닥에 닿게 하는 자가 승리한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규칙은 알고 있느냐?”
“음, 아니?”
“간단해. 상대를 먼저 넘기기만 하면 된다.”
“넘기기만?”
“그래, 근데 먼저 넘겨도 질 수 있다.”
“음?”
“정신 안 차리면 곧장 끝날 테니 조심하라고.”
규칙이 ‘매순간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럼, 자! 이 호랑말코 주걱턱 따윈 단번에 짓뭉갤 수 있다고 자신하는 도깨비들! 앞으로 다 튀어나와봐!”
이어 노형 앞으로 온갖 도깨비들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디······ 도깨비 녀석들 힘 좀 쓰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