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84
84화 다시 웨스트랜드로
***
개굴개굴-.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둔 개구리를 가만 지켜봤다.
개구리는 절뚝거리며 느릿느릿 탁자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녀석은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어느 다리도 다치지 않았고, 기운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점프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뛰고 싶은데, 어서 빨리 이 탁자를 벗어나고 싶은데, 점프가 안 되니 별 수 없이 엉기적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녀석의 사고회로에 약간의 혼란을 줬기 때문이다.
-뛰고 싶으면 왼쪽 앞다리와 오른쪽 뒷다리를 동시에 쭉 뻗어야 한다.
그 결과가 바로 저것이었다. 뛰기 위해선 두 뒷다리를 동시에 접어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은 채, 내가 지정한 다리를 무작정 펴기만 하는 모습.
나는 능력이 제대로 구현되는 걸 확인한 뒤, 개구리에게 걸린 능력을 해제했다.
이윽고,
폴짝-.
녀석이 잽싸게 탁자 위를 벗어났다.
“흐음.”
[규칙을 가지고 노는 장난꾸러기]치누아비의 고유능력에 대한 감상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거 무서운 능력이네.’
솔직히 황당할 정도였다. 이토록 간단한 명령의 주입만으로, 하나의 개체를 완전히 장난감으로 만들 수가 있다니.
제아무리 정신저항력이 제로에 가까운 개구리라지만, 인간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숙련도가 전혀 없는 상태였음에도 이렇게나 간단히 성공하지 않았던가. 좀 더 허들이 있다한들, 요령만 익히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듯했다. 새삼 도깨비들의 사기성을 실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붕어와 개구리로 차례차례 시험해본 결과, 훼방꾼 신의 작업은 별다른 이슈 없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듯했다.
즉, 이제 나는 도깨비들의 고유능력을 흉내 낼 수 있다.
“오케이, 좋아.”
나는 잠시간 숨죽인 채 이를 기뻐했다.
물론 이게 가능해졌다고 해서, 내가 당장 뛰어난 해독가가 되었다고 볼 순 없다.
해독가의 역량엔 물론 고유능력도 크게 영향을 미치긴 하나, 기본적으로 ‘종족’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간단하다. 짐승들 중에서도 적에 맞서 싸우고, 길을 찾는 녀석들은 꽤 있지만, 문제풀이가 가능한 녀석들은 몇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도깨비들의 경우 해독가를 위한 특성들, 가령 ‘이해력’이나 ‘사고력’ 따위가 다른 종족에 비해 월등히 높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그들의 고유능력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또 도깨비의 배경을 지녔다고 해서, 내가 무슨 대단한 해독가라도 된 것 마냥 나대다간 큰 코 다칠 거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그나마 도깨비들이 챕터에 대거 등장하고 나면, 차후 캐릭터 상점에 저들과 관련한 배경 및 특성들이 조금씩 나오긴 할 것이다. 그때 구매 가능한 선에서 몇 개 좀 사두면, 언젠가는 정말 도깨비 저리가라 할 해독가로서의 역량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네.’
다만, 즐거운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후······.”
나는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사실 현 상황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도깨비 배경을 얻고 그들의 능력을 흉내 낼 수는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훼방꾼 신과의 관계 또한 깊어졌다는 데 있었다.
그와 엮인 일 자체는 사실 전혀 괜찮은 일이라고 볼 수가 없다. 원작에서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녀석들은, 물론 개중에 비중 있는 캐릭터는 없었지만, 하나같이 다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훼방꾼 신은 기본적으로 본인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 만한 대상에게 접근해 능력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만약 그 대상이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수행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시, 대상 자체로부터 즐거움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대상이 목표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끝내 부서지는 꼴을 보면서 낄낄대는 것이다.
이것이 훼방꾼 신을 받드는 도깨비들의 한결 같은 패턴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때 그가 내게 행하려고 할 일이기도 하고.
물론,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한 상태였다. 다 아는 상태에서 진행한 일인데 뭐.
말하자면, 서로가 이득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이걸 감당 가능한 영역이라 봤다.
왜냐? 나는 약하지 않으니까.
훼방꾼 신에게 당하지 않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그가 원하는 만큼, 그대로 깽판을 치고 다니면 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온 몸으로 질 수만 있으면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힘.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감히 누가 내게 지적할 수 없을 만큼의 압도적인 강함.
그것이야말로 강자의 특권이 아니던가.
“크······.”
어째 절로 뽕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충만함을 음미하듯 즐기다,
“흠, 어디보자······.”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자아도취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고작 초반부, 네임드도 거의 없는 현 시점에서 강하다 떠들어대 봐야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이어, 나는 이번 도깨비 소굴에서의 수확에 대해 정리했다.
1. 일단 목표로 했던 도깨비 배경을 얻었고,
2. 도깨비들의 고유능력을 흉내 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3. 보물 라미레스 쟁탈전 때 떨어뜨릴 100명의 도깨비 폭탄을 짊어지기까지.
다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칼 자이드의 능력을 흉내 내는 법을 획득하지 못한 것.
사실 이에 대해선 처음부터 좀 쉽게 생각한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훼방꾼 신의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그가 대충 어떤 식으로든 가능케 해주지 않을까 하고. 다른 조건은 다 만족시킬 수 있으니, ‘능력의 격에 맞는 신체를 보유해야 한다’는 네 번째 조건만 어떻게 흐트러뜨릴 수 없을까 하고.
다만,
“너보다 강한 녀석의 능력을 훔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아니, 강하다기보다는······ 그리고 훔치는 게 아니라 흉내······.”
“그것도 규칙을 비틀어서까지?”
“아니 뭐······ 그렇긴 합니다만······.”
“갑자기 내 선택이 후회가 되려고 하는군. 이렇게까지 멍청한 녀석이었을 줄이야. 정해진 법칙에 훼방을 놓는다는 게, 모든 불가능한 걸 가능으로 돌릴 수 있단 얘기처럼 들리냐? 그리고 설사 그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걸 감당해야 하는 건 네놈이다.”
돌아오는 훼방꾼 신의 대답은 내 얕은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고작해야 네까짓 게 규칙을 잃은 이 세계의 분노를 오롯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뭐······ 아니면 아닌 거지 뭘······.”
이는 훼방꾼 신의 능력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가 대충 ‘얻을 수 있는 고유능력은 하나뿐이다’란 규칙을 비틀고, ‘두 개로 늘린다’나 ‘특정대상에 한해 그 조건을 무시한다’는 식으로 쉽게 일그러뜨리는 줄로만 알았다.
허나 들어보니, 그게 그리 말처럼 간단치는 않은 듯했다.
훼방꾼 신의 작업엔 놀랍게도 규칙이 존재했다. 몇 가지의 단계를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고, 비틀 법칙에 따라 난이도까지 나뉘는 듯했다.
이 세계에 통용되고 있던 모든 규칙을 무시할 수 있지만, 훼방꾼 신이 그 같은 권능을 행하는 데엔 본인에게만 적용되는 또 다른 룰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기사 그런 것조차 없었다면 그는 고작해야 도깨비 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진짜 이 세계의 신이라 불리고 있었겠지.
현재 내가 다른 도깨비 신들의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도, 내게 무슨 ‘나 혼자 모든 조건무시!’와 같이 어마어마한 권능이 적용된 게 아니었다.
훼방꾼 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저 그들에 한정하여 ‘차단’의 막을 한 꺼풀 벗겨낸 것에 불과했다. 그조차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고,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다곤 했지만.
물론 이때 ‘차단’이 뭔지에 대해선 알아듣지 못했다.
뭐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칼 자이드의 고유능력에 대한 욕심은 잠시만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주 실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그가 ‘불가능’을 말하진 않았으니.
당장엔 힘이 떨어져서인지 손을 휘휘 내젓는 모양새였지만,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둘러싸고 있던 규칙마저 비틀었는데 뭔들 못할까.
‘일단 조금만 미뤄두는 걸로.’
그즈음,
“주걱턱!”
바깥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코아였다.
“시간 됐어. 그 늙은 도깨비가 왔어.”
“그래?”
산채에 갔다 온다던 노형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간이 꽤 걸린 걸 보면, 준비한 게 제법 되는 듯했다.
“지금 갈게.”
나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
허풍선이 수다쟁이들의 놀이터.
한가한 도깨비들이 모여 노는 일종의 광장으로, 험한 산골짜기에 위치한 도깨비소굴에서 몇 없는 평탄한 지형이었다.
노형과 백 명의 도깨비들은 바로 거기 모여 있었다.
이미 멀리서부터 시끌시끌했다.
때마침,
“저기!”
“왔다!”
“주걱턱이야!”
나를 본 도깨비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래, 그래. 안녕.”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그래, 내가 바로 니들 산골짜기 촌놈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메시아이니라.
그러고 실실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고 있을 때였다.
“주걱턱! 이리로.”
광장 중앙의 작달만한 대(臺) 위에 올라가 있던 노형이 내게 손짓했다.
“마침 저기 오는군. 자, 마지막으로 당부하겠다. 다들 저 녀석 말을 잘 듣도록 해. 어젯밤에도 말했다시피, 저 주걱턱은 사실 어릴 적부터 소굴 내에서 남몰래 키웠던 녀석으로, 종족은 인간일지언정 우리 도깨비와 다를 바가 없는 녀석이다. 다들 봤겠지만 도깨비의 고유능력을 쓸 줄 아는데다, 놀랍게도 다섯 도깨비 신 모두에게 간택을 받은 녀석이지. 인간이라 생각하지 말고, 인간으로 둔갑한 도깨비 정도로 여기고 부디 잘······.”
그즈음,
“아니, 이제 알았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저 턱을 봐! 그럼 저게 도깨비지, 인간이냐고!”
“부디 인간차별을 멈춰주세요, 노형!”
주위에 있던 도깨비들이 그만 좀 하라며, 노형에게 아우성을 쳐댔다.
내가 오기 전까지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이, 이······ 이 빌어먹을 녀석들! 도깨비소굴을 나가고서도 과연 그렇게 큰소리 칠 수 있나 보자! 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들이······.”
결국 노형 또한 크게 화를 내곤 대에서 내려왔다.
흐음.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러자,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 있어? 따라와.”
노형이 나를 끌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느 한 오두막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노형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받아라.”
“응? 이게 뭔······ 어?”
순간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뭐야, 이걸 알아?”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노형이 내게 건넨 것은 한 자그마한 함(函)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기억하기로, 전대 모험왕이 도깨비소굴에 남기고 간 증표였다.
노형은 뭔가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으나, 이내 신경을 끄는 기색이었다.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내겐 풀 수 없는 의문이 한 가득 쌓여있단 걸 곧바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노형은 나를 추궁하는 대신, 내게 한 번 더 함을 내밀었다.
“받거라.”
“이게 뭔데?”
“일단 받아.”
“어······ 싫은데? 왜 주냐고. 뭔데 이게.”
그러자 노형이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전대의 모험왕이 남긴 것이다.”
사뭇 진지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또 한 번 당황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곧바로 밝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좀 더 뜸을 들이거나 해야지.
하여,
“어······ 아, 그래?”
준비되지 못한 엉성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역시 알고 있었군. 어쩐지······.”
“아니, 그냥 뭐······ 잘 아는 건 아니고.”
“그럼 혹시 내용물도 아느냐?”
“아니, 몰라.”
이건 반만 사실이었다.
이 함을 열었을 때 나오는 물건은, 그걸 여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으니.
“네게 주겠다. 가져가.”
“나한테 이걸 왜?”
“너랑 관련 있는 사람이니까.”
“나랑 전대 모험왕이? 왜?”
그러자 노형이 황당하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허, 네놈이 먼저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공통점을 찾아보라고!”
“음? 아······ 근데 그건 장난······.”
“됐고, 가져가. 어차피 지난 수십 년간 보관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가질 건 아니고, 언젠가는 주인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던 물건이지. 나는 그게 네놈이라고 판단했다.”
“허······.”
솔찬히 당황스러웠다.
이걸 주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물론 나도 웬만하면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름 아닌 전대의 모험왕의 물건이니까. 이건 가지고만 있어도, 거대 에피소드의 출연을 보장받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이걸 ‘본래 받게 될 예정인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지사 레오였다.
레오의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물건을(에피소드를) 그대로 홀라당 가져가버린다? 그것도 킹스로드 너머 미들랜드로까지 이어지는 이 중요한 유물을?
내가 작가라도 열이 머리끝까지 뻗칠 것 같았다.
더욱이 이걸 지금 내가 가져간다는 건, 단순히 레오의 역할을 빼앗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게 진짜 문제인 이유는, 이것이 바로 레오를 이곳 도깨비소굴까지 인도하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레오 일행은 킹스로드로 향하기 전, 누군가로부터 ‘전대 모험왕의 유물이 도깨비소굴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본인들을 모험의 탑으로 안내할 거라는 말까지도.
이것이 바로 ‘도깨비소굴 에피소드’의 시작점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소굴에 없다?
레오 일행이 도깨비 소굴을 방문할 이유조차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물론 뭐 방문했는데 찾아보니 없더라, 누가 먼저 가져갔더라······ 하는 식으로 전개가 진행될 순 있겠지만, 그건 기존에 짜둔 선행플롯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었으니.
어쨌거나 전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건 내가 받으면 안 되는 게 맞다.
게다가 출연기회를 보장받는 다는 것 외엔, 그다지 이득이 되는 물건도 아니었다. 굳이 이게 없어도 나는 탑으로 가는 법을 아니까.
하여,
“어······ 아니, 됐어. 나는 별로······ 남이 주는 물건은 잘 받지 않는 성격이라.”
“허허, 헛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관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네놈의 그 주걱턱에 욕심이란 욕심은 죄다 붙어 있거늘! 잔말 말고 가져가거라!”
죽어라 밀어내는데도 노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
그때였다.
“정 네 것이 아니겠다 싶으면, 네 놈이 또 다른 녀석에게 건네주든지.”
“엉······? 내가 주라고?”
그때 문득,
‘아, 그게 좀 더 낫나?’
묘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와 함께할 백 명의 도깨비가 여기 도깨비 소굴 전체를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나는 약간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가장 신비로운 도깨비라고도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럼 내가 그냥 도깨비의 우두머리 격인 존재로 등장하면 되지 않을까? 노형 대신으로.
‘그럴 듯한데?’
사실 나중에 이 도깨비소굴이 등장하는 것도, 작가가 도깨비라는 종족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구성한 에피소드였다. 공들여 기획은 해뒀는데, 그전까지 마땅히 보여줄 기회가 없었으니.
하지만 지금 내가 도깨비들을 먼저 난입시켜버리면, 어차피 이들은 일찍부터 이야기에 엮여 들어가게 된다. 즉, 종족 소개를 위해 기획된 도깨비소굴 에피소드가 더는 중요치 않게 될 수 있다는 것.
‘도깨비를 소개하는 측면에서만 보면 이게 더 효율적이긴 해. 챕터 내용도 더 다채로워질 수 있고.’
물론, 나의 이 같은 판단을 작가 또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함을 내가 쥐고 있으면, 내게 도깨비를 대표할 명분이 어느 정도 생기는 것과 같았다. 이건 전대 모험왕의 증표인 동시에, 노형이 내게 자신의 역할을 맡긴 것과도 마찬가지였으니.
‘도깨비의 우두머리라······.’
뭐, 나쁘지 않을지도.
하여,
“에효, 어쩔 수 없네. 일단 줘봐.”
나는 노형에게서 함을 건네받았다.
노형은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짐을 덜었다.”
“아아, 뭐. 나도 이곳에서 얻은 게 적지 않으니까. 그럼 이제 용건은 끝?”
“그래······ 이제 가도 좋다.”
어째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이 함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어젯밤에 이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기로 했다.
“진짜 같이 안가?”
“······.”
그러고 잠시간 침묵하던 노형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번을 말하느냐. 나는 이곳 도깨비소굴의 우두머리로서, 이곳을 수호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매년 개최되는 영신제를 주관해야 하며······.”
이미 결심을 확고히 한 모양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냥 해본 말이야.”
“······혹시 방문할지 모를 손님을 맞이해야 하기도 하고, 또 만약 적이라도 등장하면······.”
“아니, 알았다니까?”
“······.”
이어,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슬슬 떠날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아참, 깜박할 뻔했군. 네게 들려줄 얘기가 하나 있다.”
“엉? 들려줄 얘기?”
다시 돌아보니, 노형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희한한 것이었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혼돈이 버물린 채 대충 합쳐져 있는 느낌이랄까.
“아주 오래전에 소실된 옛 전설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뭔데?”
“언젠가 다섯 도깨비 신들 모두에게 간택 받은 이가 나타날 거라고. 그리고 그가 모든 도깨비들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엉?”
“도깨비들의 운명에 관한 전설이지.”
“호오.”
이건 나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작가가 만들어만 두고 써먹진 못한 설정인 모양이었다.
“이 같은 전설이 소실된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사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거든. 단순히 다섯 신들에게 선택 받을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야. 기본적으로 도깨비란 종족이 그런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 한 도깨비가 다섯 신들이 탐낼만한 기질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는 게. 그건 이미 도깨비라 볼 수가 없다. 누군가의 장난스런 악의로 빚어진 괴물이지.”
“으음······.”
그도 그렇긴 했다.
“이 전설은 그 함처럼 고작해야 수십 년 된 게 아냐. 수천 년도 더 된 것이지.”
“이야, 그래?”
“그동안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났어. 물론 뭐, 정통 도깨비가 아니긴 하지만.”
“그럼······ 그게 바로 나?”
“그래.”
순간,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뭔가 여기 엮인 새로운 설정이라도 있나?
“오······ 그래서?”
“끝이다.”
“엉?”
“얘기 끝이라고.”
“뭐야······ 더 이어지는 내용 없어? 운명의 그 녀석이 뭘 더 할 거라는? 어디 가서 무슨 나라를 세운다든가, 보물을 찾으러 간다든가······.”
“없다. 그냥 나타날 거라고만.”
“······.”
황당했다. 그럼 뭐 어쩌라고.
만들다 만 설정들이 대개 이런 식이긴 하지만······ 그냥 어이가 없다고나 할까.
물론, 지금은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 뭐······ 일단 알았어. 잘 이끌어 볼게. 저 백 명.”
“그래, 부탁한다.”
그러고 돌아서서 갈 무렵, 마치 여운처럼 희미한 중얼거림이 나직이 들려왔다.
또 보자, 도깨비 왕.
*
백 명의 도깨비들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한 지 3일 째.
길을 가던 중, 한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쿠쿠궁-.
세상이 뒤흔들렸다.
“······뭐야?”
그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으나, 딱히 이에 대해 언급하는 이들은 없었다.
코코아도, 치누아비도, 또 다른 도깨비들도 그저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현상을 알아챈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네.’
바로 그때였다.
띠링-.
홀로그램으로 메시지가 하나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확인한 메시지의 내용은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긴장감을 내게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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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 적당히 낮출 것이지.’
강제로 파워밸런스가 조정되는 시기.
그렇게 난데없이 첫 번째 ‘격변의 시기’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