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87
87화 허허, 망했네
***
“······물러서.”
타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외려 본인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러고 극도로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는 그녀를 가만 쳐다봤다.
실은, 약간 당황한 상태였다.
‘원래 저랬었나?’
분명 당차고 괄괄한 느낌의 캐릭터였는데······ 실제로 보니 약간 겁먹은 토끼에 가까웠다.
물론 현재까지 그녀가 수차례의 습격에 시달린 것은 맞다.
아니, 내가 도와주지 않은 것까지 치면 훨씬 더 많았을지도.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여태 죽을 정도의 위기에 처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타냐의 뒤를 쫓는 녀석들은 이스트랜드에서 넘어왔다는 설정인데, 이들의 전투력이라야 뭐······ 아주 하급의, 예전 데스톰브의 마피아들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들은 얼마 뒤, 보물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웨스트랜드 내 캐릭터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지는 친구들이다. 그저 분위기조성용 엑스트라라고나 할까.
고작 그런 녀석들에게 좀 쫓겼다고 저렇게까지 경계심이 높아져 있다니.
흐음.
그러나 이내,
‘아냐,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선입견으로 캐릭터를 판단하려 들다니.
현재 내가 특정 캐릭터들에 가지고 있는 인식은 현 시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들을 겪은 후,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변화된 그들에 대한 것이지.
특히나 이야기의 끝까지 살아남는, 비중이 높은 캐릭터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오랜 시간 변화한 이들일 테니.
즉, 오히려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워워, 진정해. 오해야.”
일단은 타냐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당신······ 무슨 속셈이지?”
“추격자가 많은 것 같아서 한 번 해본 말이야. 짐을 좀 덜어줄까 싶어서.”
더욱이 당장엔 그녀가 메인시점을 달고 있는 상태였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타냐에게 감정이입한 채 현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그녀를 자극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더욱이 현재의 내 외형은 ‘여성을 위협하는 무뢰배’라는 인식을 형성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아니던가.
“웃기지도 않아. 필요 없어.”
“이것 참······ 억울하네.”
애당초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라미레스’를 빼앗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빼앗으려 했다면 진즉 빼앗았겠지, 괜히 주변만 빙빙 맴돌고 있었겠는가.
지금 ‘라미레스’를 운반하는 건 타냐의 역할이고, 그녀의 몫이다.
괜히 첫 출연에 메인시점을 부여받은 게 아니다. 이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타냐란 캐릭터가 독자들에게 충분히 각인이 되고, 차후 레오의 일행이 될 수 있는 캐릭터로 발돋움하는 게 작가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괜히 그녀의 역할을 빼앗으려 했다간, 페널티 폭탄을 맞고 격이 우수수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물러나, 물러나라고! 당신 도움 따위 받을 생각 없으니까.”
타냐는 경계하는 기색을 없애지 않았다. 심지어 뒤로 추격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상황이었음에도, 그쪽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를 향해서만 날을 세우는 느낌이었다.
“······곤란해 보이는데.”
“됐고, 나도 이제 더는 당신들과 엮이고······ 아니,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 그러니 어디로 갈지 얘기 좀 해주겠어? 내가 피해 다닐 수 있게.”
“피해 다닌다라······.”
사실 그녀가 경계하리라곤 당연히 예상을 했었다. 조금 그 정도가 과했을 뿐이지.
다만, 그럼에도 내가 ‘맡아줄까’라고 물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바로 저와 같은 ‘의혹’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타냐,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독자들로 하여금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주걱턱이 슬슬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랄까.
요 며칠 타냐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시야에는 많이 걸렸으나, 실제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의미심장한 척, 폼만 잡은 게 전부였지.
사실 그도 그럴게, 당장 구조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히 어설프게 타냐를 도와주려 한다거나 보물을 빼앗으려 했다간, 선행플롯에 의해 제재를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와 같은 상태를 계속 지속할 수도 없었다. 독자들의 의문이 언제 답답함과 분노로 바뀔지 모르니.
하여, 약간 ‘기다려봐라’라고 어필한 느낌이랄까.
둘째, 별도의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아마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타냐는 이스트랜드의 넘어온 습격자들과 수준 낮은 추격전을 반복하며 나름의 긴장감을 꾸려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떡하니 버티고 있음으로 인해, 그 같은 긴장감이 발생될 일은 현저히 낮아졌다. 타냐의 신경이 온통 내 쪽으로 쏠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습격자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데, 어찌 추격전에서 긴장감이 발생하겠는가.
실제로 지금도 그녀는 저들의 움직임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에,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내는 느낌으로 내가 별도의 긴장감을 조성했던 것이다. 상황 자체가 루즈해지는 건, 나로서도 피해야 할 일이었으니.
물론, 그러면서도 처리해야 할 건 잊지 않고 제 때 해 둬야겠지만.
“구구, 네로. 일단 뒤에 붙은 녀석들 처리 좀 해줘. 나 이 빨강머리랑 얘기 할 동안.”
“내가 왜!”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네놈 부하가 아니다.”
“······.”
이 녀석들은 매번 반복되는 패턴이 지겹지도 않은 걸까.
“참나, 어차피 다 할 거면서 꼭 한 마디씩 하더라. 그래서 내버려둘 거야? 그래서 공격당하게 내버려둘 거냐고.”
“······빌어먹을.”
“덩치는 곰이지만, 생각은 여우로군.”
“어, 넌 그냥 고양이고.”
곧이어 두 녀석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확인한 뒤, 나는 다시금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이는 모두 내가 유도한 상황이었다.
긴장감의 원천을 추격자들이 아닌 나로 돌리기.
이야기의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등장시키려면, 사실 이 방법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내게 있어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타냐에게로 집중되어야 할 주목도와 상황의 긴장을 빼앗은 만큼, 결국엔 나 또한 이를 대신할 뭔가를 내뱉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특히나 이즈음엔 나 스스로도 약간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계속 이대로 의혹만 심고 알맹이 없는 긴장감만 조성하는 건, 작가의 선행플롯이란 철퇴에 앞서 독자들의 냉랭한 손가락질에 먼저 난도질당하고 말 테니까.
하여,
“좋아, 맡아주겠단 말은 취소하지. 사실 그렇게 진심도 아니었어.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볼 것까지야 있나. 뭔지는 몰라도 계속 잘 들고 있으라고.”
“······정말이야?”
“하지만 도와주겠단 말은 진심이야. 그간의 정도 있고. 또 뭐랄까······ 이제 슬슬 심상찮은 놈들이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뭐?”
실은 일찍부터 준비를 좀 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저 ‘심상찮은 놈들’을.
내가 ‘맡아줄까?’ 하고 물었던 마지막 이유, 셋째.
간단하다. 바로 복선을 깔아두기 위해서. 독자들이 ‘새로운 습격자’들의 등장에 잔뜩 기대감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 에피소드를 풀어나가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목표로 삼았던 것은 임시로나마 타냐의 동료가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것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1. 타냐의 경계심
2. 개연성
나는 기본적으로 쉽게 타냐의 동료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보물을 지켜야 한다는 감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경계심도 경계심이지만, 그녀의 본래 성격 자체가 남을 잘 믿지 않기 때문이다.
타냐는 레오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 선뜻 본인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소년이 아니라면, 쉬이 동료로 삼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헌팅턴’조차 결국 그녀를 레오에게 빼앗기지 않았던가.
이를 누그러뜨리려면, 아니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더라도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면, 그에 걸맞은 습격자가 필요했다.
웨스트랜드 녀석들이 쟁탈전에 끼어들기 전, 어설픈 이스트랜드의 습격자들을 대신하여 타냐가 나를 필요로 할 만큼의 ‘위협적인 습격자’들이.
다음으로 개연성.
설사 타냐가 운 좋게 마음을 열어줬다 하더라도, 그대로 동료가 되어 그녀 곁에 붙는 건 개연성상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작가가 설정해둔 난관은 나 없이도 타냐 스스로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수준이다.그런데 내가 동료가 되어 그녀를 지킨다? 굳이?
이는 괜히 이야기의 긴장감만 떨어뜨리는 행위임으로, 작가의 철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동료가 되려면, 하다못해 같이 다닐 수 있는 수준이라도 되려면, 그만한 습격자들을 내가 따로 준비를 해야 된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어디서 그러한 녀석들을 조달하냐는 것이었다.
처음엔 캐릭터 상점에서 ‘병대’를 활용할까도 생각해 봤었다. 비싸긴 해도, 지금의 습격자들보다야 좀 더 나은 녀석들을 고용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을 버렸다. 비싼 정도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캐릭터 포인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점은 챕터가 시작되면 이용할 수가 없다. 고로 브린디시에 도착하자마자 고용해 최소 몇 주가량을 굴려야 한다는 건데······ 어우, 포인트를 그 따위로 쓸 바엔 ‘페널티 거부권’을 쟁여두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는 선택일 것이다.
결국, 내가 당장 기댈 수 있는 쪽은 단 하나 뿐이었다.
하카.
‘숙제’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브린디시에 도착하자마자 코코아를 보냈던 것이다.
“혼자 잘 갔다 올 수 있겠어?”
“바보 주걱턱. 이 코코아비님은 못하는 게 없는 몸이야.”
“근데 너 왜 아직도 코코아비냐?”
“하카는 도깨비를 좋아하잖아. 그래서 계속 유지하기로 했어.”
“······잘했네. 가다가 이상한데 빠지지 말고. 딴 짓 하지 말고. 급하니까 얼른 데려와.”
“알았어.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지금쯤 코코아가 하카를 만났을 것이다.
분명 떠나기 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다고 했으니, 어쩌면 지금 돌아오고 있을지도.
‘하카 녀석······ 설마 탱자 탱자 놀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아냐. 철두철미한 녀석이니 어느 정도 정리를 하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뭐,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습격자 역할을 하면 되니까.
이어,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타냐를 돌아봤다.
그러곤 그 어느 때보다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은 네가 나를 경계하고 있지만 곧······ 내게 도와 달라 말하게 될 거야.”
*
“보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하카는 그와 같은 보고를 올린 부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손님이라.
희한한 단어였다. 어색한 단어였다.
적어도 이 서재 내에서는 나와선 안 되는 단어였다.
분명 자신은 저와 같은 두루뭉술한 용어의 사용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대상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으면 아직 보고할 때가 아닌 것이고, 그것을 파악하는 일 자체가 힘들 것 같으면, 그에 앞서 관련한 상황보고가 선행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찾아왔다는 말은 곧, 그 손님이란 자가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다는 게 아닌가.
정체불명의 인물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그의 이름이나 신분, 직위, 소속, 목적 따위가 아닌 ‘손님’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흠······.”
그즈음 하카는 입가에 새로이 미소를 새겼다.
질책과 추궁에 감정을 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어, 곧바로 부하의 잘못을 지적하려 할 때였다.
“기다리시던 손님입니다. 다만, 여성에다 한 분만 오신 지라 표현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그 순간,
“······아.”
하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수고했어요. 들여보내도록 하세요.”
그와 같은 용어의 사용이 적합한 이들이 있다는 걸 깜박하고 있었다.
곧이어,
끼이익-.
낯익은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 하카. 잘 지냈어?”
부하의 말마따나, 기다리던 손님들 중 하나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코코아씨.”
“코코아 아니야. 코코아비야.”
“예?”
“3개월 만인가? 안 심심했어?”
“아······.”
뭐랄까,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나오는 말이 없었다.
다만 그냥······.
“예, 뭐. 코코아씨는요?”
“코코아 아니야. 코코아비야. 우린 재미있었어.”
“코코아비······ 거참, 도깨비 보고 왔다고 지금 약 올리는 겁니까?”
나오는 거라곤 평범한 대꾸 정도.
물론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외려,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그때였다.
“자, 이제 가자.”
코코아가 대뜸 그러고 말을 했다.
“예?”
“주걱턱이 불러. 빨리 오래.”
“아······.”
순간, 하카는 표정을 굳혔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기 때문이다.
웃음을 참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게 되다니. 이제까지와는 정 반대였다.
“그러죠. 지금 다들 어디에 있습니까?”
하카는 옆에 걸어둔 코트를 빼어든 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근데 잘 했냐고 물어보라던데? 숙제.”
“······숙제요?”
“다 했으면, 데려오라고도.”
“무슨?”
“뒤의 녀석들 말 하는 거 아냐?”
코코아는 창문 너머로 비치는 조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그제야 하카 또한 이를 알아들었다.
“······지금 당장 조직원들이 필요한 겁니까?”
“응.”
“흐음, 그야 뭐. 근데 얼마나 필요하답니까?”
하카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근 3개월 간 이룩한 ‘조직대통합’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곁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했다.
여기 코코아는 물론이고, 주걱턱 역시도 현재 조직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짐작조차 못할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분명, 예상치의 수십 배는 될 텐데.
그리고 역시나, 이어진 코코아의 말은 하카의 머리를 아주 조금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몽땅.”
*
사흘 후.
로마르 강.
웨스트랜드의 남부와 중부의 경계.
나는 저 멀리 강둑 너머로 보이는 거무튀튀한 인영들의 모습에, 애써 웃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마침내 왔다.
하카가 보낸 숙제가.
내심 조급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타냐······ 아니, 독자들 앞에서 폼은 폼대로 다 잡았는데 소식이 없어서.
딱 오늘이 한계였다. 만약 오늘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내가 먼저 타냐의 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척 위장이라도 해야, 그간에 쌓아둔 긴장감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테니.
‘어쨌거나 나락은 면했고······.’
그러나 간신히 한숨만 돌린 상황에 불과했다.
새로 나타난 습격자들의 질적, 양적 퀄리티에 따라, 내 말의 무게감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겁은 겁대로 주면서 온갖 폼은 다 잡았는데, 새로 나타난 녀석들이 이스트랜드의 추격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면, 심지어 수까지 적다면······.
‘아냐, 하카를 믿어보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어, 강둑 너머를 살피고 있을 무렵이었다.
“······음?”
약간 당혹감이 일었다.
뭔데 자꾸 늘어나지?
강둑 너머로 보이는 검은 인영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수십······ 아니 백을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많은데.”
도착하자마자 곧장 공격을 시행하라고 말을 하긴 했었다.
한시가 급하니 일단 1차 공격은 알아서 진행하고, 그 후에 대화를 하자고.
하지만 분명, 적당히 수를 조절하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한 번에 다 공격해오는 게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설마하니 코코아가 이 말만 빠뜨리고 전달했을 리는 없을 텐데.
‘설마······ 숙제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재차 강둑 너머를 바라봤다.
어느새 검은 인영들은 수백을 넘어서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은 곤란했다.
이 에피소드는 모험왕 내에서 꽤나 드물게 ‘기승전결’이 확실한 구조다. 특히나 쟁탈전에 참여하는 이들의 수준과 그 수가 단계적으로 점차 높아지고, 늘어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헌데 아직 초반인 지금, 저렇게까지 습격자가 많이 등장해 버리면 뒤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습격상황을 꾸며내야 할 텐데······ 이건 좀 곤란했다.
바로 그때였다.
“주걱턱, 당신 말이 맞았네.”
갑작스레 뒤쪽에서 웬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뒤쪽 산등성이 부근에서 타냐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엉?”
“구해줘.”
“뭐?”
이어 타냐의 손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허.”
강둑 너머의 인영들과 같은 색상의 옷을 입은 복면인들로 산이 빼곡했다.
허허, 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