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Brainwashing Villain in a Hero World RAW novel - Chapter (64)
히어로 세계 속 세뇌 빌런으로 살아남기 64화(6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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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츠 소속 간부 빌런 ‘트릭스터’.
본명 채령.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성이 채 씨인 것이 아닌,
그냥 성 없이 채령이라는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그녀.
사방이 새하얀 벽과 정체 모를 기계 장치들로 가득 차 있는 실험실은,
그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실험체 번호 H1789. 19세. 여성.
현재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차갑다 못해 마치 얼음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거대한 실험관.
한 소녀가 그 안에서 무언가의 장치에 연결된 채로 잠들어 있었다.
아주 고운 검고 긴 머리카락과 토끼처럼 새빨간 눈동자.
정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소녀는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H1789가 눈을 떴다!!!”
“어서 과장님께 보고해라!”
마치 백설 공주처럼 아주 깊은 잠에 들어 있었던 그녀가 눈을 뜨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연구원들은 매우 놀라며 기뻐했다.
정작 실험 대상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안에서 깨어났던 건지,
왜 저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기뻐하고 있는 건지,
애초에 ‘나’는 누구인지조차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구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왜 여기서 이렇게 깨어났는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군. 지금까지의 실험체들은 모두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어떤 녀석들은 이능력이 폭주하기도 했는데 말이지.”
혼란스러운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째서인지 크게 감정이 동요하거나 이능력이 폭주할만한 기미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자신이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자신의 기억 속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에는 다행히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실험체를 보살피면서 상태를 지켜볼 연구원을 배치하도록.”
“예!”
그녀는 깨어났던 시점부터 19살이라는 성인에 거의 가까운 나이였지만,
기억이 전혀 없는 그녀를 보살피고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연구원이 배정되었다.
“네가 H1789…? 진짜 예쁘게 생겼구나!
난 서영채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자신을 서영채라고 소개하는 단정한 인상의 여성 연구원.
“실험체 번호로 부르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너’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아직 이름이 없었던 채령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고민했던 영채.
“으음… 내 이름을 뒤집어서 채영이는 어떨까? 채령이 더 나으려나…?”
“…채령이 더 좋아요.”
“그래! 앞으로는 채령이라고 부를게. 알았지?”
늘 실험체 번호로 부르며 물건 다루듯 했던 다른 연구원들과는 달리,
영채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 이름까지 붙이며 채령에게 늘 상냥하고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실험관 안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고 무감각했던 그녀에게,
의사소통이나 감정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준 것도 영채였다.
“어때? 이거 완전 맛있을 거 같지 않아?
마라탕이라고 하는 음식인데… 요즘 유행하는 거라고 하던걸?”
“엄청 매콤하고… 속이 뻥 뚫리는 맛일 것 같아요!”
실험실 바깥의 사회에서 그녀의 나이대 친구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며 채령은 활달한 영채의 성격을 닮아갔다.
“언니가 마시고 있는 거… 그건 뭐에요?”
“아 이거? 이건 커피야. 좀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나는 거야.”
“쓴 걸 왜 먹어요…?”
“커피가 얼마나 좋은데! 향도 엄청 좋고…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해야 하나?”
어느 날 채령이 영채가 손에 들고 다니는 텀블러 안에 든 커피에 관해 묻자,
영채는 그녀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혹시 관심 있으면 언니가 커피 만드는 법도 알려줄까?”
영채는 자신이 사용하는 커피 메이커와 원두의 사진을 찍어 가져오기도 하고,
다른 연구원들 몰래 채령에게 커피 맛을 보여주기도 했다.
“처음엔 이렇게 쓴 걸 왜 마시나 생각했는데,
이제는 왜 마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지? 난 정말 커피 없으면 못 산다니까.”
채령이 커피를 처음 맛본 날로부터, 커피는 채령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물론 커피의 맛과 향이 채령의 입맛과 취향에 잘 맞았던 것도 있었지만,
영채가 좋아하는 걸 자신도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주 정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시간을 보내며,
어느새 친자매가 된 것처럼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만 본다면 채령과 영채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연구원들의 관점에선 그녀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실험체 H1789. 오늘도 상태 양호합니다.
다만… 이능력에 관한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구원들은 채령이 이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문제 삼아,
그녀에게 온갖 실험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채령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말을 하거나,
그녀가 아끼던 물건을 빼앗거나 망가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채령은 영채에게 배워 감정을 사용하고 다스리는 법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인지,
조금 기분이 우울할지라도 크게 감정이 동요하지는 않았다.
“안 되겠군. 슬슬 더 강도를 높여야 할 것 같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연구원들은 실험의 강도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갔다.
채령에게 흉기를 들이대거나 그녀의 몸에 칼로 상처를 내기도 하고,
둔기를 이용해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으스러트렸다.
그런데도 채령은 연구원들이 원했던 것처럼 이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다.
영채는 그런 혹독한 실험을 견뎌내야만 했던 채령을 항상 위로하고 보듬어주며,
그녀가 언젠가 실험실에서 나가도록 돕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사악한 빌런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히어로가 있어.
언젠가… 널 구하러 와줄 히어로가 나타날 거야.”
‘그래…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야. 영채 언니와 함께.’
언젠가는 자신과 영채 언니를 구해줄 히어로가 나타날 거라고 굳게 믿으며,
채령은 어떻게든 혹독한 실험을 견디고 또 견뎠다.
하지만 영채의 위로와 독려에도 불구하고,
점점 실험의 강도는 거세져만 갔다.
채령을 포악한 짐승이 있는 곳에 가두어 마주하게 한다거나,
손발가락도 모자라 그녀의 팔다리나 얼굴을 뭉개어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령에게는 영채를 만나는 것조차,
이제는 허락되지 않았다.
‘영채 언니는 어디 있는 거야…?
살려 줘… 도와줘….’
차가운 독방 안에서 혼자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는 삶.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도 더 밑바닥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그녀는 독방에 갇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 끼이익ㅡ
“어이! 실험체 번호 H1789를 이쪽으로 끌고 나와라.”
“전… H1789가 아니라 채령이에요!”
“그건 상관없다. 어서 끌고 나와라!”
“절… 절 어떻게 하려는 거에요!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요!
어서 절… 풀어 달란… 말이에요!”
며칠 동안 얼마 되지도 않는 물과 음식만을 제공하고 가두어 놓더니,
연구원들은 갑자기 독방의 문을 열고 그녀를 강제로 어딘가에 데려갔다.
도착한 곳은 그녀가 갇혀 있던 독방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무언가 다른 점이 하나가 있었다.
“이거… 놔!”
강제로 의자에 앉히고 그녀의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게 만들더니,
벽처럼 보이던 셔터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위이이잉ㅡ
그 셔터 너머에는 채령처럼 의자에 묶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는 영채가 있었다.
“어… 언니?! 왜 거기에 묶여 있는 거야!”
영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채령의 얼굴을 아주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이것 좀 어서 풀어줘요! 빨리!!”
분명 영채는 채령을 향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셔터 너머로도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져 있어 영채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채령은 영채의 입 모양이라도 바라보며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려 했지만,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흐르고,
영채의 머리 위에는 총 한 자루가 겨누어졌다.
“언니!!!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차라리… 나한테 해!
내 살을 파도 좋아… 내 손가락을 부러뜨려도 좋으니까… 제발!!”
채령은 어떻게든 의자에 묶인 자기 몸을 풀어내려고도 해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연구원들에게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탕ㅡ!!
영채의 머리를 향했던 총 한 자루는 결국 그녀의 머리를 꿰뚫고,
그녀의 주위에는 엄청난 양의 피가 튀어나왔다.
튼튼해 보였던 유리벽은 총격의 여파로 금이 가 있었고,
그 틈으로 벽 너머의 연구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언니… 언니?! 언니!!!!”
채령은 의자를 마구 흔들며 격앙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무런 기억도 없었던 자신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영채는 채령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존재가다른 그 누구도 아닌 동료 연구원의 손에 죽었다.
자신의 이능력을 발현시켜야 한다는 그 이유로.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죽어버린 영채를 보며 채령이 마구 울부짖고 있던 그때,
눈물이 가리고 있던 그녀의 눈에는 영채의 시신을 수습하러 온 연구원들 사이로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가운이 아닌, 어딘가 이상한 슈트 같은 걸 입은 남자였다.
그리고 깨진 벽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실험에는 조금 진전이 있습니까?”
“아!
히어로님께서 오셨군요
. 아쉽게도… 진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