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Brainwashing Villain in a Hero World RAW novel - Chapter (78)
히어로 세계 속 세뇌 빌런으로 살아남기 78화(78/117)
***
어느덧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여름의 끝과 함께 루미에게 주어졌던 꿀 같은 휴가도 마무리되며,
그녀는 이전과는 달라진 몸과 마음가짐으로 히어로 업무에 복귀했다.
‘몸무게에도 큰 변화가 없고… 가슴이나 힙 사이즈만 좀 더 커진 것 같아.’
시윤의 암컷으로서 한 단계 더 진화한 덕분에 몸 곳곳이 풍만해진 상태였지만,
다행히 그녀의 히어로 유니폼인 제복을 입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루미는 멋들어진 수염과 단정하게 넘긴 백발이 매력적인 중년의 남자 앞에 섰다.
“호오… 정확하게 맞춰 왔네.”
루미가 처음 히어로가 되었을 때부터 그녀를 지켜봐 왔던 직속 상관이자,
히어로 연합 작전 지휘과의 간부 중 한 명인 윤 부장.
연합의 수많은 비밀 작전을 지휘하여 ‘검은 눈’으로 더욱 자주 불린다.
“그동안 휴가는 잘 보냈나? 루미 양.”
마치 기계처럼 경직된 자세로 경례하는 루미에게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잘 쉬었냐고 묻는다.
“제가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라 여러 차례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하! 휴가를 즐기고 와서도 그 딱딱한 태도는 여전하구만 그래.”
변하지 않은 루미의 차가운 태도가 오히려 반가운 듯 허허 웃음을 짓는다.
“돌아오자마자 뭔가 임무를 시키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맡아주었으면 하는 게 있네.”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그래. 얼마 전 자네가 제압했던 그 빌런 말이야. 기억하나?”
‘잊어버렸을 리가. 시윤 씨와 날 만나게 해준 녀석이니까.’
다크 나이츠의 간부 빌런 엑스큐셔너.
루미에게는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강력한 빌런 중 한 명이자,
어쩌다 보니 시윤과 맺어지게 해준 묘한 은인이기도 한 존재였다.
“네. 기억합니다.”
“그 녀석이 어제 깨어났다네.
자네가 얼려 두었던 그 얼음이 서서히 녹아서 말이야.”
루미의 이능력인 ‘빙결’은 대상을 얼린 후 이능력을 집중하고 있지 않다면,
보통의 얼음처럼 온도에 따라 녹아내리게 된다.
거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엑스큐셔너를 얼렸던 그 얼음은 꽤 거대했기에,
녹아내리는 데에만 거진 열흘 이상 걸렸던 모양이다.
“다른 취조 전담 직원들은 영 겁을 먹어서 말이지.
자네가 직접 나서서 그 녀석을 좀 취조했으면 하는데. 어떤가?”
히어로 연합에서는 빌런을 붙잡았을 때 대개 빌런이 된 동기부터 시작하여,
이능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나 빌런으로 지내면서 한 범법 행위 등 수많은 것들을 조사한다.
엑스큐셔너와 같은 거물급 빌런은 취조가 가능하다면 상당히 고급 정보가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다크 나이츠의 카이저 총수와 타 간부급 빌런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취조를 담당하고 있는 연합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윤 부장이 부탁했던 몇몇 히어로조차 겁을 먹고 취조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맡겨 주신다면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그럴 것 같았어.”
윤 부장은 책상 서랍을 열어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히어로 연합의 심볼이 그려진 검은색 카드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빌런 수감 시설에 들어가려면 이 카드가 필요할 거야.
히어로나 일반 직원들에게는 발급되지 않고 간부에게만 발급되는 카드지.”
“제가 이걸 가져가도 수감 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자네가 가지고 있는 연합원증을 같이 제시하면 될 거야.
내가 미리 수감 시설 쪽에 자네를 보낸다고 말해 놓았으니까 문제 없을 걸세.”
루미는 간부 전용 출입증을 손에 건네받고는,
자신의 연합원증이 들어 있는 제복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더 하달하실 일은 없으십니까?”
“아직 다른 잔당들은 추격 중에 있다네.
사슬을 사용하는 녀석과 폭탄마 빌런은 바짝 쫓고 있지만…
나머지 두 녀석은 갈피도 잡을 수가 없어.”
히어로 ‘펀치 레이디’를 완전히 시체로 만들어 놓았던 크레이지 체인,
그리고 폭탄화 이능력을 사용하는 파이어크래커는 바짝 뒤쫓고 있는 상황.
그러나 카이저 총수와 트릭스터는 그 행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예? 무슨 일이십니까.”
고개 숙여 윤 부장을 향해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차,
그가 루미를 잠시 불러 멈춰 세웠다.
“자네 혹시… 요즘 좋은 일이라도 있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뭔가 표정이 전보다 좀 펴진 거 같아서.”
루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뭔가 달라진 거 같다면서,
혹시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묻는다.
“혹시… 휴가를 보내면서 누굴 만나기라도 한 건가? 응?
나 정도 나이가 되면… 그런 것들이 다 눈에 보인다고.”
“그런 일 없습니다.”
그러나 루미는 오히려 더욱 차갑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단칼에 윤 부장의 예측을 잘라냈다.
“떼잉… 쌀쌀맞기는…!
뭐… 이래야 우리 히어로 아이스 퀸 님 답기는 하지. 하하!”
그러나 윤 부장은 자신의 시답잖은 농담에 싸늘하게 반응하는 루미가 익숙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혹시나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즉시 보고하고.”
***
루미는 윤 부장의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연합의 특수 수송 차량을 이용하여,
그가 부탁했던 엑스큐셔너의 취조 건을 해결하고자 수감 시설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네. 빌런을 제압하기만 했으니….’
그녀가 히어로로 활동하는 동안 제압한 빌런만 수백 명 가까이 되지만,
정작 그 이후로 취조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해 수감 시설에 찾아온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흉악 빌런 수감 시설’이라고 써진 커다란 문 앞에 서자,
육중한 무장과 화기를 들고 있는 경비대가 그녀의 앞에 우르르 몰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빌런 취조 건으로 찾아왔습니다.”
루미는 제복 안쪽의 주머니에서 간부 전용 출입증과 자신의 연합원증을 꺼내어,
그녀를 경계하고 있는 경비대원에게 건넸다.
“아! 윤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히어로님이시군요. 이쪽입니다.”
출입증과 연합원증을 보고 루미를 알아본 경비대원이 총을 거두고,
그녀를 수감 시설 안으로 안내했다.
‘온통… 회색 벽이네.’
수감 시설 내부는 전부 특수 처리된 회색 벽과 고압 전기가 흐르는 철창으로 막혀 있고,
특히나 흉악 빌런을 수감하는 곳은 무장 경비대가 여럿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빌런 엑스큐셔너. 본명은 박규한입니다.”
바깥조차 보이지 않을 두꺼운 철문 여러 개를 지나고 또 지나,
빌런 엑스큐셔너의 본명인 ‘박규한’과 그의 수감 번호가 쓰인 문 앞에 섰다.
“안에 들어가시면 특수 재질로 된 투명한 가벽이 한 겹 있습니다.
그 벽에 대고 말씀하셔도 목소리가 녀석에게 온전히 전달되니 편하게 취조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경비대원이 특수하게 설계된 잠금장치를 이러저리 움직이더니,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며 아주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이봐! 히어로님께서 네놈을 취조하러 찾아오셨다!”
마치 동물원 안에 있는 우리나 수족관처럼 튼튼하고 두꺼운 투명 벽에 가로막힌 채,
좁디좁은 바닥에 누워 있던 엑스큐셔너가 얼굴을 들었다.
“또 귀찮은 녀석이 찾아왔군.”
“정확히 30분 후에 저희 경비대원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겁니다.
그 때까지 취조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경비대원이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간이 의자 하나를 설치해두고,
모자를 벗어 루미에게 인사하며 문을 닫았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답할 생각은 없다. 돌아가라.”
루미의 얼굴을 보고는 귀찮은 듯 몸을 벽 쪽으로 돌려버리는 엑스큐셔너.
“오랜만입니다. 그때 휴게소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네요.”
“휴게소…?”
엑스큐셔너는 휴게소라는 말에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몸을 돌리더니,
눈을 째릿거리며 루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계집인가? 날 공격했던.”
“오늘은 당신을 취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질문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하시길 바랍니다.”
“괜한 수고 들일 필요 없다. 어차피 할 말은 하나도 없다.”
“당신이 그렇게 완강한 태도로 나온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의 동료들도 전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압될 겁니다.”
– 쿵ㅡ!
루미의 계속된 취조 시도에 화가 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그대로 해초 같은 긴 머리를 치렁거리다 투명한 벽에 머리를 쾅 박아버렸다.
‘정말 비협조적이네… 어떻게 하지.’
다른 취조 전담 직원들과 히어로들은 그의 이런 태도와 행동에 겁을 먹었던 모양이지만,
루미는 겁을 먹기보다는 어떻게 취조를 이어가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다른 녀석들이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고…,
총수도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모른다.
그런데 왜… 왜 자꾸 나에게 귀찮게 구는 거냐는 말이다.”
“이건 저희 측에서 해야 할 일이자 의무입니다.
당신은 빌런 중에서도 조직 범죄를 일으킨 흉악한 빌런이니 말입니다.”
“실력은 제법 괜찮은 계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연합의 사냥개인 건 다른 녀석들과 다르지 않은 모양이군.”
루미의 실력을 칭찬하면서도 오히려 실망한 듯한 말을 하며,
엑스큐셔너는 다시 몸을 돌려 벽을 본 채 누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