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Brainwashing Villain in a Hero World RAW novel - Chapter (93)
히어로 세계 속 세뇌 빌런으로 살아남기 94화(93/117)
***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추는 수많은 상점가의 조명이 거리를 비추고,
그 빛 아래에서 사람들은 일과를 마치고 편안한 휴식과 오락을 즐긴다.
웃음소리와 신나는 음악이 멈추지 않고 흐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이 거리에서,
단 한 사람만이 홀로 웃지 못하고 거리를 쓸쓸하게 걷고 있었다.
– 툭ㅡ
“으앗! 아! 죄송합니다.”
마치 죽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번화가를 쓸쓸히 걷고 있던 루미.
옆을 지나가다 그녀의 어깨에 부딪힌 남자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
그러나 루미는 사과하는 남자에게 대답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갈 곳을 잃고 그저 뚜벅뚜벅 거리를 걷기만 했다.
“뭐야 오빠…? 사과하는 데 고개도 안 돌리고….”
남자의 연인으로 보이는 일행 여성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루미를 째려보았다.
“괜찮아. 어디 아픈 사람인 거 같아. 그냥 가자.”
루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남자는 여자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루미와 멀어지더니,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여자의 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저 여자… 얼굴이랑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빌런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루미의 턱과 손등에 묻은 핏자국을 본 남자는 그녀를 빌런일 수도 있다 생각하고,
괜히 기분 나쁘다고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
본래 인간의 걸음이라는 건 목적과 종착점을 미리 정해둔 채로 행하는 것.
그러나 지금의 루미에게선 도저히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치 거리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루미는 공허한 표정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기만 했다.
– 투둑… 투두둑…
갑작스레 고요한 어둠 속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다.
“뭐야? 갑자기 왠 소나기가?”
그러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 가방 속에서 예비용 우산을 꺼내어 쓰거나,
옷이 비에 젖지 않도록 가게나 건물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갔다.
“……아.”
번화가를 걷던 행인들의 대부분이 비를 피하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루미는 어깨와 머리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루미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그저 비를 맞으며 선 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 괜찮은 거야…?”
“젊고 예쁜 아가씨가 왜 그럴까….”
사람들은 루미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며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너무나도 슬퍼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탄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저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 주겠지.
누군가는 저 여자를 데리고 어딘가로 비를 피하게 하겠지.
난 지금 놀러 나와서 바쁘니까.
소나기라는 재해로부터 그녀를 구해줄 히어로는 이 번화가 안에 없었다.
“흐윽….”
자신이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수많은 빌런으로부터 시민들을 구했는데.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참고 견뎌왔는데.
그녀에게 남은 건 연합의 배신과 시민들의 무관심이었다.
– 띠리리링ㅡ 띠리리링ㅡ
한참 동안 비를 맞으며 울고 있던 루미의 옷 주머니 안에서 전화 알림이 울린다.
“누… 누구…?”
혹시나 연합에서 자신을 찾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
그러나 루미의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연합 관계자의 이름이 아니었다.
“시… 시윤 씨…?”
화면에 뜬 이름이 연합과는 관계없는 것을 본 루미는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고,
그제야 자신이 길 한복판에서 비를 맞으며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루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리자 알게 된다.
“아앗…!”
루미는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몸을 일으켜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스마트폰 액정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옷 소매로 닦아냈다.
“여… 여보세요….”
“아! 루미 씨! 지금 일하고 계신 거에요?”
“아… 그….”
휴가가 끝나고 나서도 시윤과 매일 같이 문자나 전화를 나누며,
서로의 일과 감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루미.
그러나 히어로의 정규 근무 시간이 끝났음에도 문자도 메신저도 확인하지 않고,
하필이면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탓에 시윤이 걱정되어 전화를 건 것이었다.
“문자도 안 읽고.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에요?”
“아… 아무 것도… 아… 아니에…요.
일이 좀… 바빠서… 미안해요.”
루미는 애써 자신의 상황을 시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하지만 눈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루미의 목소리 속 슬픔과 절망은 감출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그 슬픈 감정을 눈치챈 시윤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 아니… 에요…. 전 괜찮아요….”
루미는 시윤에게 자신의 슬픈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는 그에게 멋지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속 어딘가 한 켠엔,
절망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구원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시… 시윤 씨. 제가… 어떤 짓을 했더라도…,
어떤 모습이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 간절한 마음이 마침내 살며시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시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제겐 얼마든지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루미의 간절한 마음에 대한 시윤의 대답.
“루미 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 알지 못해요.
하지만… 너무 견디기 힘들고 슬픈 상황이라는 건 저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혼자 힘든 일을 다 짊어지려고 하지는 마요.”
“그렇지만… 전….”
“제가 루미 씨가 있는 곳까지 갈게요. 어딘지 알려줄 수 있어요?”
여전히 불안함과 두려움에 빠진 자신을 구하러 오겠다는 확신이 담긴 시윤의 말.
“호텔 근처에 있는… 밤에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에요.”
루미는 얼굴에 흐르고 있는 빗방울과 눈물을 닦아내며,
그제서야 용기를 내서 자신이 있는 위치를 시윤에게 알려 주었다.
“용기 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지금 달려갈게요.”
***
도화와 달콤했던 섹스를 마치고 그녀를 재우며 잠시 쉬고 있었던 그 사이,
하루 종일 연락을 받지 않았던 루미에게 전화를 걸었던 시윤.
“으으…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를 받은 루미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느끼고,
루미가 용기 내 말한 번화가를 향해 우산을 들고 달려가고 있다.
“분명 성인용품점이 있었던 그 길인데… 여기인가?”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빗방울 사이로 루미의 모습을 찾아 헤매다,
“루미 씨…!”
한참을 뛰어서야 비에 젖은 회색 건물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루미를 찾아냈다.
“흐아앗…! 시… 시윤 씨…?!”
그러고는 젖은 몸을 덜덜 떨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루미를 꽉 껴안는다.
“괜찮아요. 그냥 그대로 있어요.”
시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빌런이다.
빌런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철저히 설계와 계획대로 냉정하게 움직이는 존재여야만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 점찍은 암컷이라면 다르다.
과거 다크 나이츠는 나약했기 때문에 부하와 아지트를 지키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난 부하들을 버리지 않는 강한 빌런이 되겠다고.
시윤은 그 생각으로 루미에게 달려와 그녀를 꽉 안은 것이다.
“울고 싶은 만큼 충분히 울어요. 이야기는 그 후에 들어도 좋으니까.”
루미는 시윤의 단단한 품 안에 안긴 채 목이 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해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끝도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시윤은 루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냉정하고 무감정한 히어로였다는 루미가 이렇게 될 정도라면,
그런 그녀조차도 견디기 힘든 일이 있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
느닷없이 평온한 저녁 하늘과 왁자지껄한 번화가를 적셨던 소나기가 그치고,
루미와 시윤은 지난번 찾았던 호텔에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윤은 객실 안에 들어와 루미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방 내부 온도를 적절히 맞추었다.
“에어컨 온도도 너무 춥지 않게 맞춰 놨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에요.”
루미는 젖은 옷을 호텔 내부의 세탁방에 맡긴 후 가운을 입은 채,
시윤이 근방의 편의점에서 구매한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받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줄 수 있어요?”
루미의 상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야,
시윤은 루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비를 맞고 울고 있었는지 묻는다.
“혹시 저한테 말하기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일이에요?”
“그… 그건….”
“그럼 우리 서로 거래 하나 해요.”
루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말하기를 주저하자,
시윤은 서로 간에 ‘거래’를 하자고 제안한다.
“제가 그동안 루미 씨에게 숨기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말해줄게요.
대신… 루미 씨도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