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Brainwashing Villain in a Hero World RAW novel - Chapter (94)
히어로 세계 속 세뇌 빌런으로 살아남기 95화(9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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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동안 루미 씨에게 숨기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말해줄게요.
대신… 루미 씨도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거에요.”
시윤은 루미가 숨기고 있는 일에 대해 솔직하게 듣기 위해서,
자신이 빌런이라는 사실 또한 그녀에게 밝히는 도박수를 둘 생각이었다.
히어로인 그녀의 앞에서 빌런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건 자폭 행위나 다름없지만,
이미 루미에게 2단계 각인이 새겨진 만큼 그에게도 보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에 루미 씨에게 제 앞에선 솔직해져도 된다고 했으니까…,
저도 루미 씨께 숨기고 있던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루미는 시윤의 제안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굴리다,
결심이 선 듯 시윤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윤은 그녀를 따라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루미 씨께선 도시와 시민들을 지키는 히어로 ‘아이스 퀸’ 님이시죠.
그런데… 저는 그런 루미 씨와 대적해야 할 입장이에요.”
“대적한다는 건… 설마…?”
히어로와 대적해야 하는 입장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을 도출할 수 있는 문제였다.
“네. 전 빌런이에요. 시민을 공격한 적도 있고… 도시에 혼란을 일으킨 적도 있어요.”
도저히 빌런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시윤에게서 들려온 충격적인 진실.
마치 차가운 얼음과 같았던 루미를 사르르 녹여주고,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던 시윤이 빌런이라는 사실.
이전의 냉철하고 차가웠던 루미였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시윤을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멘탈이 깎이고 부서져 심적으로 크게 지친 데다,
수 년 간의 노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당하며 히어로의 긍지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상태.
그저 크게 놀라 얼어붙기만 한 채 시윤을 공격하지 않았다.
“많이 놀라신 거 같네요. 예상은 했지만.”
빌런과 히어로는 언젠가 대적하여 둘 중 한쪽은 그 운명을 다해야 할 관계.
루미는 시윤이 빌런이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히어로인 자신을 만난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도대체 왜 그동안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빌런 입장에서 A급 히어로는 아주 눈엣가시인 존재일 텐데.
만약 정체를 숨기고 섹스까지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그만큼 처리할 기회도 많았을 텐데.
‘그럼 도대체 그때의 일은…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과거 휴게소에서 시윤이 다른 빌런을 처리한 것도 모자라,
히어로인 자신을 구한 일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저를 공격하지 않으신 거죠?
분명… 빌런 입장에서 저 같은 히어로는 눈엣가시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부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
루미는 왜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루미 씨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는 또 한 번의 예상하지 못한 대답.
루미는 시윤이 빌런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지만,
이번에는 그 놀라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전자는 혼란스러움과 약간의 배신감이 섞여 있었다면,
후자는 마치 사랑 고백을 받은 것만 같은 심장의 두근거림이었다.
“히어로 앞에서… 스스로가 빌런이라는 걸 자백하는 꼴이 됐네요.
그럼 이제… 루미 씨가 말해줄 차례에요.”
시윤은 자세한 전말이나 ‘커럽션 시스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히어로인 루미 앞에서 빌런이라는 걸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그… 그게…!”
루미는 당혹감과 두근거림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지만,
먼저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말한 시윤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오늘 낮에… 제 직속 상관 중 한 명을… 공격했어요.
그리고… 연합 본부를 도망쳐 나와서 거리에서 헤매고 있었던 거에요.”
‘직속 상관을… 공격했다고…? 설마 아까 그 기사…?’
시윤이 도화와 섹스하기 전 보았던 그 기사 내용.
히어로가 사무관을 공격하여 중태에 빠트린 뒤 도망쳤다는 그 기사가 시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저한테는… 너무나도 소중한 언니가 있었어요.
저보다 4살이 많았으니까… 아마 살아 있었다면 올해 29살이었을 거에요.”
“언니….”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언니도 저처럼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저와 가족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20살 때 히어로가 되었어요.”
루미의 언니인 루나가 성인의 나이에 가까워졌던 그 당시.
그 당시는 빌런이 지금보다도 더 기승을 부려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던 시기였다.
가족을 사랑하고 아꼈던 루나는 자신의 이능력으로 가족들을 지키겠다며,
20살이 되던 해에 연합에 입사하여 히어로가 되었다.
“언니는 몇 년 동안 많은 빌런을 격퇴하면서 A급 히어로가 되었지만…,
제가 20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전투 중에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연합은 루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루미와 루미의 가족에게 알렸고,
루미와 가족들은 크게 상심하며 1년 가까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행방을 뒤쫓았다.
하지만 아무리 온갖 곳을 다 찾아다녀도 루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제 이능력을 알아본 연합에서 히어로가 되어서 힘들고 고된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면,
언니를 찾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었고… 그렇게 히어로가 됐어요.”
루미의 안타까운 과거를 듣게 된 시윤은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최근에 맡겨진 임무가 계속해서 실패한 탓이었는지,
연합의 상부에서 제게 징계를 내리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그 상관에게 듣게 되었어요.”
“징계….”
“네. 지금까지 맡고 있던 임무에서 모두 물러나고…,
언니를 찾아주겠다는 약속도 파기하겠다는 내용이었죠.”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보통의 히어로는 알지도 못할 고된 임무를 끝도 없이 수행했지만,
고작 한두 번의 실패가 그 공든 탑을 무너지게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루미는 평소와 달리 격분하여 상관을 공격했고,
루미의 협박이 두려웠던 상관은 이미 7년 전에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언니가… 언니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면서… 끄흐윽….”
루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순간 느꼈던 배신감과 절망감이 다시금 차올랐는지,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숙인 채 다시 눈물을 떨어트렸다.
“죄… 죄송해요.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파서….”
“괜찮아요… 괜찮아.”
잠시 동안 눈물을 쏟아냈던 루미가 시윤의 품속에서 잠시 진정할 시간을 가지고,
감정을 추스른 루미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갑자기 미칠 듯이 분노가 차올라서 상관을 죽일 듯이 공격하고는…,
본부를 도망쳐 나와서 혼자 정신을 놓고 거리를 헤매고 있었어요.”
루미에게 사실을 고백했던 그 상관은 평소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상관이었고,
상관을 중태에 빠트릴 정도로 과격하게 공격한 건 그 탓이기도 했다.
그 후 루미는 분노와 공허함 그사이 어딘가의 알 수 없는 감정에 붙잡힌 채,
본부 건물에서 도망쳐 나와 정처 없이 번화가 안을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시윤은 그제야 루미가 왜 온종일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나 슬픈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지 납득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히어로 연합 측에서 해당 사무관을 공격한 범인을 찾는 건 시간 문제.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히어로 연합에 돌아가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연합에서 이해하고 그녀를 선처해줄 리는 없다.
오히려 빌런 취급을 하며 엑스큐셔너처럼 수감 시설에 갇히게 될 것이 뻔했다.
어떤 걸 택해도 배드 엔딩이 될 것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기에,
루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루미 씨의 복수.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
“제가 말했잖아요. 전 빌런이라고.”
시윤은 울먹거리며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루미의 뺨을 어루만지며,
자신이 루미와 루나의 복수를 돕겠다고 제안했다.
“그 말은… 저보고 빌런이 되라는 건가요…?”
히어로였던 언니 루나의 미소 짓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시민들을 지키며 뿌듯했던 과거의 모습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그러나 루미는 시윤의 달콤한 제안을 선뜻 거절하지도 못한 채 고민했다.
‘복수…?’
자신의 감정과 가족으로 수년 간 자신을 쓰다 버린 히어로 연합.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불평불만을 드러낼 때도 있는 무심한 사람들.
고위 간부급 빌런을 단숨에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힘을 가진 데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큰 사랑과 기쁨을 주었던 존재가 저들을 향한 복수를 돕겠다고 말하고 있다.
‘복수… 하고 싶어. 날 배신했던 녀석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
루미는 자신을 조롱했던 그 상관의 얼굴과 말을 계속해서 되뇌였고,
그녀의 마음 속 복수심이 히어로로서의 미련을 잠식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울먹거리고 고민하던 얼굴은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들고,
루미는 시윤의 품에 달려들어 미소를 지었다.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