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
프롤로그
“씨발 영길리 새끼들. 하여간 세상 숭악한 건 전부 영국 놈들이 만든 거라니까.”
이번 작을 완결내고, 출판사에 취재 핑계를 대고 여행을 나온 지도 벌써 보름째.
그중 대부분을 보낸 영국에서의 나날들은 환상적이었다.
현실감이 없어서 족같았단 뜻이다.
피시 앤드 칩스는 눅눅했고, 맥주는 미지근했고, 홍차는 밍밍했다. 차의 종주국이 뭐가 어쩌고 어째?
역시 차하면 녹차 아니면 유자차고, 식후땡은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하여간 이래서 민트랑 초코를 섞는 괴식 종족들은 안 돼. 영국 요리나 먹는 맛알못 놈들.
맘 같아선 당장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얼큰한 김치찌개에 싹싹 비벼 먹는 제육덮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비행기 표값이 아깝긴 아깝다. 목표로 했던 성지 순례도 끝내야 한다는 직업적 사명감도 내 발목을 잡았다.
물론 그 성지들이라는 데는 대부분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지만.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은 특별할 게 없었고, 베이커가 221B 번지는 입장료만 비싸지, 볼 게 별로 없었다.
글래스톤베리의 아서왕 무덤도 차라리 수도원 쪽이 볼 만했고, 킹스 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은 대체 왜 9와 10 사이가 아니라 8과 9 사이에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하여간 그 아줌마 고증 실수하는 건 진짜 심각하다.
이렇다 보니 사명감은 쥐뿔, 괜히 왔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 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아무리 관광지 컨셉을 위해 1940년대 버스를 갖다 놨다고 해도 그건 커스텀만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엔진까지 40년대 수준이면 어쩌자는 거야?
“진짜, 이놈의 집만 없었어도.”
데번주 토키(Torquay), 그린웨이 하우스.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가 말년을 보낸 별장이며, 추리소설 매니아들 사이에선 나름 성지라 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지금이야 다른 쪽으로 빠졌지만, 고등학교 때 제법 추리소설에 빠져 살았던 나로서는 한 번쯤 들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별거 없네.”
집 자체가 심심한 디자인인 건 뭐, 그렇다 치자.
현대처럼 아방가르드한 초현실주의 저택이 세워질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니까.
그런데 셜록홈즈 박물관이 있는 베이커가도 그렇고, 이런 곳은 결국 그냥 흔한 가정집 같단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단 말이지.
작가가 생전에 쓰던 소장품이나 수집품도 많으니 자료로 쓰기에 쓸모없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근대에 진짜로 살던 집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로망은 로망일 때 좋은 것일까? 동경하던 곳에 막상 오니까 이래저래 영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몸을 돌리던 그 순간.
“꼼꼼하게 둘러보시는군요.”
“예?”
몸을 돌리자, 웬 백인 할머니가 뜻 모를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모르겠다. 암만 봐도 처음 뵙는 할머니인데?
“실례합니다, 부인. 제게 말씀하신 겁니까?”
“어머나. 우리 말을 아주 잘하는군요. 아시아 식민지(east colony)에서 오셨나요?”
“뭐요?”
식민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세상에, DTS와 꼴뚜기 게임의 시대에도 아직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레이시스트가 있단 말인가.
······아니지, 저 주름살을 보자. 이미 뒈진 마거릿 대처가 되살아 와도 일갈할 수 있어 보이는 연배 아닌가?
그래, 세상 바뀐 걸 모르시는 분일 수 있지.
영국의 노인 중에는 대영제국 시절에서 세월이 멈춘 사람도 있다고 들었으니까.
나는 애써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뇨, 전 한국에서 온 소설 작가입니다. 영어는 카투사라고, 미군하고 군 생활을 같이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서부 식민지 출신인 건가요?”
“······허허허허.”
대놓고 나라 이름을 말해 줬는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결국 사람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영길리 혐성 국민들은 어쩔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인은 역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소설가라······ 그럼 이곳에는 선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찾아온 건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흥미롭군요. 그럼 당신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나요? 잠깐 읽어 볼 수 있을까요?”
“아, 예.”
나는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에 화면을 띄워서 넘겼다.
그러자 할머니는 품에서 안경을 꺼내더니 화면을 쓱쓱 당기며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 꺼 영어로 출판된 적은 없는데? 이 할머니, 어떻게 읽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할머니는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군요. 이런 형식인가요.”
“그, 읽을 만하십니까?”
“그럭저럭요? 대사가 과하게 많고 문장도 짧아서 지나치게 말초적이긴 하지만, 이것도 나름의 읽는 맛이 있군요.”
“어, 음.”
그러니까, 어떻게 읽고 있냐구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위압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대가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은 해요. 그, 비틀즈였던가요. 전 그 밴드를 정말 싫어했는데, 젊은이들은 그들을 마치 헨델처럼 찬양하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비교 대상이 너무 다르잖아!
나는 어이를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근데 헨델은 독일 사람 아니었던가?
“당신은 어떤가요? 왜 요즘 사람들은 당신의 글이나 비틀즈 음악 같은 말초적인 창작물을 더 좋아하는 거죠?”
“제 글이 비틀즈랑 동일 선상에 놓인다는 것도 솔직히 좀 부담스러운 말이긴 한데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음, 이걸 뭐라고 말해야 좋으려나.
“뭐, 간단히 말하면 너무 바쁜 게 원인이죠.”
“바쁘다고요.”
“예, 뭐.”
애초에 난 비틀즈를 잘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점 찍고 해체돼서 잊힌 전설이 된 밴드란 것만 알지.
그러니 일단 웹소설 위주로 설명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말했다.
“한국은 과로가 굉장히 심한 나라거든요. 공부든 업무든 진 빠지는 일을 너무 많이 하니 지치고. 차분히 예술을 즐길 시간은 적으니, 자연스럽게 더 효율적으로 쾌감을 얻으려 하는 거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초적인 예술을 선호하게 되는 거라구요?”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대중의 요구죠.”
물론 여기에는 너튜브나 틱택 같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의 영향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가 길어지니 줄이고.
“대중이라······ 그래서는 예술성이 떨어지지 않나요?”
“예술의 기준이 다릅니다. 지금은 대중이 무엇이 예술인지 규정하는 시대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대중이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예술’이 되는 시대죠.”
즉, 대중성이야말로 예술성이다.
나는 그렇게 설명했고,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이론이군요. 하지만 그래서는 애써 만든 작품들이 일회성으로 소비되지 않을까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문학사(文學史)에 길이 남을 걸작을 써서 대문호(大文豪)라 불리고 싶다는 야망이 없나요?”
“없진 않았죠.”
반지의 황제라거나 새 시리즈 사 연작이라거나, 그런 글을 써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솔직히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꿈을 꿔 보지 않겠냐.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대중의 시대에 대문호란 자리는 너무 고고합니다. 굳이 대(大)가 붙는다면, 대중의 옆에서 대작가(大作家)로 불리는 것이 더욱 영광스럽지요.”
“흐음, 꿈이 꺾이는 건 아프지 않았나요?”
“별로요.”
어쨌든, 오래 잘 팔리면 그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이었다.
“이 저택의 주인께서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무슨 뜻이죠?”
“애거사 크리스티는 일평생 80편 가까이 되는 글을 썼고, 그중 제일 좋아한 주인공은 제인 마플이죠. 하지만 대중들이 에르큘 푸아로를 더 좋아한 결과, 작가 또한 푸아로의 주인공으로만 기억되지 않습니까? 저로선 어쨌든 잊히지 않는다는 게 더 부럽습니다만.”
“후후후후.”
노부인이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뭐지, 내가 그렇게 재밌난 이야기를 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빵- 빵-.
“아, 버스 탈 시간이네요.”
“그렇군요. 아주 유익하고 좋은 대화였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늦겠다. 나는 황급히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또 보면 좋겠네요. 핸슬.”
“예?”
방금 뭐라고? 핸슬? 내가 내 이름을 알려 줬던가? 내 이름은 진한솔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린 그 순간.
“어, 어어?”
몸이 붕, 하고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지금, 계단에서 미끄러진 건가?
“으아악!!”
이상하다. 분명 계단에서 미끄러졌을 뿐인데,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진다. 시야도 멀어지고, 소리가 암전된다.
끝없는 고독.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런 젠장.”
나는 하나하고도 반세기 전, 1890년의 영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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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