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08)
Чем люди живы.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What Men Live By).
그것은 비단 톨스토이가 188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 아니라, 톨스토이 인생 최후의 화두였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 모세가. 그리고 1800년 전 임재하신 독생자께서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믿음, 우정보다 우선하는 가장 위대한 감정이자 신께서 아낌없이 주고 계시는 그것.
그것은 성경만 봐도 명확하다.
─요한복음서 13장 34절.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레위기 19장 18절. 마태복음 22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톨스토이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이웃을 사랑할지언정, 나 자신의 이 추한 몸뚱어리만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다.’
젊었을 적, 그는 얼마나 추하고 추하며 또 추한 인간이었는가.
부모를 잃고 방황했다 하나,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형제자매와 숙모가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겉돌았으며, 숙모께서 알려 주신 ‘사랑하는 일의 행복’과 ‘꾸밈없는 조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삶을 살았다.
대신 그는 방황을 택했다.
고민을 방임하고, 방탕에 탐닉했다.
여인에 탐닉하고, 술에 탐닉했으며, 도박에 탐닉했다.
내일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살았고, 오늘 먹고 죽자고 살았으며, 어제 죽었어야 함에도 눈을 떴음을 한탄하며 살았다.
삶의 반대말이 죽음이라면, 그 시절의 그는 사자(死者)나 다름없었다.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무엇에 만족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저 죽을 방법을 찾지 못해 살아가던 인생.
그것이 젊었을 적의 레프 톨스토이였다.
그런 그도 다행히 나이가 들고, 여행을 다니며, 어느 정도 스스로가 성숙해졌다고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결혼하고 정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간 살아온 인생을 엮어, 역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시켰다.
이만하면 됐겠지.
이로써 나는 완전해졌다.
그에게도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그의 오만이었다.
─예술은 인생의 거울이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미 거울의 유희는 흥미를 끌지 못한다.
세 아이와 고모,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 줬던 숙모를 잃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잃은, 젊었을 적의 방탕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끝없는 공허가 돌아온 것이다.
다만 지금의 그가 예전과 다른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충분한 방황을 경험해 봤고, 그것이 한순간의 위안일 뿐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방탕에 빠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철학도 과학도 그의 공포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이기지 못했으니······.
─대체 나는 무엇을 이뤄 냈단 말인가.
인생의 역작?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그렇게 모든 이들이 극찬하는 그 걸작들조차 부정하며 돌아서는 그에게, 그나마 위안의 손길이 되어 준 것은 두 종류의 책이었다.
하나는 당연히 성경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임재하여, 스스로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독생자의 삶은 톨스토이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또 하나는, 성경과 정반대 방향.
가장 낮은 곳에서 발버둥 치고 오르고 또 올랐으나, 그 높은 곳에서 한순간에 추락하여, 거룩한 하나님께 두 번째 기회를 받는 주인공.
그리고 높은 곳에 임하였음에도, 더 높은 곳을 위해 노력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배려하고 노력하는······ 나 자신이 원했던 모습을 그림으로써 저도 모르게 감정 이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영웅.
[빈센트 빌리어스>였다.─나는 빌리어스의 작위를 이으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겁니다.
─공작가의 부귀영화, 권력, 그 모든 것은 그저 드높은 천상의 그분과 왕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모든 이들에서 잠시 빌린 것에 지나지 않지요. 마름이 주인의 것을 전횡하고 있으니, 그것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려야지요.
─모든 것을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돌려놓은 다음에, 요······. 뭘 할 거냐라······ 하하, 글쎄요. 지식 또한 받은 것이니,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군요. 학교 뒤뜰에서 작은 텃밭이나 가꾸면서······.
“오, 오오······! 오오오······!”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과거 되고 싶었던, 농민들을 위해 싸우는 계몽(啓蒙)의 투사였다.
물론 이것이 러시아어 번역본임을 감안하더라도, 그 필력이나 사상은 그다지 깊다고 볼 수 없다.
딱히 기독교적인 의미도 찾기 어려웠고,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은 간혹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그것을 참고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었다.
그가 경험했던 인간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부와 권력을 두고 다투는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의 이전투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상처받는 민중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빈센트 빌리어스가 펼치는 현실적인 개혁 등은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래의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그것도 원래의 역사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며 살아간다는, 그 참신하고도 과감한 전개가 너무나도 센세이셔널했다.
톨스토이 그 자신도 저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되고 있을 정도로.
‘좋은 작가가 자라고 있었군.’
풍문에 그 영국 작가, 한슬로 진은 간혹 그를 찾아오는 먼 후배인 막심 고리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제 활동한 지 겨우 3~4년밖에 되지 않은 신진 작가라고 하지 않은가.
묘사가 적고 거칠다시피 한 서술 방식을 보면 지금 당장의 나이는 크게 많지 않을 터.
아마 나이도 고리키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원래는 연재소설이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가 아직 영글지 못했기 때문인지, 구조나 복선 등에서는 여전히 미숙함이 엿보이고 있었지만.
아마 글이 완숙해지면 완숙해질수록, 더 깊은 사상과 기독교 철학을 담은 글을 쓸 수 있게 되리라.
그는 그렇게 한슬로 진의 성장을 기대하며 다른 작품도 찾아보았으나······.
그 희망은 [던브링어>를 본 순간 깨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이냐!!”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의 자택에서 절규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탕한 척하는 하급 귀족이 도시의 뒤에 숨은 괴물을 쓰러트릴 뿐인, 사상도 철학도 없는 그저 얄팍하기만 한······ 마치 과자처럼 달달하기만 한 스낵 컬쳐.
심지어, 내용 자체가 마치 젊은 날의 자신 같은······!
‘아니야!’
이런 건 그가 원하던 한슬로 진의 소설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분노했다.
이건 배신이고 타락이다!
겉보기만 화려하고, 괴물이나 요괴의 전승 같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을 진심으로 떠들다니.
그 과정도 대의를 위한 무언가조차도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라는 감정을 내뱉을 뿐이지 않은가.
전에서 보였던 기독교적인 사랑이나 애민의 감정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민중이 구원을 받긴 하다만 그건 결국 결과론적인 이야기지 않나!
심지어 그 가면이라는 것이 낮에는 방탕한 귀족? 언어도단이다.
이런, 이런······!
톨스토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즈음이었다. 영국에서 기묘한 소문이 도착했다.
‘뭐? 빅토리야(Viktoriya) 문학상?’
톨스토이는 콧방귀를 뀔 생각이었다.
‘가장 뛰어난 글을 쓴 사람’에게 상을 준다니, 신이 아닌 누가 감히 ‘가장 뛰어난 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며, 하물며 그 상의 이름조차 영국의 여왕 이름을 땄다니.
안 그래도 그 손녀사위인 니콜라이 2세가 갑갑하기 그지없는 개자식이라는 게 밝혀져서 열불이 뻗치고 있거늘, 그런 것을 자신에게 주겠다니.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아니, 잠시만.’
문득 좋은 기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을 주는 조직은 영국 왕립문학회.
한슬로 진은 그 문학적 성취를 볼 때, 왕립문학회 소속은 아니더라도 나름 영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직접 영국에 가서 타락한 한슬로 진을 계도하여 이런 허무맹랑한 글을 쓰지 못하게 따끔하게 가르치고, 겸사겸사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다음 돌아온다면?
‘음, 그래. 그렇게 해야겠군.’
잘못된 길을 들어서려는 후배 작가를 위해서 그 정도의 수고는 해 줄 수 있지.
겸사겸사 어째서 [던브링어>의 주인공을 저런 식으로 설정했는지도 묻고, 감히 나에게 저런 폭군의 이름이 붙은 상을 주려 한 무례한 섬 원숭이들도 엿 먹여 주면 나쁘지 않은 일정이 될 터.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간만에 왕년의 여행 경력을 떠올리며, 영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그를 만나러 조지 버나드 쇼가 오고 있었다는 건 전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
“······그으, 래서.”
나는 떨떠름하게 다 태운 시가를 내려놓고 벌벌 떠는 레프 톨스토이의 하얀 수염과. 그 옆에서 그의 말을 띄엄띄엄 통역해 주는 조지프 콘래드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지?
콘래드, 저분의 억양이 좀 개판이긴 하지만 그래도 작간데 뜻은 제대로 전달하고 계신 거 맞지?
“제 정신머리를 뜯어고치고, [빈센트 빌리어스> 같은 제대로 된 글만 쓰란 얘기를 하시려고······ 여기까지 오셨다구요?”
내가 멍하니 중얼거린 것을 콘래드가 곧장 러시아어로 통역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렇다!!>”
“그렇다고 하시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 그러니까······ 멋대로 내 소설에 기대했다가 멋대로 실망해 놓고서 멋대로 깽판을 놓고 있다고?
그 톨스토이가?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초현실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찔하다고 해야 하나,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상상 이상이라 도저히 한 단어로 정의할 수가 없다.
혹시 모르겠다. 별별 감정 표현이 다 있다는 독일어 사전이라도 확인해 봐야 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알겠는가?! 글이라는 건 말일세,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교훈의 역할을 해야 한단 말이지!! [빈센트 빌리어스>에는 그것이 있었어! 훌륭했단 말일세! 그런데 대체 그놈의 겉멋만 잔뜩 든 요술쟁이 글 쪼가리는 왜 쓴단 말인가!!>”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말씀을 좀 천천히······.>”
“[닥치고 통역이나 하게!! 아직 말 안 끝났어!!>”
“[끙, 예······.>”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침을 튀기며 무어라 설파하는 톨스토이와 툴툴거리는 조지프 콘래드를 보니 대충 짐작이 간다······ 대략 엄청나게 꼰대스러운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느껴진다. 꼰대는 꼰대 특유의 분위기가 있으니까.
저분도 저럴 짬밥이 아닌데 고생이 참 많네. 슬슬 [어둠의 심연>을 쓸 시기 아닌가?
아무튼.
“콘래드 씨.”
“어, 음. 말씀하시우.”
벨기에 콩고 학살 사건을 고발한 작가답게, 조지프 콘래드는 차별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하는 이야기를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수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시우.”
······지금 보아하니 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게 많은 건 내가 아니라 콘래드인 것 같은데.
아무튼.
“뭐, 많은 이야기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난 저 사람의 말을 단숨에 파훼할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차분하게 톨스토이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보자, 이 양반이 죽기 직전에 한 말이······ 그거였다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