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09)
자랑은 아니지만. 아니, 자랑은 맞나? 하여튼 난 고등학교 때 엄청난 도서실 죽돌이였다.
활자 중독 소리도 종종 들었지만, 솔직히 생각해 봐라. 벽걸이 에어컨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주는 곳은 학교 안에 그리 많지 않다.
선택지가 없었단 소리다.
아무튼 그렇게 적당히 친구들이랑 밥 먹고 나서 바로 그 위에 있던 도서실에서 책 읽고 뭉그적거리며 점심시간을 보내는 것이 미자 시절 진한솔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고전소설에 대한 지식은 그때 함양된 게 크다.
아서 코난 도일, 허버트 조지 웰스, 쥘 베른, 서머싯 몸, 그 외 다수의 다른 작가들······.
당연히 레프 톨스토이도 그 범주 안에 있었다. 그의 단편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읽었으니 우선순위도 당연히 높았지.
그러다 보니 일대기도 당연히 알게 됐다.
천재답게 기이한 최후도.
‘말년에 귀족 신분과 재산을 전부 버리고 농민이 되겠다고 하다가 아내랑 싸우고 가출해서 일주일 만에 객사? 뭐야 이게?’
솔직히 고등학생 때는 이해를 못 했다.
위대한 대문호의 최후라기엔 조금······ 뭐랄까, 흔하디흔한 술 먹은 가정폭력범이나 인성 파탄자의 최후 같지 않은가.
차라리 숙취로 화장실에 갔다가 변소에서 죽었다는 장군의 이야기가 더 그럴싸했다.
물론 머리가 굵어지고, 당시 제정 러시아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나름대로 이해는 하게 됐다.
남들은 혁명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힘들게 사는데, 자기는 귀족으로서 글 쓰고 다니는 게 양심상 찔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니만큼, 서민의 입신양명과 반기득권적인 [빈센트 빌리어스>에 감정이입하고, 귀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미화한 [던브링어>에 반감을 보이는 것까지도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긴, 한데······.
‘아니, 그래서 뭘 어쩌라고?’
솔직히 내가 알 바임?
뭐, 아프리카 난민들을 위해서 주인공이 배 터지게 폭식하는 장면은 넣으면 안 되고 그래야 하는 거야?
어차피 잘 먹고 잘사는 런던 시장을 기준으로 쓴 글이지, 이게 러시아에서 고생하는 농민들 보라고 쓴 글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했다간?
─갈!! 네가 인-터내쇼날을 모독하는가! 공산-마교가 네놈을 갈가리 찢으리라!!
─천마재림 만마앙복!
두렵다······ 역시 이래서 빨갱이가 안 되는 거고 러시아도 안 되는 거다. 당연히 시뻘건 러시아인은 더더욱 안 된다.
아무튼, 이런 꼰대는 상대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
바로.
“우선, 빈센트 빌리어스를 잘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
“[내가 잘 봐준 게 아니지. 그럴 만한 글이니까 그런 게요. 물론 필력은 좀 높여야겠지만.>”
“실례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직접 들어야 하는가?>”
“사람의 감상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태극권이지. 상대의 논리를 일단 전부 다 들어주기.
물론 콘래드 씨가 좀 고생하긴 해야겠지만.
예상대로 조지프 콘래드가 울상을 지었고, 나는 속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중에 추천사 하나 제대로 써 드릴게.
그리고 그사이, 톨스토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어느 부분이냐라······ 그야 역시 주인공이 올챙이 적 생각을 잃지 않는 점이겠지.>”
“올챙이요.”
“[그래. 입신양명한 뒤 자신의 과거를 잊는 추악한 자수성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톨스토이는 이를 갈며 말했다.
물론 나도 뭐, 자본주의 세계에서 소위 자수성가한 강도 귀족들의 개츠비짓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고 있긴 하다만, 그게 또 러시아 입장에서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예카테리나 2세.
한국인인 난 피상적으로밖에 몰랐지만, 그녀는 원래 세력이 한미한 독일 귀족의 여식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후진국이었다지만, 그 러시아 황실에서 보기에도 시골뜨기 소녀라고 깔보고 천시했을 정도로.
그래서 그녀가 반란을 일으켜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을 때, 그리고 ‘농노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농민은 거기에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결과는?
근대화에는 성공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가 구축한 제정 러시아는 귀족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 주었고, 농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거의 귀족들에게 예속된 노예 수준으로 전락했다.
“[뭣도 모르는 우리 러시아의 지식인이란 작자들은 그저 국가의 영광이니, 나폴레옹에게 이길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느니 하면서 그 암군을 명군이라 칭송하지. 하나 틀렸어! 그 마녀는 그저 나라를 봉건시대로 되돌렸을 뿐이야! 나라가 망한다 한들, 나라의 근본인 농노들이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서 빈센트 빌리어스를 좋아하시는 거군요.”
“[그의 개혁은 평민들에게 펼쳐질 수 있도록 유도했으니까.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며, 전쟁을 회피하여 귀족의 권력을 축소하면서도 부르주아를 견제할 수 있도록 규제와 복지, 그리고 노동조합의 지원을 이끌었지.>”
그야 뭐······ 내가 그 부르주아지들이 만든 신자유주의의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이니까.
딱히 내가 빨간 걸 찬양한다거나 그래서 그런 걸 쓴 건 아니다.
그저 어느 한쪽에 극도로 경도되면 그건 그거대로 괴물들만 남는단 얘기지.
─사기업은 자유시장 경제의 위험한 존재들이며 자유에 찬성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정부 개입을 원한다.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단, 게임의 룰을 지켜야 한다. 사기나 속임수 없이 자유 경쟁에 임하는 것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어머니인 밀턴 프리드먼도 이렇게 말할 정도다. 어쨌든 이 인간도 어지간한 자수성가자이긴 한데,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장착했었단 말이지.
아무튼.
“[반면 [던브링어>는 어떤가. 귀족의 의무니, 개인적인 복수니! 괴물을 잡을 힘이 있으면 제일 먼저 민중을 탄압하는 암군과 간신배의 무리부터 처리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말일세!!>”
“저, 그런 거 쓰면 잡혀갑니다······.”
“[원래 글쟁이란 그런 법이야!!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이 괜히 탄압받은 게 아니었단 말일세!!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를 봐! 그, 지가 미쳐 있어서 세상 모두가 미쳐 있었다고 믿었던 변절자 놈이 어떻게 뒈졌나?>”
으음······ 아주 막말을 하시네. 그러고 보니 도스토예프스키는 꽤 국수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했지.
톨스토이가 싫어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알겠나? 작가가 양심을 저버리면 그것은 작가라 할 수 없네! 그리고 그 양심은, 더 많은 이들이 주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아파하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농민들을 위한 글을 써야 한다는 거군요. 농민이 사회적 약자이고, 고통받고 있으니까.”
“[바로 그렇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것도 글을 쓰는 동기고 근력이지. 참여문학이 괜히 한때 문학의 주류였던 게 아니다.
톨스토이가 진심인 것도 알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농민이 사회적 약자를 벗어나려면 어찌해야겠습니까.”
“[······뭐라고?>”
“제가 원래 이스트엔드 출신의 변호사인 빈센트를 빌리어스 가의 막내 몸에 집어넣은 건, 변호사 빈센트가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정말 언더독, 빈센트의 사회개혁만을 다루고 싶었다면, 차라리 빈센트가 [몽테크리스토 백작>마냥 살아나는 글을 썼을 거다.
물에 빠져 죽는다고? 그런건 적당히 큰 상선 같은 것을 우연히 지나가게 해도 된다.
이는 원 세계에서 쓰이던 재벌물도 마찬가지다.
재벌 가문의 막내아들 몸에 빙의하여, 재벌의 중심으로 올라선다.
이런 내용이 주류가 된 이유는 단순히 당시 웹소설의 메타가 회·빙·환이어서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언더독의 업셋은 시스템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의 파괴라······.>”
“그리고, 그 시스템의 파괴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자가 나옵니다.”
나는 러시아 혁명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20세기까지도 전근대적 봉건제에 의지했던 러시아가 혁명에서 흘린 피는 지독하게도 많았고.
심지어 그 피를 먹고 솟아난 자, 레닌은 필연적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톨스토이, 그가 방금까지 역설하던 그 국가라는 체제의 절대화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이게 싫으면? 예카테리나 2세가 된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톨스토이의 설명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전근대적 봉건제로 회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시대에 아내가 남편을 몰아내고 황제가 된 혁명이다. 누가 그걸 좋아하겠나?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 줘야 했을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론 러시아를 봉건제로 돌려놓은 것이다.
즉, 언더독이 기득권을 차지하는 업셋의 결과는 결국 둘 중 하나다.
언더독이 기득권이 되거나.
기득권 모두를 갈아엎어 버리거나.
그리고 그 지독한 피 냄새는 결국 또 다른 기득권의 고착을 낳는다. 적백내전의 결과가 뭐였나? 결국 스탈린 아니었나?
그래서 결국, 찝찝한 핏빛 엔딩을 보는 것보단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지향해야 하는 웹소설에서는 기득권 내부에서의 개혁 쪽이 좀 더 현실적이며 대중적인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대중이었던 내 입장에서 중요한 건······ 결국 대화와 타협, 그러니까 정반합이다.
그 점에선 영국의 방향성이 느리지만 맞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권리장전.
권리청원.
그리고 차티스트 운동과 점진적인 선거권 확대, 마지막으로 세계 인권 선언까지.
아, 마지막은 미국이 중심이던가?
하여튼 이런 과정에 과정을 거친 끝에, 한국에서도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거니까.
“딱히 영국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영국이 근대화되는 과정엔······ 왕이 귀족의, 귀족이 부르주아의,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화와 타협의 과정이 있었죠.”
“[그렇다면.>”
톨스토이가 나를 불타는 눈으로 보았다.
“[희생을 만들지 않고 세상을 움직이려면, 기득권이 비기득권의 설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겐가?>”
“그리고 그 비기득권의 말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깨우친 기득권’이 있어야겠죠.”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걸 굳이 말로 하진 않았다.
톨스토이라는 천재라면, 이미 내가 말하지 않아도 대충 내 생각을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단순히 뒤엎기만 한다면 그 피해는 사회 전체로 퍼지고, 그러면 가장 사회적으로 약한 농민들이 피해를 입지. 차라리 기득권자들을 연착륙을 시키고 남겨 둘지언정,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다는 건가.>”
이 말은 콘래드 씨가 번역하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린 것일 뿐이니까.
다만, 뜻은 이해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남겨 둔 기득권이 다시금 탐욕을 부린다면? 그래서 권력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농단을 하다가, 그들 내부의 ‘대화하는 자’들을 죽여 버리고 불통(不通)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셈인가?>”
이렇게 묻는 걸 보면······.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 듣는 기득권’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한 톨스토이에게 말했다.
“혹시 동양 철학에 대해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동양에서 사도 바울쯤 되는 포지션에 있는 맹자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흐음. 어떤?>”
“사람이라면 누구든 네 가지 착한 선성, 그러니까 동정심[惻隱之心], 정의감[羞惡之心], 부끄러움[辭讓之心], 그리고 양심[是非之心]을 갖고 있다고요.”
“[만약에 없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죠.”
‘던브링어’가 쓰러트려야 할 괴물들처럼, 사람의 마음을 갖지 못한 괴물들이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톨스토이는 잠깐 멍하니 보았다.
“크, 크크크······ 하하하하하하!”
그러더니 그는 이내 껄껄 웃더니 무어라 말했다. 콘래드 씨는 그것을 이렇게 통역했다.
“······술 좋아하냐고 물어보시네.”
“어.”
뭐지?
분명 잘 끝난 거 같은데, 몸속의 간이 ‘돔황챠!!’라고 외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