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32)
헤르만 헤세.
아마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독일 작가 1순위일 그 작가.
중고등학교 때 한번쯤은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공부에 도움 되는 명언이라고 말이다. 니들도 새처럼 알을 깨고 나와서 투쟁하라고.
거기서 더 덕질을 하다 보면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라는 영지주의(gnosticism) 철학이 튀어나와서 사람 여럿 중2 병에 빠트리지.
나도 한때 재밌게 파고든 적이 있다.
아무튼, 헤르만 헤세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한국인에게 친숙한 작가이며, 나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도 재밌게 봤고······.그런데 그 헤르만 헤세가.
“감사합니다! 세상에, 제가 그 한슬로 진 작가님의 사인을 받다니!”
“에, 아뇨. 별거 아닙니다.”
내 팬인 대학생이라······ 서머싯 몸 때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아직 10대에서 20대밖에 안 된 시기라는 것은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이름이 주는 이미지라는 게 있다 보니 참.
“죄송합니다, 작가님······.”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나는 로웨나 양의 사과에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사실 내가 신비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딱히 정체가 밝혀지면 안 된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 여기는 해외니까 더 느슨해도 상관없을 거 같기도 하고.
왜냐고? 예를 들어서 독일에서 ‘한슬로 진이 동양인이다’라는 뉴스가 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걸, 과연 영국인들이 믿을까? 내가 보기엔 ‘저 웬수들이 또 헛소리하고 있네.’라면서 비웃음을 날릴 거 같은데? 거기다 ‘역시 썩은 양배추 먹는 새끼들이 다 그렇지 뭐’라는 말도 더해서.
이쯤 되면 나도 명예 영국 전문가 아닐까?
“뭐, 그래도 문제 생길 수 있으니 웬만하면 신문 제보는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 물론입니다! 죽을 때까지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아니, 그건 좀 심하고요.”
적당히 말이다 적당히.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흠, 그러면 입막음비를 드려야겠군요.”
“예?! 그럴 필요 없습······!”
“그거.”
나는 헤르만 헤세가 내밀었던 노트를 가리켰다.
사인해 주면서 보니까, 적어도 이거, 뭔가를 공부하는 것 같진 않더라고?
오히려.
“독일어라 잘은 모르겠지만, 글 쓰고 있는 거죠? 소설입니까?”
“시, 시입니다.”
“시라, 그렇군요.”
소설이 아니란 게 아쉽다. 근데 뭐, 이 시대가 소설가와 시인이 그렇게 딱딱 나뉘는 시대는 아니긴 하지.
“혹시 출판은 하셨습니까? 괜찮다면 구매해서 읽어 보고 싶군요.”
“제, 제 시집을요?!”
“예. 독일어는 못하지만 배워 보지요.”
“가, 감사합니다!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헤르만 헤세는 서점 안쪽으로 달려가, 시집 한 권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오, 고맙습니다.”
내친김에 헤르만 헤세의 사인까지 받았다.
흐음, [낭만의 노래(Das Lied der Romantik)>라······ 여러모로 초짜 시인이 자기 첫 시집에 붙일만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씨익 웃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겉으로는 담담함을 연기하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크으, 참을 수 없군.
그 헤르만 헤세가 풋풋한 시절에 낸 초판본이라고?
유명해진 다음의 재판본이나 재록본을 구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전의 것은 어마무시하게 어렵지. 괜히 초판본 가치가 천정부지로 날뛰는 게 아니다.
나중에 돌아가서 찬찬히 씹고 뜯고 맛봐야지.
“정말 감사합니다. 무명 후배인 제 시집에 그렇게까지 만족하시다니······!”
“사람은 누구나 무명일 때가 있는 법이죠. 작품은 못 봤지만, 헤르만 씨에게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엿보이는군요.”
“저,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하하.”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것이니만큼 꿀릴 게 하나도 없는, 청명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말을 들은 헤르만 헤세는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쓴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흐음, 이런 표정 익숙한데.
“감사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글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야.
그 헤르만 헤세가 글을 접어?! 왜?! 설마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아니, 뭔가 걸리는 게 있다.
아까 보였던 그 표정. 그건 예전 현실 작가 모임에서도 종종 보였던 특유의······.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난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부모님 관련입니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나, 또 인가······ 나는 깊은 한숨을 탁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긴 하다.
예체능 업계에서 넷 중 셋은 반드시 저런 표정을 보이더라고. 나도 데뷔 전엔 그랬고.
하는 수 없지. 아무튼 한번 이야기라도 들어 볼까?
이런 방면으론 나름 선배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실례지만 어느 쪽이십니까? 어머님, 아버님? 아니면 두 분 다?”
“어, 어머니이십니다. 제 글이 너무 세속적이고, 심지어 죄악적이라 하시면서, 글 같은 건 때려치우고 선교사나 아니면 음악가를 하라고······.”
“헤르만 군은 어떻습니까. 그러고 싶습니까?”
“저도 신학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야 그렇겠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에 내포된 강렬한 영지주의 철학만 봐도 알 수 있듯, 헤르만 헤세는 굉장한 종교 덕후였다.심지어 그게 기독교 같은 유대교 계통뿐만이 아니라, 불교, 도교, 유교 등 동양 철학 전반에도 뻗어 있었고.
그게 괜히 나온 건 아니란 얘기지.
신학이 부전공이니까 그런 폭넓은 자료 조사를 하고 기반 지식을 쌓은 뒤, 글로 표출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전 선교사를 하기엔······ 기독교만이 정답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엔 너무나 파렴치하지 않겠습니까.”
“예, 이해합니다.”
뭐, 난 딱히 신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암튼 그렇다니 그렇겠지.
게다가 이런 윤리는, 감정에 가까운 부분이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답을 구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일종의 공감과 이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 정도일 뿐.
그리고 그런 기대대로, 헤르만 헤세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작가님도 아시는군요! 아니, 그리고 솔직히 말해 제 글이 그렇게 끔찍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름 아들이 고심해서 쓴 시인데!”
“뭐, 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헤르만 씨의 성품을 보면, 절대 그런 불순한 글을 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아아······ 감사합니다! 역시 작가님이시군요!!”
난 그렇게 잠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마치 성당 참회실에서 신자의 말을 듣는 것처럼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개인적으로도 알고 있던 인물인 만큼 그의 개인 이야기는 나름 흥미를 돋우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글을 못 관둘 거라면 집을 나올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이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입니까?”
“그렇습니다. 전 글을 쓰고 싶으니까요. 설사 다시는 어머님을 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안 됩니다.”
놀랍게도, 마지막 말을 한 건 내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끼어 들은 로웨나 로스차일드의 말에 나와 헤르만은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모기 기어가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계속 얘기하시죠.”
“그러고 보니 작가님, 부인이십니까?”
헤르만 헤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에헤이, 이 사람이 어딜 감히 처녀 혼삿길을 막으려고.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만든 재단에서 회계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서라고 봐 주셔도 좋겠군요.”
“아, 아하······.”
“다만, 크흠! 저도 이건 로웨나 양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군요.”
나는 최대한 평상심을 되찾아 말했다.
“물론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무조건 화목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상성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쪽 업계엔 그런 게 참 많지.
글이라는 게 정말 돈 벌기 빡센 직업인 반면, 한국은 자식의 성공에 집착하는 부모가 비정상적으로 많은 나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감정적으로 끊어내기보다 이성적으로 모든 감가상각을 다 따져본 다음에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가, 감가상각이요.”
“결국 이게 다 먹고 사는 문제니까요.‘
이 시기, 독일의 분위기는 보고 있자면 제법 기시감이 느껴진다.
경직된 사회, 팍팍한 삶, 엄한 부모······.
뭔가 연상되지 않나?
그렇다. 무식한 돌대가리 군바리들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 그 원류가 바로 여기다.
난 헤르만 헤세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모른다. 대충 이야기를 통해 어림짐작할 뿐.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쓰레기인지. 아니면 그저 평생 그리 살아왔기에 표현이 서툰 당신이신지.
그렇기에 답을 내려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섣부르게 판단한 결과, 후회한 사람들도 많이 봐 왔기에 이것만은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다 따진 결과,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얼마든지 도망쳐도 됩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무조건 맞서 싸우라는 식으로 왜곡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원래 뜻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를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스스로가 충분히 생각하고, 도망치기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그것 또한 훌륭한 의지다.
오히려 도망치지도 못한 채 내몰린 곳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지옥이다.
마치 헤르만 헤세, 그의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에서의 주인공인 한스처럼.
“······.”
단지 아직 대작가가 되지 못한 그가,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 놓길 바라면서.
예술은 고통에서 나온다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헤르만 헤세는 난처하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기까지면 족하겠지. 더 이상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참견이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아무튼 중요한 것은 너무 극단적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해 보고 안 되면 필요할 땐 도망도 쳐야지요.”
그런 말을 하며, 나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역시 글쟁이라 그런가, 어깨가 딴딴하네.
“아무튼 저는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뭐 하면 런던으로 오겠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요. 주소 적어드리겠습니다.”
“그, 그렇게까지는 안 해 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듯, 헤세는 한결 풀어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억지로 그의 노트에 런던의 집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지겠지. 여차하면 내가 도와주면 될 뿐이다.
===
신기한 사람이다.
두 사람이 떠나간 이후, 헤르만 헤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은 결국 어중간함 그 자체였다.
명확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원론적인 말로 답없이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판단을 오롯이 헤르만 자신에게 맡기긴 했지만, 적어도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그 내용은 분명, 왠지 모를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요란스러웠던 걸까.
제아무리 존경하는 작가였다 해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다니.
그래서 왠지 모를 시원함을 느끼긴 했다.
“이런 건─ 오랜만이네.”
정말 오랜만에, 가벼운 기분이었다. 마치 마음속에 들고 있던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것처럼.
그 돌덩이를 내려놓은 손에 펜을 들어올리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산보를 나가는 듯.
청년 헤르만 헤세는 천천히 노트 위에서 펜을 놀렸다.
***
“저는 고아였습니다.”
“아, 예······ 그래서.”
“네, 그래서 좀······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뭔가 탈룰라스러운 말이지만 딱히 그런 내용은 아니다. 아까 급발진했던 로웨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의 조카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실제로 피는 이어져 있진 않습니다. 단지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대인 고아원에서 자라, 재능을 인정받고 입양되었을 뿐입니다.”
고아들을 모아놓고 재능있는 사람을 골라, 방계로 입양해서 가문의 힘을 키우는 방식이라······ 뭔가 대단히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방식이다.
현실보단, 무협에서 말이지.
사천당가의 당가타 같은 느낌이랄까.
핏줄에 연연하지 않고 수단을 보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대단하네.
이게 천하제일상가(天下第一商家)의 위엄인가.
“그럼 재능을 보이지 못한 아이들은요?”
“하인이나 은행 직원으로, 자립할 수는 있는 수준으로 채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흐음. 확실히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라면 충성심도 높을 거고. 마냥 버리긴 아깝겠지.
“그러고 보니 페르디난드 님의 하인 중에 사무엘이란 친구가 있는데요.”
“예. 아마 저와 비슷할 겁니다. 다만 나이가 있다면, 이미 재능을 다 드러낸 셈이니 방계로 편입되긴 어려울 겁니다.”
흐음.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선 실적을 올리려 했던 거였구먼.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까지 그만한 실적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좋아, 다음에 만나면 ‘뭐지? 승급하지 못한 자여?’하면서 놀려줘야겠다.
아무튼.
“힘드셨겠군요.”
“양부모님도 결코 저를 학대하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으로서의 정을 주고 받은 적은 없지요.”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막노동자였고.
땔감 하나 없어서 얼어죽었다 하더라도.
때로는, 그 친부모가 사무치게 그리울 수밖에 없다.
로웨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예, 그래서 무심코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시간 속에서 표류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향수병에 돌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난 나름대로 자리를 찾았지만, 로웨나는······ 아마 평생, 로스차일드에 정착하기 힘들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평소 냉정하여 든든했던 그녀가 오늘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혀를 달싹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로하려던 그 찰나.
“작가님!! 결국 독일에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슈트라우스 씨.”
“예! 영원한 작가님의 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입니다!”
뒈져, 이 눈치 없는 인간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