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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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나들이(1)
예전, 이라고 하면 말이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내가 왔던 미래에서의 런던은 그다지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무능한 보수파 정부가 또 뻘짓을 했고, 브렉시트의 여파로 도시 자체가 죽어 가고 있었다. 서민들이 생존의 문제로 시위를 했고, 인종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무엇보다, 와이파이나 3G가 너무 느려 터졌다. 한국인으로서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지, 암.
그렇다면 1890년대 초. 대영제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중심이었던 시기의 런던은 과연 어떠한가.
“우웨에에에엑.”
어떻긴, 뭐가 어때. 150년 전이니 150년만큼 더 후지지.
거 왜, 인터넷 돌아다니다 보면 ‘대동여지도 그려질 시기에 런던은 세계 최초의 지하철을~’ 운운하는 원충생물들이 출몰하지 않는가?
그 새끼들을 데려다가 저, 세계 최초의 지하철에 앉혀 버리고 싶다.
냄새는 구리지, 흔들리기는 어마어마하게 덜컹거리지, 에어컨이 있는 시대도 아니니까 굉장히 덥고 꿉꿉하지······ 심지어 노선 중 절반은 증기 기관차다!
이 미친 영길리 새끼들은 ‘지하’에서 증기 기관을 돌린다고! 그 시커먼 연기 풀풀 나는걸!
“아이고, 작가님! 괜찮으십니까!?”
“자네, 괜찮나? 그러니까 마차를 타지, 왜 굳이 서민들이나 타는 지하철 따위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아니, 이런 거라고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나는 울상을 지었지만,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웨엑─.
여기서 원시적인 형태의 승강기를 타고 런던의 거리로 나서자, 다음은 안개의 나라였다.
스모그 천지라고!
아오, 제기랄. 숨이 턱턱 막히네, 이놈의 매연.
이 시대를 묘사할 때 흔히 나오는 표현 중에 콩 수프 안개(Pea soup fog)라는 표현이 있다.
누리끼리한 안개가 끈적거리는 게 마치 걸쭉한 수프 같다는 얘기다.
어우, 독해.
자연스럽게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게 된다.
이래서 영국인들이 손수건을 꼭 들고 다니는 거였구만. 지들도 이 스모그는 못 견디는 거다.
“자네, 괜찮나?”
“안 갠차나요.”
“저런······ 코가 좀 약하신 모양이군요, 작가님.”
이 스모그에 강한 인간이 있으면 그게 더 신기한데?
그렇게 쏘아붙이려던 나는 놀랍게도 이 안개 속에서도 활짝 웃으며 뛰어다니고 노는 아이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세상에,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이런 매연 속에서도 저렇게 화창하게 웃고 다닐 수 있을 줄이야.
그래, 이겼다. 느그들 영길리가 짱 먹어라.
그런데, 저 애들이 노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끝이다, 지옥왕(hell-king) 알비스!!”
“용기는 가상하구나, 피터! 울어라! 지옥의 검, 잉걸한(Inferno-mourne)!!”
“내가 바로 최강의 드워프 레슬러다! 자신 있는 놈만 덤벼라!”
“요정 숲을 위하여!!”
저게 도대체 뭐야.
나는 뛰어다니며 칼싸움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하는 익숙한 대사와 고유명사를 들으며 머리를 감싸 쥐어야 했다.
참고로 알비스는 [피터 페리> 시리즈의 1권 보스다.
원래는 드워프의 왕족이었으나, 갱도를 너무 깊게 파고들어 지옥불 화산을 깨우고 타락하여 지옥의 요정왕이 된 인물.
그리고 드워프 레슬링은 땅딸막한 드워프의 체형이 고려되어 서로의 바지춤을 잡고 선 뒤, 먼저 넘어트리는 사람이 승리하는 가상의 유술(柔術)······ 이 아니다. 한반도 전통 민속놀이, 씨름 맞다.
뭐 어때, 설정하기 편하고 좋잖아?
원래는 집에서나 읽을 내수용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대충대충 짠 설정인데······ 지금 바꾸기엔 늦었지.
아무튼 그런 식으로, 각자 서로의 역할을 정해 ‘피터 페리 놀이’를 하는 애들을 런던 길바닥이나 공원 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참으로 흐뭇한 모습 아닙니까, 작가님?”
아뇨. 그냥 쥐구멍에 숨고 싶어지는데요.
물론 나도 저렇게 열성적인 독자님들을 보면 감사하고 기쁘다.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내가 쓴 대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입 밖으로 읊고 있으면 당연히 오그라들지!
난 웹소설 작가지 드라마 작가가 아니란 말이다! 아이고, 내 손발이야.
“빨리, 빨리 좀 가죠.”
“알겠네, 알겠어.”
하지만 나는 그게 내 발목을 잡는 일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벤틀리 출판사가 있는 채링 크로스 로드(Charing Cross Road)는 21세기에 헌책방 거리로 유명했다.
그런데 150년 전의 지금은? 그래, 그냥 서점가(書店街)다.
그래서.
“[템플 바>! 이번 달 [템플 바>가 입고되었습니다!”
“다 비켜!!”
“시꺼, 이쪽은 어제부터 기다렸다고!”
“[피터 페리와 요정의 숲> 9쇄 본 들어갑니다!”
“다섯 권 주시오!! 이번에 친척들 보내 주기로 했단 말이야!!”
채링 크로스 로드의 거리를 빼곡히 메운 서점마다 [피터 페리>, 혹은 그것이 연재되는 [템플 바>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로 줄이 지어 있었다.
심지어 나랑 정식 계약한 뒤에야 팔리기 시작했다는 단행본이 벌써 9쇄다. 물량이 벌써 8번은 동이 났단 뜻이다.
와,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국에서도 단행본은 팔았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말이지.
“자네, 들었나? 패트릭이 결국 레이먼드랑 결투했다더군.”
“결국?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어쭙잖게 소꿉친구랑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놈은 안 된다니까.”
그런 내 귓가에 근처의 카페에서 신사 둘이 고상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뭔 얘긴가 했더니만, 그게.
“그렇지. 역시 최종적으로 피터와 결혼하는 건 이루릴 아니겠나?”
“아니아니, 무슨 소린가. 자네는 님프의 여왕인 마브의 고귀함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나? 이루릴이 박복하여 가련한 느낌은 있으나, 역시 영웅은 고귀한 이와 맺어져야 하는 법일세.”
“허허, 자네가 이렇게까지 수준이 낮을 줄은 몰랐군. 그러면 요정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함께한 인연을 버려야 한단 얘긴가?”
“호도하지 말게. 우정은 우정이고 사랑은 사랑이지.”
“허허허허.”
“하하하하.”
“뽑아, 이 자식아!”
“좋아, 결판을 내자!!”
취소. 고상하게는 개뿔, 말투만 기품 넘친다 뿐이지 그냥 오타쿠들이었잖아?
생각해 보니 영국은 신사의 나라 이전에 훌리건 창궐지였지, 축구만 야구로 바꾸면 나라 전체가 마산 아재들 같은 곳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쯔쯧, 저런 몰지각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 모습을 본 우리 집주인님, 밀러 씨의 말이었다.
오오, 역시 밀러 씨. 영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미국 출신이라 그런지 저런 해적 훌리건은 아니구나!
“맺어진다면 당연히 의붓여동생인 포샤가 아니겠는가? 비록 등장은 거의 없다지만, 나는 포샤를 숲에 초대하는 피터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네. 아! 이건 절대 강요하는 것은 아닐세, 핸슬.”
“아, 예······.”
그런 취향이셨나······ 나는 주책맞은 아재를 잠시 짜게 식은 눈으로 보았다.
그러고 보니 클라라 부인이 원래 밀러 씨네 집의 양녀였다던가? 그 전엔 피가 섞이진 않은 외사촌 동생이었고.
그러다가 눈이 맞아서 결혼에 골인했으니, 밀러 씨로서는 자기랑 비슷한 상황에 은근히 감정 이입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것은 그의 명예를 위해 묻어 두기로 했다.
“자자, 들어가시지요! 저희 회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예.”
그사이 벤틀리 주니어의 안내를 받아, 나와 밀러 씨는 [리처드 벤틀리와 아들> 출판사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신축인 건지 생각보다 꽤 넓었다.
기자재나 책상 같은 게 얼마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휴일이라서인지 직원도 거의 없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와 밀러 씨에게, 리처드 벤틀리 주니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이사해서, 아직은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이사요?”
“작가님 덕분이지요. 저희는 한때 정말 런던 최고라고 할 만한 출판사였습니다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좀, 여러 가지로 어려워져서······.”
“흐음.”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지.
대중의 취향에 따라 급변하는 이쪽 업계는 더더욱 그렇다.
어렸을 때만 해도 히어로의 대명사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이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마블이 더 커 버렸잖아?
하지만 리처드 벤틀리 주니어는 개의치 않는다면서 기운차게 말했다.
“그래도 작가님 덕분에 이렇게 훌륭하게 다시 성공했으니, 물 들어올 때 제대로 노를 저어 볼까 합니다!”
“어떻게요?”
“저희처럼 연식 쌓인 출판사의 장점이 이겁니다.”
그렇게 말한 벤틀리는 출판사 건물의 어느 방 한편으로 안내했다.
웹소설 시대에 전부 인터넷으로 해결되다 보니 나도 출판사에 자주 들어가 보진 못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상이, 진짜 책 하나는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전자화되지 않은 시대의 출판사는 더했다.
책이 되지 않았든, 책이 되었든 하여튼 원고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저희 출판사에서 출판해 왔던 책들입니다.”
“호오.”
나는 책으로 나온 원고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찰스 디킨스의 저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러고 보니 그 양반, 이 출판사에서 편집자 일을 했다고 했던가.
그것도 무려 초판본이다! 군침 도네, 진짜.
그 모습을 본 리처드 벤틀리 주니어는 싱글거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희는 이번에 그간 저희 출판사를 사랑해 주신 분들을 위해, 저희 출판사가 배출한 베스트셀러, 명저, 걸작 같은 것들을 모아 특별 양장 전집을 내려 합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원고를 재발굴하는 기회도 될 거고, 출판사의 명성을 다시 알리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기획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플랫폼에서 종종 하는 작가전이나 장르별로 추천작을 모아서 광고하는, 그런 프로모션 이벤트를 하려는 건가 보다.
확실히 나도 그런 이벤트 자주 들어갔지. 웹소설은 일단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인지되는 게 최고의 마케팅이라, 적극적으로 들어갔다.
원래 밑밥을 뿌려야 고기가 몰리는 법이고, 마중물을 넣어야 펌프가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라고.
그렇게 그의 말을 경청하던 나는 구석에 쌓여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탑처럼 쌓여 있는 더미들.
“그럼 저것들은 뭔가요?”
[올리버 트위스트>의 초판본을 잠시 빼둔 나는 따로 쌓여 있던 원고들로 다가갔다.이에 벤틀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건 아직 출판한 물건들은 아닙니다. 투고로 온 소설들이지요.”
“아, 투고요?”
“예. 보통은 이렇게 진행되곤 하지요. 하하, 하지만 지금은 이사하기도 바쁘다 보니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뭐, 그럴 수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원고 뭉치를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언어는 다르지만, 이러고 있자니 어째······ 많이 그리워진다.
사실 나도 웹소설 작가이긴 했지만, 그 전엔 투고도 보냈거든.
미숙하기 그지없는 글자 뭉치를 이런저런 곳에 보내곤 했었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더는 느낄 수 없던 그런 감성을 여기서 느끼게 될 줄이야.
그런 생각으로 천천히 원고들을 훑어보았다.
어라? 이건?
“뭐, 어차피 대부분은 미숙한 활자 조합물이긴 합니다. 작가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정도는 아닐 겁니다.”
“흠······ 그런 것만 있는 건 또 아닌 모양인데요.”
“예?”
나는 원고 더미에서 익숙하면서 익숙치 않은 단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들어 올렸다.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짧고 굵은, 절대 안 팔릴 거 같은 단순하고 투박한 제목.
하지만 거기 쓰인 저자명은 그렇지 않았다.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현대 공상과학 문학의 개파조사이자, 지금은 한낱 20대 후반 전직 교사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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