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75)
─한슬, 또 일하고 왔지!?
─아뇨, 이게 나름 또 인맥을 쌓는 중요한······ 악!
─사람이 쉬라면 좀 쉬란 말이야······!
참으로 정겨운 대화다.
구스타프 에펠은 멀어지는 밀러 삼 남매와 한슬로 진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대화가 정말 주인집 맏딸과 그 주인집에 고용된 동양인 하인의 대화란 말인가? 차라리 철없는 삼촌과 다부진 조카에 가까울 텐데.
치익-.
에펠은 시가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피터 페리>. [빈센트 빌리어스>. [던브링어>.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여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소설들이 내포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함의(含意)는 프랑스인인 그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인종 평등.
계급 평등.
그리고······ 박애주의.
“이래 놓고 계몽사상가가 아니라고?”
음흉한 건지, 아니면 겸손한 건지.
에펠은 피식 웃으면서 한슬로 진의 천연덕스러웠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대의, ‘자유-평등-박애’가 인류의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유럽만 해도 아직도 제대로 된 공화국은 스위스와 프랑스, 이 두 곳을 제외하곤 없잖은가.
이런 상황에서 천민이 귀족의 몸을 강탈하는 소설을 써놓고 ‘대중의 옆에서~’라니.
‘그런 눈을 하고서.’
한슬로 진이 에펠의 눈을 보았듯, 에펠 역시 그 동양인의 눈을 보았다.
올곧고, 똑바르다. 자신감은 없어 보이는 주제에 자신이 보는, 자신이 믿는 미래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그 눈이 대체 어딜 봐서 선구자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인지 원.
‘영국이 변하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옆 나라의 약진은 이곳에서도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살짝 떨어져 있기에 더 체감됐던 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미개’라는 말이 어울릴 문화 소국이었는데 요즘 벌어지는 방향은 작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점차 경제, 학문에까지 뻗어가는 게 마치 눈에 보일 정도다.
미래를 바라보는 부르주아이자 건축가며 예술가인 이는 그리 생각하였다.
‘아무튼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뜻하지 않게 본인을 만난 덕에 확신이 들었다. 프랑스도 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전 세계의 예술과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에 속한 자로서, 무언가를 깨달은 선구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소리 높여 자신의 가정부를 불렀다.
“앙리에타! 아직 있는가? 전보 좀 붙여 주게.”
“예, 주인님. 어디로 부칠까요?”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로.”
잠시 생각했던 그는, 이윽고 말했다.
“그리고, 아미앵(Amiens)의 쥘에게도 연락을 넣어 주게.”
문득 에펠은 궁금했다.
고대하던 후배를 먼저 만났다는 걸 안다면, 그 쥘이 얼마나 샘이 날까.
“아.”
그리고 보니 제 이야기만 하느라 드워프식 지하 천년 탑은 어떻게 떠올렸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군.
그의 작품에서 나온 건축물이 주는 여러 영감도 있었거늘, 너무 찰지게 들어 주다 보니 말이 자꾸만 나온단 말이야.
“이거 참, 나중에 다시 자리를 잡아 봐야겠군.”
구스타프 에펠은 못내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
파리, 18지구 몽마르트(Montmartre) 거리.
“자, 오늘도 수고했다.”
“수고하셨슴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공방의 주인, 알폰스 무하는 침울하게 답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본 도제(徒弟)들은 뭔 일 있었나 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제 겨우 6개월 치 제자들이 뭔가 말을 하기엔 그 위치가 애매했다.
게다가, 대신 말해 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빠, 무슨 문제 있어?”
“어, 음. 아델라.”
공방의 모델 겸, 매니저 역할도 하고 있는 여동생의 물음에 무하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아냐. 아무것도.”
‘아, 진짜······!’
아델라는 확 저 주둥아리를 강제로 열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예전처럼 가난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1년 전, 1894년 크리스마스.
우연히 휴가 간 친구 대신 인쇄소를 봐 주고 있던 무하가 우연히 잡아 온 연극, ‘지스몬다’ 광고 포스터 의뢰.
정말 별것 없는 평범한 일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연극이 보통 연극이 아니었다는 점.
그것은 현 프랑스 연극계의 정점, ‘여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배우 겸 감독인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가 직접 제작, 출연하는 것이었고.
이때 무하가 그린 포스터를 보고 흘러 들어온 사람이 많았던 터라, 엄청난 호평과 함께 흥행의 1등 공신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느 삽화가 왈, ‘이 포스터는 하룻밤 사이에 파리의 모든 시민이 무하의 이름에 친숙해지게 만들었다.’라고 했으니, 그 말은 결코 자만이나 거짓이 아닌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리하여 요 반년 사이, 무하는 파리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상업 화가가 되었다.
완전히 단골이 된 사라 베르나르와의 6년 계약은 물론, 여러 부르주아와 셀럽들의 그림 의뢰는 물론이고, 이제는 장신구 제작 의뢰까지······ 순식간에 그야말로 혼자 감당하기 힘든, 몽마르트 거리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공방이 된 거다.
넘쳐 나는 작업량에 알폰스 무하 본인만으론 답이 없어 도제들도 고용하고 공방도 더욱 커졌다.
하나, 그럼에도 최근 몇 주 사이 공방의 주인이자 간판인 알폰스 무하의 얼굴에는 그늘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동생인 아델라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쏘아붙이듯 말하였다.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사람이라도 좀 더 뽑아. 지금 하고 있는 셋만으론 주문량 못 따라가는 거 알지?”
“······어떻게 그러겠냐. 내가 쟤들 미래를 어떻게 책임지라고.”
“응? 뭐라고?”
아델라는 고개를 돌렸다. 알폰스가 무언가 말하긴 했으나, 너무 작은 목소리라 들리지 않았던 거다.
알폰스는 잠시 또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심한 듯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랑감이라도 좀 데려······ 커헉!!”
“오빠가 일을 줄여 줘야 내가 신랑감을 데려오지, 이 화상아!!”
아델라가 알폰스의 얼굴에 시원한 스트레이트를 갈긴 그때였다. 그들의 앞에 익숙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흠. 알폰스 군······ 괜찮은가?”
“······지배인님?”
알폰스 무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그와 계약했던 사라 베르나르, 그녀가 소유한 극장의 지배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거······ 괜찮은 거 맞나?”
“아, 예. 괜찮습니다. 평범한 일입니다.”
그사이 아델라 무하는 코웃음을 치며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둘이 남은 알폰스는 지배인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저런 애가 아닌데.”
“아, 아닐세. 중요한 일은 아니니. 그보다 알폰스, 일이 급해. [지스몬다>의 공연이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급하게 잡혔어.”
“미국이요?”
“그래! 이번엔 아주 크게 할 예정일세. 거기에 파리 최고의 솜씨를 가진 자네의 포스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야, 뭐······ 그렇긴 합니다만.”
무하는 난처하다는 듯 말을 끌었다.
아델라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상황이 급하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제일 공들여 준비 중인 [춘희(La Dame aux Camélias)>의 포스터조차 아직 진행 중이 아닌가.
그런데.
“기왕 하는 거, 제대로 보여 주기 바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미국 인구가 제법 되지 않은가? 뉴욕, 필라델피아······ 각각의 도시마다 그 도시에 맞는 포스터를 그려서, 쫙 펼쳐 주면 바랄 게 없겠는데 말이야!”
“······그러면 작업량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일정이 빠듯합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람 더 뽑으면 되잖아!”
지배인은 알폰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성공에 대한 질척질척한 열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이 알폰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하네. 자네가 최고 아닌가!”
“······그게.”
“설마, 못하겠다고 하진 않겠지?”
지배인의 눈이 희번덕였다. 알폰스는 자칫 살기까지 엿보이는 그 눈에 무심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 대배우님, 사라 베르나르 여사께서 자네에게 베푼 은혜가 얼만데!! 여사님께서, 응? 자네 진가를 알아보고 6년 계약을 하지 않았으면 자네 같은 무명 화가가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무명이라는 거야, 최고란 거야? 알폰스 무하가 조금만 더 기가 셌다면 그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도저히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지배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압박을 줄 수 있었던 것이고.
“자, 고개를 끄덕이게! 그리고 포스터를 그려 와!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네. 그러기만 하면 돼! 알겠나?”
뒤로 점점 밀려나던 알폰스가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였다.
“어라, 밀러 씨. 선객이 있는데요?”
묘하게 어린, 영국 어투가 물씬 드러나는 프랑스어였다.
알폰스와 지배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전형적인 섬나라 양치······ 아니 영국풍의 신사와 그 하인으로 보이는 동양인이 공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인상이다.
지배인은 서둘러 알폰스의 어깨를 놓아 주고, 헛기침하며 신사 앞으로 다가갔다.
“흠흠, 뉘시오? 지금 이 공방은 문을 닫았소. 의뢰를 알 거라면 내일 다시 와 주셔야 할 텐데.”
“의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매입을 하러 왔소. 영국의 밀러 상회라 하오.”
“밀러······!?”
그 이름값에 먼저 놀란 것은 지배인보다 알폰스 쪽이었다.
밀러 상회.
그 이름을 모르면 최근 유럽 회화계에서 간첩이나 다름없었다.
관전에 입선했으나 흔하디흔한 화가 정도로 인식되었던 폴 세잔, 완전히 무명이나 다름없던 빈센트 반 고흐, 일개 학생에 불과했던 에드바르트 뭉크를 선점해서 알게 모르게 미술계에서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그곳!
그렇게 행하는 실적에 비해 규모가 크지도 않는, 미스테리한 분위기. 합쳐져서 그들의 이야기는 사교회, 술자리를 가리지 않고 나올 정도였다.
무하 본인 역시 무명 시절,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나오는 소리 중 하나가 갑자기 밀러 상단에서 자신의 그림을 사가면 좋겠다는 말이었으니.
최근은 조용해졌다고는 하지만, 몽마르트에서는 여전히 ‘밀러가 손대면 흥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런 태풍의 눈이나 다름없는 회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대체 왜 여기에?
알폰스가 그리 의아해하던 찰나, 그런 사실을 잘 모르는 지배인은 한껏 불쾌한 얼굴로 ‘그게 어디 촌구석의 상회지?’라며 낮게 지껄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매매든 뭐든 내일 오란 말이오. 이쪽은 지금 중요한 계약을······.”
“구스타프 에펠 씨의 소개로 왔습니다만. 혹시 그보다 중요한 일입니까?”
동양인 하인이 품에서 에펠의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밀러는 몰라도 에펠은 알 수밖에 없었던 지배인은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으나, 결국 홱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빨리 끝내시오. 이쪽도 바쁘니까.”
“뭐, 그러죠.”
묘한 주종이었다. 알폰스 무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주인은 뒤쪽의 영국인 상인일 텐데, 어째서 대화는 하인일 동양인 남자가 주도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그리고 그 의문은, 알폰스의 앞으로 온 동양인이 에펠의 명함과 함께 내뱉은 한마디로 순식간에 납득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폰스 무하 씨. 전 진한솔. 음, 이쪽이 더 익숙하겠군요. 필명은 한슬로 진이라고 합니다.”
“······한슬로?!”
알폰스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최근 영국으로 시작해 북미는 물론, 유럽까지도 휩쓸고 있는 작가의 이름이 아닌가?
기본적으로 영국을 얕보는 프랑스인들의 입에서 ‘크흠, 나쁘지 않군.’이라는 소리가 나온 시점에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동명 이인일 가능성은······!’
없겠지.
알폰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물론 그런 인기 작가가 동양인에 불과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냥 단순히 같은 이름의 동양인이라면 ‘그’ 구스타프 에펠의 명함을 받을 수 없었을 테니.
알폰스 무하는 지배인의 눈앞이라는 것도 잊고, 한슬로 진의 손을 붙잡았다.
“쳐, 처음 뵙겠습니다! 늘 재밌게 보고 있었습니다!”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니,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저도 무명일 적, 꼭 그 일러스트레이션(삽화)를 직접 한번 맡아 보고 싶었습니다!”
“오호, 그래요?”
그 순간, 한슬로 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요! 그 탐미적인 요정국의 묘사를 보며 항상 감탄했습니다!”
“좋네요. 그럼,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말에, 한슬로 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이번부터 단행본에서 삽화를 대대적으로 늘려 보려고 합니다. 알폰스 무하 작가님. 제 삽화가가 되어 보시겠습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