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94)
사실, 이래 봬도 제법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하고 왔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벤틀리 씨가 아주 그냥 신신당부했거든. 나도 그가 대충 뻐킹 레이시스트 새끼라는 건 진작 알고 있으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잘근잘근 부술 생각이었다.
일단 써야 할 땐 쓴다 하더라도, 저주 걸린 장비는 초기화하고 +14강을 해야 써먹을 거 아닌가. 그래서 만전의 태세에 임하며 만남을 준비했다.
때문에, 만나자마자 업무 모드에 들어가 평소보다 좀 딱딱하게 대한 느낌이 좀······ 있긴 한데.
“오오, 신이시여······!”
“아니, 진정 좀 하세요.”
“어떻게 진정하란 말씀이십니까!! 저는 지금, 신의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아니, 신은 무슨 놈의 신이야.
물론 내가 시간 표류자가 되었으니,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신이라니······ 난 그냥 평범한 미래인 웹소설 작가에 불과하다고. 그것도 당신 후배인! 뭐 직계는 아니라지만.
아무튼······ 일단 저 약쟁이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겠네.
“아아, 제가 어렸을 때 사실 당신을 만났음에도 여태까지 기억조차 못 한다니, 이리 불경할 데가 있나! 진심으로 반······.”
이 인간, 이젠 내 얘기조차 안 듣고 어렸을 때 자기가 힘들 때 어땠냐느니 간증 비스무리한 망상을 늘어트리고 있다.
아니, 내가 사업 얘기를 하러 왔지, 고해성사나 들으러 왔냐고.
결국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벤틀리 씨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벤틀리 씨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쇄애애액!
적당히, 속이 빈 나무막대로 그 뒤통수를 따악! 소리가 나게 쳤다.
그러자.
“······고로로롱.”
풀썩, 하고 조지 웰스가 쓰러졌다.
다행히 죽진 않았다. 그냥 정신을 잃은 것뿐.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와 벤틀리 씨는 서로를 보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아편은 두지 않은 거죠?”
“아, 안 뒀습니다! 펴도 살롱에 가서 피지, 신성한 일터에서는······.”
······피긴 한단 소리잖아.
***
잠시 후.
“자, 진정됐죠?”
“예, 예. 죄송합니다. 구······.”
“크흠.”
“······작가님.”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렸나.
나는 허버트 조지 웰스가 발작할 때마다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래도 밑바닥에서 구른 덕에 눈치가 없지는 않은 건지, 웰스는 눈치를 주면 알아서 챙기긴 했다.
정말 다행이다. 상상 이상의 넌씨눈이었다면 그냥 갈아엎고 다른 사람을 찾았을 텐데.
‘아니 뭐, 오히려 잘된 건가?’
원래는 드잡이질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통째로 날아간 거니까.
조금 이상한 방향이긴 하지만 아무튼 고분고분해졌으니까. 예정대로 가볍게 제안하면 될 거 같긴 하다.
“아무튼, 제가 제안하고 싶은 건······ 굿즈 사업의 일환, 이른바 ‘설정집’입니다.”
“서, 설정집이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시로 들어 볼 만한 것을 내밀었다.
바로.
“이건······ 윌리엄 예이츠 작가님의 [아일랜드 농부의 요정담과 민담(1888년)> 아닙니까?”
“예, 바로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이걸 아일랜드 신화의 설정집, 혹은 단편집이라고 한다면, 내가 출판하고자 하는 건 소설들의 설정집이다.
설정집, 이른바 팬북(Fanbook).
말 그대로 어떤 분야의 팬들을 위한 책이다.
범위는 단순히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만이 아니다. 아이돌 연예인 팬북, 스포츠 운동선수 팬북 등 범위가 무궁무진해진다.
가장 익숙한 건, 어디 보자······ 아무래도 게임이나 소년 만화 관련 팬북이겠지? 역시 설정 놀음하기 제일 좋은 분야니까.
“제 경우라면 [피터 페리>의 요정들이겠죠.”
나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일단, 앞면엔 아르누보풍의 미소녀로 미화(美化)한 요정들을 그릴 겁니다. 뒷면엔 그 요정들의 이름과 설정을 적는 거죠.”
그렇게 한 페이지를 통으로 어느 특정한 요정을 위해 할애한다.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어느새 책 한 권 정도는 금방 만들어지지.
“과연, 그렇다면 미관상으로도 좋을 테니 사람들이 많이 사겠군요! 역시 천재적이십니다!”
거, 말 끊지 말고. 나는 웰스를 살짝 째려보았다. 웰스도 잘못했다는 걸 아는지 알아서 찌그러졌다.
“그리고, 기왕 할 거라면 제대로 노를 저어 볼 생각이라서요. [던브링어>로는 같은 개념으로 히어로 설정집과 빌런 설정집을 나눠서, 그리고 지금 연재 중인 [딕터 박사>로는 딕터 박사가 탐사했던 유적지뿐 아니라 그 유적지가 있던 나라의 문화, 생태, 자연환경 같은 걸 각각 분야별로 묶어 판매할 생각입니다.”
[피터 페리>가 단순한 덕질이라면 이쪽은 일종의 지적 허영심을 건드는 것이다.보는데도 즐겁고, 상식도 채워 넣기 좋으니, 편하게 자기가 아는 거 늘어 놓기 좋아하는 신사들이라면 더 열광해서 구매할 거고.
게다가 우리 쪽이 움직이지도 않는데 알아서 홍보되는 이 상황을 이용하는 거다!
후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빈센트 빌리어스>도 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걸로는 팔아먹을 각이 안 보여서 어쩔 수 없이 패스했다.어쩔 수가 있나, 그건 정극에 가까운 분위기라 캐릭터도 적고 페이지를 깊게 할애하면 또 정경계에서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무섭단 말이지······ 솔직히 후자가 이유로는 더 컸다.
“아직 얘기는 안 했지만, 아서 코난 도일 작가님의 [셜록 홈즈>도 이 설정집 프로젝트에 합류시킬 생각입니다.”
“오오.”
한 페이지당 단편 하나에 대한 해설을 하는 것이다. 내용보다는 관련 범죄에 대한 법 조항을 설명하는 페이지를 만든다면, 단순히 어른들만이 아니라 법학 교육도 된다고 학부모들에게 팔기 좋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나 혼자 먹을 생각은 아니란 거다.
그리고.
“우리 벤틀리 출판사 안에서는 허버트 조지 웰스 작가님. 당신의 [타임머신>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설정집 프로젝트에서, 이 [타임머신>만큼 찰떡인 작품은 별로 없다.
왜? 설정집을 만들 때 필요한 건 ‘뒤 설정’의 방대함이다.
단편 하나에서만 나왔지만, 그 생김새, 그 생태, 그 진화도(進化圖)가 상세히 실려 있는 설정.
게다가 그 내용들이 살짝 느슨하게 있으면 더더욱 좋지.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 넣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덕질 하기 좋을 것이 필수라는 거다!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은 내 마개조에 의해 몬스터물의 신기원을 열었다.
과거와 미래, 어떻게 생물이 진화하고 어떤 생태를 구축했는가, 그에 대한 방대한 내용들이 녹아 있단 말이지. 이건······ 다른 말로 하자면.
‘팬픽 각이라는 거지.’
세계관을 끊임없이 늘릴 수도 있으니 더더욱 좋지. 이 범용성이야말로 이번 사업의 핵심이 될 터였다.
게다가 공룡도 등장시켰잖아? 공룡이 가득한 그림책에 환장 안 하면 애들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판매층을 넓힐 수도 있다는 거지!
이는 아직도 창조설주의자가 많은 이 시대에, 진화론을 자연스럽게 해설할 수 있는.
어른도 어린이도 사기 좋은 그림책이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될 거다.
아무튼.
“예시로, 간단히 만들어 뒀던 시제 설정집이 좀 있습니다.”
나는 예전, 웨스트민스터 대학에 제공했던, 보기 좋게 논문 형태로 묶어서 보냈던 노트를 꺼내며 말했다.
물론 이때는 이걸 팔아먹을 생각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삽화는 없긴 하지만, 그래도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될 것이다.
“이걸 한번 봐 보시고,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시면─.”
“아닙니다. 작가님.”
그런 내 말을 끊고, 허버트 조지 웰스가 말했다.
그의 눈은, 아까 내게 고해성사를 할 때와 비슷한 광기로 가득했다.
“저는 한슬로 진 작가님을 믿습니다.”
“······그래요?”
“예!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니, 그런 말을 너무 대놓고 하지 말라고······.
나와 벤틀리 씨가 어이를 잃은 사이, 허버트 조지 웰스는 너무도 당당하게 소리치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저는 작가님이 보여 주신 길이 맞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어째서라니요, 한슬로 진 작가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그게 틀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
“······.”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벤틀리 씨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일 났다.
이 인간, 완전히 망가졌다.
“그, 그러면 아무튼, 진행하시는 걸로 알고.”
“물론입니다!! 어디 사인하면 되겠습니까?”
“······계약 사항은 안 보십니까?”
“하하하! 한슬로 진 작가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셨겠지요!!”
아무튼, 그 덕에 계약서에 서명을 받는 건 편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러면 한슬로 진 작가님, 이 사업은 그렇다 치고 제 글 요즘 어떻습니까?! 보고 계시는지요? 아니, 안 보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작가님이라면 보지 않으시더라도 제 글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주실 수 있겠지요!”
“아니, 일개 작가가 무슨 전지전능이에요!”
“괜찮습니다! 제 신앙은 공고하니까요. 믿고 있습니다! 한슬로 진 작가님!!”
결국 나는 글은 스스로 깨달아야 성장할 수 있는 장르라는, 자기개발서에 가까운 말로 달랜 뒤에야 그를 보낼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나에게, 리처드 벤틀리 주니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쯤 되면 성공하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습니다, 작가님.”
“무서운 농담 하지 마세요, 벤틀리 씨.”
물론 나도 벤틀리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더욱 두려워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성공했다.
그것도 좀 심하게.
설정집은 순식간에 아이들의 코 묻은 돈부터, 귀족들의 돈까지 갈취하였다. 매상은 떡상했고, 설정집만 따로 묶어 파는 포장마차가 연일 매진되었다.
차오르는 통장 잔고를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 덕에, 나는 더더욱 열심히 엉겨 붙기 시작한 허버트 조지 웰스를 피하기 위해 무진히 애를 써야 했다.
아니, 대체 왜 대박 쳤는데 왜 머리가 더 아파지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실례합니다, 작가님.”
“누구시죠? 어디서 뵌 것 같긴 한데······.”
“크흠! 뭐, 착각이 아닐까요?”
“아닌데······ 으음.”
“아, 간단히 레이스 대위라고 불러 주십시오. 여······ 아니, 요크 공작 각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요크 공작 각하? 아, 조지 왕세손이구나. 그런데 왜?
─그대가 발간한 설정집이라는 걸 더 보내주시오. 사인도 써서.
으음. 심정은 이해가 간다. 뭐,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공작 각하께는 이미 소포로 보냈는데요? 혹시 우체국이 늦은 건가요?”
“······어, 음. 독일에서 사촌 분들이 오셔서, 그분들께도 선물하시고자 합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리기도 했지.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몫의 설정집에 사인을 해서, 그것을 찾아온 군인분께 넘겨 주었다.
근데 진짜 이상하다······ 분명 어디서 만나본 것 같은데. 대체 어디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