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 Writer in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97)
런던, 서머싯 하우스.
“흠.”
왕립 문학회에 고문으로 초빙된 러디어드 키플링은 땅딸막한 다리로 탁자에 발을 올렸다.
회장이 없는 지금, 지금 그를 막을 수 있는 회원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실상 회장의 자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모든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개판이군.”
“마, 말이 심하시구려.”
“말이 심해?”
키플링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더없이 거만한 태도였지만, 입을 연 왕립문학회원을 포함해 그에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러면 날 불러오기 전에 댁들이 먼저 뭔가 성과를 냈어야 하는 거 아니오? 왕립문학회랍시고 한다는 짓이 뭐? 아서 코난 도일을 후원해? 삼류 잡지를 이용해 연재소설을 구축(驅逐)해?”
천박하기 그지없는 계책이지만 성공했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성공했다면.
하지만.
“실패했잖소! 전부! 이래 가지고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원래 역사는 결과로 증명하는 법이고,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다.
기책도 성공해야 기책이지 실패하면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똥 같은 전술일 뿐.
왕립문학회원들은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저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노성이 터져 나올 수 있는가.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하는 말 하나하나가 그들의 폐부를 찔러 댔다. 키플링이 괜히 인기 작가이자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만약 그들이 관료였다면 명확히 드러난 실책에 할 말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들 역시 나름 문학가다. 심지어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저 대중 문학가들보다 높은 이들.
그리고, 예술가는 때로 실적보다 감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러면 뭘 어쩌란 말이오.”
“그렇소. 우리 왕립문학회는 행보 하나하나에 품위를 가져야 한단 말이오.”
“이제 겨우 미국에서 오신 분이 뭘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구려.”
서서히 피어오르는 불만 섞인 목소리에, 키플링은 재차 코웃음 쳤다. 요컨대 저 목소리를 요약하면 이런 얘기 아닌가.
‘솔직히, 댁이라고 우리보다 잘난 게 있소?’
키플링의 이름값이라고 해 봤자 결국 굴러온 돌이라 이거겠지.
그리고 이에 대해서 키플링의 답 역시 간단했다.
물론, 없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그것을 너무나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귀족 출신도 아니고, 런던 시민이었던 적도 드물다. 심지어 고향은 인도 뭄바이.
만약 왕립문학회가 이렇게까지 몰려 있지 않았다면, 저들이 그를 초청할 일은 없었겠지. ‘전’ 회장이 그를 초청하면서 원한 것은 결국 그것 아닌가?
그렇다면, 보여 줘야지.
“물론, 당연히 있소.”
그들에게 앞서는 ‘실력’이라는 것을.
“댁들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소. 왕립문학회가 설립된 이유가 무엇이오? 대중······ 아니지, 유권자들과 독자들이 우리 왕립문학회에 원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겠소?”
“그야······ 대영 제국의 문학을 연구하고 증진시키기 위함이 아니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요! 그딴 건 대학에서나 하는 거지.”
쯧쯧, 이렇게 순진해 빠져서야.
키플링의 입가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자신 있게 답을 냈던 회원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키플링은 반박할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단언했다.
“지극히 간단하오! 우리 대영 제국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가 바로 왕립문학회일 따름이지!”
대영 제국의 문학적, 그리고 문화적인 위상을 드높인다. 그것만이 왕립문학회의 존재 이유다.
키플링은 그렇게 말하며, 신문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다름 아닌 이번 공모전 광고가 실린, 조지 뉸스 사의 신문이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시오! 어째서 이, ‘작가 연맹’이라는 천박한 자들의 모임이 소위 ‘공모전’이라는 것을 열었겠소? 간단하오! 우리가 이렇게 재력이 있다. 그러니 우리 편이 되어라, 라는 뜻이지!”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도에서 촉망받는 저널리스트였던 키플링은 이 공모전의 단점을 쉽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모전 특유의 단점.
장르와 분야를 불문하고, 공모전은 예나 지금이나 인력과 재력, 그리고 심력이 심각하게 낭비되는 불필요한 일이다.
고작 아이디어 몇 개 구하자고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비싼 상금을 주고, 또 한편으론 누가 장난질 치진 않았나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검사해야 하는 고역이 너무 크다.
그럼에도 이런 이벤트를 여는 이유는 간단하다. 엑스포와 마찬가지.
“‘우리가 이런 공모전을 열 수 있을 만큼 부유하고 여유롭다’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함인 것이오.”
즉슨, 상이라는 것은 받는 자보다 그것을 주는 자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다.
러디어드 키플링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래서, 실로······ 건방진 일이다.
물론 돈은 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대중에 아양 떨어서 번 푼돈임은 변하지 않지 않는가.
왕립문학회의 재력은 다르다.
그들의 재력은 유서 깊은 귀족가에서 나오며, 그 양은 그들의 세대에서는 다 쓰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즉.
“우리도 문학상을 제정해야 하오. 단! 공모전처럼 쓸데없이 대중에게 퍼 주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진정한 문인(文人)! 인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자에게 상을 주어야 하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볼 능력이 있는 단체, 그것이 바로 왕립문학회라는 것을 홍보하는 것이다.
“말은 좋지만, 누굴 준단 말이오?”
“줄 사람은 이미 정해 놨소.”
“뭣? 내정자를 둔단 말이오?”
“당연하지 않소. 어차피 결정은 우리가 하는 건데 뭐가 문제가 될까.”
들러리만 세워 두면 되는 거지.
키플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말했듯, 이것은 대영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상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국적에서 초탈한 것이 좋다.
정치색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좋다. 다만, 친정부적인 것보단 반정부적이란 이유로 박해받는 자여야 한다. 그래야 문학적으로 반골의 느낌이 팍팍 나니까.
마지막으로, 그 상을 받는 것이 대영 제국에 도움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즉.
“러시아인이군.”
“바로 그거요.”
키플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전쟁의 예시에서 보듯, 나폴레옹 전쟁의 제1, 제2 승전국인 제정 러시아와 대영제국은 서로 전쟁만 안 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전쟁 중인 관계.
영국인들은 언젠가 러시아가 저 중앙아시아 톨게이트(?)를 넘어 왕관의 보석, 즉 인도 아대륙을 빼앗아 가리란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들도 그랬으니까.
반면 민생경제는 파탄 나 있는 상황, 그리고 러시아는 신기하게도 경제가 조져지면 조져질수록 문학적 특이점이 자주 나오는 괴랄한 나라다.
그리고 마침, 그 러시아에 그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문호가 한 명 살고 있었으니······ 심지어, 천성적인 반골로 유명했기에 그들의 니즈에도 딱 맞은 인재였다.
“레프 톨스토이(Лев Толстой)를 새로 제정할 문학상─ 존귀하신 여왕 폐하의 성함을 빌려, 빅토리아 문학상의 수상자로 내정하리다.”
물론, 당사자의 허락은 받지 않았다.
당사자인 빅토리아 여왕이 들었다면, 그런 무정부주의자에게 어찌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주냐며 길길이 날뛸 만한 일이었다.
***
크리스마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대목이 아닐 수가 없는 시기다.
평상시 꽁꽁 묶여 있던 지갑은 그 입이 가벼워지고, 다이어트를 하던 사람들에게 좋은 치팅 데이가 되며, 게임사들은 대대적인 크리스마스 겸 새해 이벤트를 연다.
TV에서는 그해의 대목 영화들을 다시 틀어 주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한 해의 문화 행사가 종합되는 대목 중의 대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문화는 늘 그렇듯, 남들 놀 때 일해야 큰돈을 버는 법이다.
그래서.
“로열 하이마켓(Royal Haymarket)으로 오십시오! 금시대 최고의 고딕 소설! [트릴비(Trilby)>의 연극을 개봉합니다!”
“드루리-레인(Drury Lane)! 드루리 레인의 팬터마임을 보러 오시오! 무적함대(웃음)의 배꼽 빠지는 코미디! 가족에게 최고의 추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사보이 극장, [피터 페리와 요정의 숲>입니다!! [피터 페리>의 연극을 상영합니다!”
모두가 다 쉬는 이 크리스마스에, 극장가의 호객꾼들은 열심히 팸플릿을 돌리고, 신문사에 광고를 뿌려 댔다.
그리고, 여기서 승리한 극장은 바로.
“흐흐흐흐!! 보십시오, 작가님! 매진입니다, 매진!!”
“축하드립니다. 카르테 씨.”
당연히, 우리 [피터 페리와 요정의 숲>이다.
방금도 내가 한번 보고 왔는데, 극장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꽉 들이찼더라. 심지어 매진 팻말을 걸어 놨는데도 밖에서는 아직도 자리를 구하는 사람과 암표를 파는 사람이 대놓고 있을 정도니······.
원작자인 덕에 박스석에 앉을 수 있는 게 정말 다행이다.
뭐, 이 흥행이 내 원작이니 당연히 그래야지······ 라고 자만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머지 곳들도 쟁쟁했으니까.
대표적으로 [트릴비>는 제법 잘 나가는 프랑스계 영국인 작가이자 삽화가인 조지 뒤 무리에(George du Maurier)의 어······ 세계 최초의 최면(催眠)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진 작품이었지.
평소라면 그야말로 자웅을 가릴 만한 작품이었으나······ 그런 작품을 [피터 페리>가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크리스마스라는 시기적 버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식적으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데, 인기 여가수가 최면 아저씨에게 조종당하는 NTR 치정극을 보러 갈 수 있나.
즉, 타이밍이 안 좋았다는 거다.
여기에, 추가 치트키.
나는 파김치가 되어 있는 오스카 와일드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옆에서 흘낏 보며 말했다.
‘이, 이 천재를 이렇게 다루다니······.’라든가, ‘파울리네······ 파울리네······ 보고 싶어······!’라든가 하는, 뒤틀린 황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고생한 모양이네.
난 지나친 통조림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보며 가볍게 성호를 그었다.
저들에게 안식이 있기를.
그리고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보던 리처드 도일리 카르테는 일류 극장주답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흐,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런던에서 제일가는 유명 작가에, 그에 못잖은 독일의 작곡가 아니겠습니까? 저런 이름들을 갖고 있는데 인사 내보내지 않으면 아깝지요.”
“하, 하하. 뭐 그렇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 한국에서도 감독, 극작가가 이름을 얻으면 그 사람들을 예능프로 내보내서 홍보하긴 하니까.
즉, 이건 우리 무기를 적절히 쓴 거란 뜻이다. 아 억울하면 님들도 셀럽 데려오던가?
그 외의 상황들도 모두 문제가 없었다.
연일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서 일정이 다소 팍팍하게 짜이긴 했지만, 배우들에게도 휴식 시간이 적당히 배분되긴 했으며, 밥도 든든하게 먹이고 있다는 모양이다.
뭐, 21세기 관점으로는 그래도 혹사가 아닌가 싶긴 한데. 오히려 대우가 좋다고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이 시기 사람들이 터프하긴 하다.
이러니까 데드볼 시대다 뭐다가 존재했던 거겠지.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걱정 없이 돌아가 보지요.”
“하하하, 조만간 또 한 번 밀러 씨와 보러 와 주십시오. 작가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지 박스석을 비워 두겠습니다.”
“에이, 그건 좀.”
박스석은 극장에서 최고급으로 치는 비싼 좌석 아닌가.
아무리 원작자라지만 그걸 매번 얻을 순 없는 노릇이다.
난 적당히 만족했으니 더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나누는 게 좋겠지.
아무튼 그런 카르테 씨의 너스레에 웃음으로 돌려보내며 극장을 나오던 순간.
“오, 한슬로! 마침 만나는군.”
“어, 어라?”
나는 박스석 쪽에서 나오던, 한 살배기 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와 마주쳤다.
특히 남자 쪽은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게.
“와, 왕세손 각하?”
“그래, 직접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이로군.”
쾌남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내 시선은 자연스레 세손의 손을 잡고 있는 여성분에 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쪽은?
“인사하게. 내 아내일세.”
“메리라고 해요. 한슬로 진 작가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