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13)
113
그런 의미로, 술을 마시게 된 건 당일이 아닌 하루 뒤였다.
도련님께서 약을 먹는 동안 그가 마시는 물이나 우유까지도 세세히 신경 쓰던 나로선, 약과 술을 함께 먹는 미친 짓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치의에게 몇 번이나 묻고서 ‘와인 정도는 괜찮다.’라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자리를 갖게 되었다.
탁자 위에는 온갖 과일과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식사보단 곁들이는 와인 안주였다.
준비되는 내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가에 서 있던 도련님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나 설렘보단 곤란함이 역력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으로 술을 마실 땐 좋아하는데…… 설마 와인을 싫어하시나?’
직접 먹진 않았어도 도련님은 향에 민감한 체질이니 남들보다 와인의 향을 진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걸 싫어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아니면 주인공답게 무슨 알 수 없는 사연이라도 하나 숨겨진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하인 형님들은 열심히 움직여 미리 준비된 와인 셀러를 몰고 왔다.
그 안에는 온갖 와인이 담겨있었다. 모두 최고급인데, 개중엔 우리 상단에서 납품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설레는 눈으로 하나하나 라벨을 살피다가, 초심자인 그를 위해 가장 도수가 약하고 달콤한 것부터 꺼냈다.
고당도의 얼린 포도를 숙성시켜 달콤한 맛과 향이 일품인 아이스 와인이었다.
능숙하게 라벨을 벗기고, 와인 코르크를 단번에 따자 그가 나를 신기하게 봤다.
사실 다른 세계의 첫 생을 통해 맥주나 와인을 즐겨 마셨던 터라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그러면서 가장 기본적인 포도주부터 잔에 능숙하게 따르는데, 내 팔이며 손끝이 움직이는 동작 하나까지 유심히 지켜보던 도련님이 물었다.
“와인은 누구랑 마셨었어?”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능숙한 티가 났다 보다.
하긴, 처음으로 와인 마시는 사람들은 코르크 마개도 잘 못 따긴 하지.
뭐…… 여기선 세 번의 생 모두 술을 마셔본 적 없긴 했지만, 사실대로 말하긴 애매한 상황이라 나는 대충 둘러대었다.
“부모님 생일에만 마셨어요. 자주는 아니고요.”
말을 뱉은 후에는 갑자기 죄스러워졌다.
사실 집에는 간신히 내려갔다가 얼굴만 비치고 당일에 돌아왔다. 또 지하실에 처박혀서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땐 정말 도련님을 얼른 데려와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어서 부모님의 아쉬운 얼굴을 뒤로한 채 이곳으로 뛰어왔다.
뭐, 지금도 가끔 서신을 보내기야 한다만…… 입맛이 씁쓸했다.
그런데 무심코 말을 뱉은 후, 나는 흠칫 놀랐다.
상념에 빠지느라 몰랐는데, 도련님이 감정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
“아아. 응. 그랬구나.”
……뭐지. 내 거짓말이 들통 난 것 같은 이 이상한 기분은?
좀 찜찜했지만, 말을 아꼈다.
도련님 앞에선 예전부터 가족 얘기는 주의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침묵으로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려 했다.
다행히 그도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내가 따른 와인 잔의 다리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도련님의 손동작을 유심히 보는데…… 딱히 지적할 거리가 없었다.
오히려…….
“저보다…… 잘 하시는데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칠 년 전에 배웠어.”
그 말에 조금 의아해졌다.
……내가 기억하기로 미성년자였던 그가 따로 술을 배운 적은 없는데?
혹시 림슨 형님의 생각과 달리 칠 년간 다른 자들에게 배울 기회가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책으로 배운 거야. 직접 해보기는 처음이고.”
“……아하.”
듣고 나니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래, 실비엣 부인의 수업에서 그녀가 가져온 교재로 얼핏 봤던 기억이 났다.
그땐 왜 이런 걸 책으로 배우나 싶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걸 읽었다고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나? ……역시 영리한 우리 도련님답네.’
이렇게 잘 큰 도련님에게 부족한 건 정말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도련님은 와인 잔에서 찰랑이는 짙은 액체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향은 충분히 음미했는데. 이제 마셔도 돼?”
“네.”
“응.”
……이상하네. 왜 조금 짜증이 나신 것 같지?
아무튼, 도련님은 와인 향부터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조금 상태를 지켜보다가 더 따라드리려고 하는데, 도련님이 물었다.
“로벨은 안 마셔?”
“……저요?”
“보통 연회에선 다 같이 마시잖아. 혼자만 따로 마시는 예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기왕 이렇게 연습을 하는 거면, 너도 처음부터 같이 마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처음에 소극적인 도련님은 어디 갔는지 갑자기 말이 길고 빨라졌다.
무엇보다 저 애틋한 녹색 눈……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기분이 들지?
“그으……렇긴 한데요. 저는 도련님께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오기도 해야 해서. 끝에만 같이 마셔도 되지 않을까요?”
“왜. 다른 시종 부르면 되는데.”
……다른 애들은 불편하시다면서요?
라는 말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어쩐지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도련님이 마법 같은 말을 꺼냈다.
“예전처럼, 같이 마시자.”
“…….”
“왜. 나랑 마시는 건 싫어?”
……어쩐지 양심에 찔렸다.
예전의 나는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도련님 약까지 뺏어 먹었는데, 정작 지금 도련님이 권하는 술은 거부하다니.
아무리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바뀐다 해도, 이건 아니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내 몫의 와인 잔을 들었다.
‘어차피 우리 집안은 태생적으로 말술이니까 괜찮을 거야.’
첫 생에서도 술에 약하지 않았고, 고작 한두 잔 정도야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로베르 오라버니도 부모님 몰래 어릴 때부터 술고래처럼 마셔댔다가 죽도록 맞았고…… 숙취는 없었다.
그렇게 한 잔을 비우자, 후회가 찼다.
‘……일찍 좀 마실걸. 엄청나게 맛있네. 뭐야, 이거?’
과연 명문 덴카르트는 와인 맛도 일품이었다.
와인을 호로록 비워버린 나는 열린 와인 셀러를 샅샅이 살피며 물었다.
“다른 거 드셔보실래요?”
“그래 줄래?”
“네. 잠시만요……. 으음. 오. 이게 낫겠네요.”
이번에는 적포도주를 준비하여 도련님과 나누어 마셨다.
“이건 육류와 곁들여 드시면 돼요. 아. 잠시만요.”
내가 먼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련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권하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참 맛있게도 받아먹었다.
그런데 우리 도련님은 술이 약한 모양이다.
벌써부터 술기운이 오르는지, 긴 목이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응.”
하지만 목소리는 또렷한 게 아직 괜찮은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유심히 살피며 함께 쭉 잔을 비워댔다.
그렇게 몇 잔을 연이어 나누어 마시던 도련님이 이번에는 샴페인 맛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래서 웨인을 호출해서 곧장 샴페인이 준비되었고, 그것도 반씩 나누어 마셨다.
오랜만에 술을 입에 대서 그런지, 아니면 여태껏 먹어본 적 없는 귀하고 맛있는 술 때문인지 나는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역시, 이번 생에서도 말술인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문도 트여서 옛날얘기도 좀 하고, 요새 있던 얘기들도 좀 했다.
“우리 도련님 돌아오고 축하 파티도 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웨인도 부르고 싶은데 지금 바쁘겠네요. 이건 그냥 우리끼리 축하 파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다음에 파티 여는 건 좋죠?”
“……로벨. 괜찮아?”
이상하게 도련님이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정작 걱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데.
나는 은근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투덜거렸다.
“괜찮죠. 애초에 공작 나쁜 놈이 파티를 열게 허락을 해주었으면, 웨인이나 제가 마음도 안 상하고 이렇게 욕할 일도 없었겠지만요.”
“…….”
“왜 그렇게 보세요, 도련님. 사람 되게 부담스럽게?”
“……이제 됐으니까 그만 마시자. 너무 많이 마시면 정말 무리가 갈 것 같아서.”
도련님이 건네는 물을 마시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내게 물었다.
“무슨 할 말…… 있어?”
어쩐지 답지 않게 긴장한 눈치였다.
내내 술로 목을 축였건만, 연신 마른침을 삼키기도 하고.
“있긴 한데. 왜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러세요? 저한테 잘못한 사람처럼.”
정곡을 찔린 것처럼 도련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 예쁘다.
그게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예뻐서 손을 뻗으려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아무리 도련님이 예뻐도 눈알을 만질 순 없지.
그래서 그거보단, 정말 더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로 했다.
“도련님, 저 그런데요. 계속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뭔데?”
“딱 기다려봐요.”
“……?”
“궁금하시죠. 원래 인생이 주고받기예요. 칠 년간 편지 한 통 없이 저를 궁금하게 만들었으니, 한번 똑같이 당해 보세요.”
나는 일부러 더 안달 나게 시간을 질질 끌었다.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아주 한참을 얘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이제 조금은 복수했다 싶을 때쯤에,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도련님이 내게 물었다.
“어떤 게…… 궁금했는데?”
“도련님.”
그 순간,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왜 자꾸 저한테 내숭을 부리고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