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19)
119
답지 않게 어쩐지 조급하면서도 긴장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넬라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지 마. 차라리 화내.
사람 불안하게…….
그런데 나를 위아래로 빤히 살피던 그가 갑자기 무언가 거슬리는 것을 발견한 듯이 인상을 썼다.
“……뭐야.”
그러더니 불쑥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댔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달리느라 그의 옷이 구겨졌어도 바닥은 풀과 흙이 묻는 땅바닥이다.
애초에 회색 옷이기도 하고……. 검은색이 아니니 얼룩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마넬라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일어서지 않았다.
“황성 바닥이 얼마나 미끄러운데.”
그와 내가 말하는 내내 무언가 따지고 싶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아리프도 놀라서 입을 아예 다물 지경이었다.
우리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은 마넬라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이러고 뛰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어??”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 구두끈을 묶어주었다.
처음 해보는 듯 엉성했지만, 제법 꼼꼼한 손길은 맞았다.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그 진지한 표정이 제대로 보였다.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허술하게 다녀.”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싶긴 했는데, 친절을 베풀어준 상대에게 뭐라고 할 순 없어서 얌전히 있었다.
그런데 마넬라노는 늘 그렇듯이 잘 가다가도 선을 넘었다.
“이거 봐. 발목도 나뭇가지처럼 가는 게.”
“에이! 허락 없이 어딜 만져요? 놔요, 좀!!”
커다란 손이 갑자기 복사뼈까지 콱 움켜쥐어서 놀라고 말았다.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발로 차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뻔뻔한 성미답게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아리프 형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대충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삐딱한 시선이 내 뺨을 따갑게 만들었다.
“왜 과민반응이야? 공자랑은 별짓 다 해놓고.”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죠. 마넬 님이랑 우리 도련님이랑 같아요?”
“안 본 사이에 로벨이 멍청해졌나? 내가 나랑 있을 땐 그 도련님 소리 자제하랬지??”
“책임 전가하지 마세요. 먼저 도련님 얘기를 꺼낸 건 마넬 님이잖아요.”
전처럼 애들도 아니고, 유치하게 왜 이래.
들으나 마나 크게 중요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아서 슬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러다가 도련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더 시끄러워질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마넬라노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넌…… 아직까지 수염 하나도 안 나는 거야?”
마치 내게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냈다는 듯이 묘한 어조였다.
옆에 있던 아리프 형님도 ‘그건, 그렇구나…….’라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뜨끔해진 나는 일부러 더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침마다 편해서 이렇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만 그런 건 아니죠. 마넬 님도 거의 없잖아요.”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예리한 턱선엔 잡티 하나 없었다.
수염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꼼꼼히 살펴봐도 그랬다. 확실히 인성과 별개로 잘난 낯짝이긴 하단 말이지.
“잘났지?”
내 시선에 마넬라노가 삐쭉 웃더니 대뜸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자. 구경하고 싶으면 가까이서 제대로 봐.”
원래도 자의식 과잉이 심한 놈이란 건 알았지만, 얘가 오늘 유독 더 심하다.
오랜만에 봤다고 이러나.
내가 엄청나게 질색했지만, 자기 잘난 걸 아는 그는 오만하게 말했다.
“너는 특별히 마음껏 만져도 돼.”
훅, 마넬라노 특유의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넬라노로서는 적당히 뿌린 것이겠지만, 요새 후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나에겐 고역스러울 정도였다.
코를 부여잡은 나는 질색하며 뒤로 몇 걸음 더 물러섰다.
“으. 진짜 제정신이에요?”
하지만 그럴수록 마넬라노는 장난이라도 치듯이 내게 더 따라붙었고, 아리프 형의 표정은 배로 굳었다.
그래서 아리프 형이 무어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가벼운 투로 말했다.
“저희 이제 진짜 장난할 시간 없어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갑니다?”
“말투 계속 기분 나쁘네. 로벨. 내가 네 관심이나 손길이라도 구걸하는 거지로 보여?”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기가 장난처럼 말해놓고 왜 저렇게 원통한 표정이야…….
심지어 구질구질하기까지 했다.
“나 이렇게 대하고도 멀쩡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거 단단히 알아둬. 이건 돈으로도 못 사는 경험이라고.”
‘얘는…… 진짜 저렇게 다 커도 내적 변화는 아무것도 없네.’
말만 꺼내면 돈 자랑이다.
이러니 원작이나 지금이나 황태자랑은 비교도 안 되는 거지.
내면이 좀 성숙했다면 도련님이 그렇게까지 질색을 했겠냐고…….
나는 그를 좀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그래도 옛정을 봐서 조언 하나를 해주었다.
“세상일이 돈이면 다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알아. 세상일 중에 돈으로 안 되는 거 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고.”
그걸 아는데 저러나 싶어서 놀란 눈으로 보자, 쭉 뻗은 짙은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안 되는 거 딱 하나 네가 알려줬잖아.”
그는 인정한 게 자존심이 또 상하는지, 고개를 돌리며 괜히 욕설을 뱉었다.
답지 않게 풀이 죽은 기색이 묻어나서 괜히 미안해졌다.
마넬라노야 우리 도련님에 비해서만 부족할 뿐이지.
사실 어디 가서도 기죽을 필요 없는 잘난 놈이긴 하다.
“죄송해요. 그동안 오셔도 제대로 인사 못 한 건…… 도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잖아요. 그래도 제 사정도 아시니까 헤아려 주세요.”
“야, 로벨.”
아랫입술을 아파 보일 정도로 깨문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오늘 황녀나 공자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널 보러 온 거지.”
대놓고 말하긴 부끄럽다, 이건가.
“매번 그래. 그러니까…… .”
그런데 그 진지한 말은 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까 소란 때문에 마넬라노의 소식을 듣고 찾아다녔는지, 뒤에서 그 또래의 귀족들이 나타난 것이다.
“여어, 마넬라노.”
“너 정말 여기 있었네? 한참을 찾았다고.”
……끼리끼리라더니.
딱 봐도 사납고 불량해 보이는 귀족 청년들이 히죽대며 다가왔다.
그들은 곧 흥미로운 눈으로 아리프 경과 나를 번갈아 봤다.
특히 아리프의 제복을 본 청년들은 괜히 미소를 짓거나 점잖아 보이려 했다.
‘그래, 잘 보이고 싶겠지.’
가뜩이나 대단하던 검은 사슬 기사단의 위상이 도련님 덕분에 한층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속으로 우쭐하는데, 누군가 나를 보며 누구냐고 묻는 소리에 마넬라노가 답했다.
“로벨.”
“……로벨?”
나를 바라보고 의아한 듯 눈을 굴렸다.
어느 가문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내 조끼며 구두를 보고서 시종이라는 직급을 유추했는지, ‘흐음.’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말했다.
“네 새로운 시종이구나.”
“내 시종은 아니고.”
나는 들으면서 생각했다.
‘대충 다른 귀족가 시종이라고 설명하겠지.’
마넬라노라면 충분히 그럴 말재간이 있었다.
그리고 인사만 하고 갈까.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도 되고, 라며 생각하는데 그가 입매를 비틀더니 삐죽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로벨이지.”
“……?”
“……?”
짧지만 묘한 어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거기다 뜻은 더 이상했다.
‘……내 로벨은 또 뭐야?’
이자들만 없으면 제발 이상한 소리 좀 자제하라며 조언하고 싶을 정도였다.
마넬라노도 바보는 아니니, 그냥 소개를 안 하는 방법이 나을 텐데…….
“아, 아아. 어쩐지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끈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얕잡아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의외로 마넬라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눈 내려. 로벨은 네놈들이 그딴 눈으로 볼 인사가 아니니까.”
웃음기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가뜩이나 위협적인 인상은 더 사나워 보였다.
그들도 그걸 느꼈는지 무슨 일이 떠올랐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나는 뒷모습을 통해 그들이 쓰는 옷감의 색과 특징을 눈여겨보았다.
‘짙은 선홍색 옷감과 금 자수를 보니 일반 귀족 계층은 아닌데…… 저렇게 말해도 되나?’
나 때문에 괜히 시비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애초에…… 마넬라노가 꾸역꾸역 우리를 쫓아오지 않았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을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여간, 한결같이 말 안 듣는 애새끼 같으니…….’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괜한 오해 사기 전에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야?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하여간 성격 참 특이하다 싶었다.
그래도 ‘나중에 밥 먹자.’ 정도의 뻔한 제안으로 달래며 대화를 얼추 마무리했다.
다행히 마넬라노도 수긍한 분위기였다.
그래, 그 정도 눈치라도 있으니 다행이네…….
내가 원래 가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자, 마넬라노도 함께 따라왔다.
왜 따라오시냐고 묻자 그도 이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바보도 안 속을 거짓말이었지만, 봐주었다. 귀찮긴 한데 좀 불쌍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문 앞에는 도련님이 있었다.
‘……어라?’
그런데 그는 들어가진 않고 밖에서 팔짱을 낀 채 기대서 있었다.
곧 도련님이 우리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음울함이 깔린 녹색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사람 괜히 뜨끔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이어서 마넬라노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굳이 마넬라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말로 듣지 않아도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이 새끼 또 시작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