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22)
122
“……주군!”
“지금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만에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이 되기라도 하면…….”
오랫동안 에드릭을 지켜봐 온 데니안이 가장 크게 걱정했다.
북부의 세 거점으로 떠나기 전에 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자신의 전 재산을 로벨 몫으로 남겨둔 것까진 이해했다.
모친을 그렇게 여의고, 처음 생긴 제 사람이니까.
어릴 때는 그렇게 치기 어린 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정말 두고만 볼 수 없어졌다.
에드릭에게 수도 없이 언급한 사안을 여태껏 끌고 온 걸 봐선 알면서 그러는 게 분명했다.
데니안은 전에 없던 큰 불길함을 느꼈다.
다른 문제를 일으킨 적 없는, 오히려 고분고분하다시피 가문의 일 처리에 힘쓴 에드릭이 이 문제만큼은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저 소문이 아닌 에드릭의 본심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에드릭은 바보가 아니었고, 오히려 또래보다 더 영특한 편이었다.
황성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건, 모두에게 던지는 선언이자 경고로 봐도 무방했다.
로벨에 대한 호감이나 애정과는 별개로 제대로 정리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다.”
공작의 말을 듣는 보좌관들은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표정 변화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벤자민의 얼굴도 미미하게 굳었다.
그러나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한 일에 인력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하도록.”
* * *
도련님이 황성에서 폭탄 발언을 한 이후에도 덴카르트는 잠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속에서만 아직도 핵폭탄이 초마다 터지는 대전쟁이 진행될 뿐이었다.
“……저, 로벨.”
패잔병처럼 벽에 기대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아있던 나는 고개를 올렸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거리는 페드릭이 보였다.
수더분한 외모에 내향적인 이 청년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하인이었다.
볼 때마다 허둥지둥 움직이는 터라 내가 먼저 나서서 몇 번 도와준 이래 말을 텄고, 동갑이라 더 친해지게 되었다.
그 후로 다행히 잘 적응해서 이제는 오히려 나를 신경 쓰기도 했다.
혹시 필요한 비품이 있냐고 먼저 묻고, 내 방에 먼저 갖다 놔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같은 용건인가 해서 인사 후에 거절하려고 했다.
지금은 비품을 늘리는 게 아니라 줄이는 게 더 중요했다. 가능하다면 나도 아예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저, 로벨. 고민 좀 들어줄래?”
숨은 듯이 있던 뒤뜰 구석까지 찾아와 상담할 정도면 평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 다급함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진심으로 고민 상담을 받고 싶은 상황이긴 하지만…….
“너 혹시 연애 많이 해봤어?”
“……뭐. 적진 않게 해봤지.”
테루아에선 아직 안 했어도, 한국에서 줄기차게 하던 게 연애다.
특이점이 있다면 연애하면서도 상대에게 매달릴 필요까지 못 느낀 터라, 남들처럼 오래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쟤는 울상을 짓고 그래.
그게 그렇게 부러운가?
어쨌거나,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그게…… 이건 내 친구 얘긴데 말이야.”
페드릭이 본인 얘기를 꺼낸다고 내게 예고했다.
“내…… 친구가 고민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해서. 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거든.”
“……뭔데?”
“걔도 막…… 특이한 취향이 있어서 고민이라고 하더라고.”
“특이한 취향?”
페드릭이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 얼굴로 아주 결연하게 말했다.
“으응.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한대.”
과거에 나는 잡식 독자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소설을 섭렵했기에, BL 장르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BL 장르에 빙의된 것이고.
그런데…… 이 세계는 다들 그 장르의 특수성이 강하게 발휘되는지, 내 주변에 참 많은 것 같았다.
“음,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면서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엊그제 요란하기 이를 데 없던 황성 연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꿈인 줄 알았다.
도련님은 맨정신에 그런 소리를, 그런 행동을 대놓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우린 이제 애도 아니었고…….
그러나 그때 일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귀족들의 웅성거림, 묘한 시선, 그리고 아리프 경의 곤욕스러운 얼굴과 마넬라노의 분노한 표정, 잔뜩 흥분해서 약혼자에게 무어라 다다다 말하는 딜라일라의 입 모양…….
한순간에 뒤죽박죽된 것들 사이로 도련님의 녹안이 가장 선명하게 보였었다.
어딘가 돌아버린 듯한…….
몇 년을 굶다가 이제야 간신히 발견한 사냥감을 앞둔 맹수처럼 강렬하고 진득한 눈빛이었다.
아직도 생생할 정도였다.
그게 다시 떠오르자, 나는 암담함에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X 됐다.’
그날 밤,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완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도련님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퍼즐처럼 머릿속에 맞춰져 갔다.
도련님은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볼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한 도련님의 눈…… 그건 단순히 시종을 보는 눈이라 할 수 없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생각에 빠지느라 답을 못 했는데, 페드릭은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역시…… 안 놀라는구나.”
그는 이러한 내 반응에 안도하면서도 어쩐지 허탈해했다.
나는 그를 좀 더 안심시키려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왜 놀라. 놀랄 이유가 없지. 사람이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건데. 특이하지도 않아.”
“으응…… 로벨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어째서 페드릭이 굳이 내게 이런 고민 상담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당연히 페드릭도 황성 연회에서의 난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련님과 내 사이를 짐작하고서 이런 고민을 꺼냈겠지…….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페드릭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런데…… 그 상대에 다른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길래 이렇게 곤란할까.
일단, 상황 정리가 필요해서 말문을 뗐다.
“네 친구라는 분이……. 그러니까, 페페 씨라고 하자.”
“으응. 걔를 페페라고 하자!”
순식간에 페페가 된 페드릭은 눈을 빛냈다.
내가 정말 속아 넘어간 것이라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래.
너라도 안심이 된다니 됐다.
나는 작게 웃으며 질문을 시작했다.
“혹시 페페 씨가 좋아하는 남자분께선 동성을 안 좋아한대?”
가장 유력한 가설부터 물었다.
림슨 형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도련님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듯이, BL 장르라고 해서 남자들이 다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상대도 남자를 좋아해!”
그러자 페드릭은 거짓이라곤 조금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어, 내 친구 페페가 좋아하는 상대 말이야.”
음…… 이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허상의 인물을 지어내던 페드릭이 내게 슬쩍 덧붙였다.
“그런데…… 페페가 좋아하는 그 상대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대.”
……? ……?? ……???
나는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페드릭이 좋아하는 남자도 남자를 좋아해서 다행이긴 한데…….
아니.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하지만 내 눈치를 다분히 보는 페드릭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페페 씨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는 슬프게도 페페 씨가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 이거지?”
“맞아, 맞아. 그거야! 페페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짝사랑하고 있어!!”
……뭐지, 이건.
엊그제보다 더한 막장이 내 눈앞에 펼쳐지려고 했다.
‘아니, 애초에 그럼 페드릭이 포기해야 하는 일 아닌가?’
페드릭이 짝사랑하는 상대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페드릭의 표정을 보니 혼자만 품고 있는 마음 같았다.
그러면 상대가 알기 전에 마음을 접는 게 낫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일방적으로 마음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래도 상대에게 대놓고 상처 주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나는 아주 어렵사리 페드릭을 설득해 보려 했다.
“그럼 상대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럼 슬프지만……. 친구가 포기를……. 해야 도의적으로 옳지 않을까?”
아무리 페드릭과 내가 꽤 친하다 해도 응원해줄 일이 있고, 못 할 일이 있었다.
만약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연인이 있다면, 응당 포기해야 하지 않나.
그 상대가 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기야 하다만…….
그럴 결심이었다면, 페드릭이 애초에 내게 고민 상담을 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페페가 사랑하는 남자는……. 절대, 절대! 절대로, 그 친구와는 이루어질 수 없거든!!”
……내가 몰랐는데, 페드릭 인성도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저렇게 들뜬 얼굴이면 어떡해…….
나는 속으로 한숨을 참으며 물었다.
“왜. 페페 씨가 좋아한다는 사람의 연인이 결혼이라도 했어?”
“응, 아, 아니. 곧 결혼할 거야. 조만간 새로운 약혼녀도 생길 것 같아.”
페드릭은 횡설수설하면서도 제 뜻은 제대로 밝히려 했다.
뭐…… 페드릭이 좋아하는 남자한테 정략결혼 상대라도 있나 싶었다.
“음…… 네 말대로 된다면 페페의 짝사랑 대상은 혼자가 될 텐데. 그럼 페페가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내 대답에 페드릭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며 성호를 그었다.
……그게 그렇게 감사할 일인가?
나는 의아함을 숨기며 페드릭에게 짐짓 덤덤한 어조로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긴 해.”
“……응?”
“사람 마음이 그리 말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라서. 게다가 두 사람이 원래 친구 사이였다면…… 상대가 친구로만 남길 원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말을 할 때쯤엔 페드릭이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양심에 찔려서 차마 그냥 포기하라곤 못 하고…… 에둘러 말했다.
“그래도 둘 다 동성끼리의 사랑에 부담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말하는데 도련님의 태연한 얼굴이 떠올랐다.
‘왜, 무슨 문제 있어?’라고 뻔뻔하게 되묻는 듯한 눈빛…….
그분은 부담이 없다기보단 너무 당연해서 문제였다. 망할…….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페드릭에게 말을 이어갔다.
“페페 씨는…… 실연한 친구가 부담되지 않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응!”
역시 본성은 순수한 청년답게 페드릭은 수긍했다.
그런데 잠시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어…… 그런데 내 친구 페페가 좋아하는 상대가 녀석의 친구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낌이 그랬어. 알잖아. 나 촉 좋은 거.”
에둘렀는데도 페드릭은 ‘그런가?’ 하고 수줍게 웃으며 넘어갔다.
올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도 덕분에 복잡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만, 도련님도 이 순수한 페드릭처럼 내 말에 그냥 설득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그 돌아버린 눈빛이 내가 이제껏 마주친 그 어떤 진상보다도 강력했다.
그리고 당일 덴카르트에 돌아오는 마차에서 도련님과 나눈 대화도…… 심상치 않았다.
나는 속으로 다시금 무거운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고마우면, 페드릭.”
“으응.”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