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37)
137
도련님이 북부로 떠나기 전에 두고 갔던 것들이 떠올랐다.
나와 시가지로 나갔을 때 먹었던 작은 사탕 봉지며, 함께 글을 연습했던 종이들.
그런 것들은 그렇게나 소중히 간직했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소홀히 하고 있었다.
나는 공작의 앞이라는 사실조차 잊고서 탄식을 흘렸다.
‘왜 도련님은 항상 나한테…….’
죽음까지 각오했던 그 어린 소년은 나를 위해 원치도 않는 것까지 해주려 했었다.
약혼 상대도, 혼인 상대도 아닌, 하다못해 자기 속이는 사람한테 유산 상속이나 하겠다는 도련님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가만히 지켜보던 공작이 다시 말했다.
“가문의 일원 외 유산 상속은 지장과 서명이 모두 필요하니 둘 다 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정신을 일깨웠다.
로벨리아 플로르.
‘그렇다면…… 공작도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충분히 분노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공작은 영 무심한 얼굴이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 더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자식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아비가 있었다면, 도련님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처할 일이 없었을 테다.
“제 비밀을 알면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차라리 저한테 절대 도련님 만날 생각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쩌면 도련님의 유일한 가족이라 볼 수 있는 공작에게 따졌으나, 그는 태연했다.
“내가 왜.”
먹먹함으로 흐려지는 시야에 힘을 주며 말했다.
“왜라니……. 공작님은 아버지고, 어른이잖아요.”
“그런 걸 세세히 따지는 놈이 아니란 건 네가 잘 알 텐데. 말한다고 들을 놈도 아니잖아.”
“…….”
공작이 예전과 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말 이 사람과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적어도, 지하와 북부에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요구하는 지원은 아낌없이 해주었기에 조금은 달라졌겠거니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그런데 그때, 공작이 입매를 미묘하게 비틀며 말했다.
“내 말보단 차라리 네 말을 듣는 편이지.”
“……도련님 요즘은 제가 말해도 안 듣거든요. 도련님 공작님 닮아서 고집 센 거 모르세요?”
“모를 리가. 그러니 평민 출신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미친 소리나 하고 있지.”
“……공작님한테도 말씀하신 거예요?”
순간, 무료하던 붉은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 그놈이 널 사랑한다고 하더군.”
사랑…….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 입에서 사랑…… 같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큰 충격에 빠졌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도련님도 아직 제대로 안 한 고백을 왜 공작님께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공작님이랑은 더 할 말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쫙, 쫙.
종이를 정확히 반으로 찢으며 일어섰다.
“필요 없습니다. 부탁인데요. 다신 이런 거로 부르지 마세요.”
공작의 반듯한 눈매가 찌푸려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내 할 말을 다 했다.
“그리고 또. 앞으로는 황가에 너무 티 나게 적대감 드러내진 말아 주세요. 공작님은 이제 내일모레 작위 물려주면 끝일지 몰라도 도련님은 피곤해지거든요.”
“서명.”
“안 해요. 평안한 하루 보내시고요.”
그래도 도련님의 친부이니, 예의는 지켜야지.
나는 꾸벅 인사한 후 나갔다.
당연히 공작은 나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
원래부터도 그런 사람이니까.
다만…… 도련님이 문제였다.
나는 간신히 복도를 벗어나자마자 달구어진 이마를 감쌌다.
‘……미치겠네.’
도련님은 아주 위험하게 자랐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다 퍼주는 게 말이 되나?
일방적인 관계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부모 자식도 그건 안 되는데.
‘그런데…… 어쩌지. 난 내 감정에 확신이 없단 말이야…….’
나는 벌써 죄책감에 휩싸였다.
애정과 연민, 걱정 같은 감정들은 차고 넘치는데…….
이토록 나를 위하는 도련님의 마음을 어떻게 거절할지 상상하자니 벌써 머리가 화끈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막막히 있을 수는 없으니, 꼬였던 것들부터 차근차근 풀어야 했다.
다음은, 아리프 경이었다.
연무장으로 향한 나는 곧 수련이 끝날 아리프 형님을 기다렸다.
기사들은 모두 이 정문의 통로를 통해 지나가므로 기다리면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왔다.
“……!”
그런데 아리프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흠칫 놀라 걸음부터 멈추었다.
그러고는 퇴로를 확인하려는 군인처럼 주변을 어색하게 훑어봤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련님 명령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누가 그대로 도망치게 놔둘까.
나는 그의 앞을 곧장 막아섰다.
“아리프 형님. 좋은 아침이죠?”
“……예.”
“오랜만에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를 좀 옮길까요?”
긍정한 것과 달리 죽상인 그를 향해 뻔뻔하게 물었다.
우물쭈물하던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로 딜라일라와 티타임을 벌이던 장소였다.
정작 주인인 공작도 도련님도 티타임을 즐기지 않으므로 이곳은 늘 한산했다.
그래도 솜씨 좋은 사용인들이 깔끔하게 가꾸어 놓았다. 둥근 대리석 테이블은 늘 반질반질 빛났다.
같은 색감의 의자에 앉자, 아리프 형님이 나를 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세 자리 정도는 티 나게 떨어져 앉은 것이다.
“내가 무슨 전염병 환자예요?”
황망하게 바라보자, 그는 아차 싶었는지 급히 변명처럼 덧붙였다.
“여, 여기서도 잘 들립니다.”
그걸 보자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고마워요.”
황성에 다녀온 이후에 조금 더 떨어져서 걷는 걸 보니 꼭 그랬다.
“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계속 모른 척해줘서.”
“……!”
내 말의 뜻을 이해한 아리프 형님도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지.
아까 공작의 반응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그러나 아리프 경도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침착하게 나를 응시했다.
내가 왜 여자인데도 시종이 되었는지, 무얼 원하는지…… 자세한 내막이 궁금할 텐데도 캐묻지 않는 고지식함은 도련님과 꼭 닮았다.
지금으로선 도련님 외에 다른 이에게 아팠던 사실이나 다른 것들을 말할 수는 없으므로 고맙다고 다시 말하는데,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럼 혼인은…… 언제 하실 겁니까?”
감동도 잠시.
나는 가뜩이나 어지러운 마음을 들쑤신 그에게 갚아줄 심산으로 물었다.
“형님은 연초 언제 끊으실 건데요?”
“올해 안에는……, 목숨을 걸고……, 기필코 해내겠습니다.”
보통 맹세만 하지 않나. 무슨 목숨까지야…….
그런데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내가 괜히 말했다 싶을 정도였다.
“로벨 군…… 아니. 로벨 양.”
마지막 호칭은 들어본 적도 거의 없었다.
내가 교차한 두 팔을 마구 긁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부르면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냥 하시던 대로가 서로 편하지 않을까요?”
“그럼 로벨 군.”
어색하게 호칭을 부른 것과 달리, 그가 결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로벨 군은 거기에 가보지 않아서 모릅니다만, 그곳은…… 몸에 해로운 것 없이는 쉽게 버티기 힘든 곳입니다.”
단순히 변명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먹먹한 진심이 느껴졌다.
“혹…… 주군께 그런 걸 모두 마다했던 이유를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내 대답에도 아리프 형님은 자신의 태도가 과하다고 생각하는지 뜸을 들였다.
“……로벨 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린 사유는 또 의외의 것이었다.
“언젠가 여쭈었는데…… 로벨 군이 연초 냄새를 싫어한다고 하더군요. 주군이 로벨 군을 많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
“그리고…… 주군께서 이미 제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혹여 위험한 일이 생기거든…… 자신보다 로벨 군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습니다.”
“…….”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주군께선…… 세세히 표현하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죠.”
억지로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 찌푸려지는 내 표정을 보면서 아리프 형님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기사란 종족들은 명예를 위해 존재하지만…… 그 전에 사람이기는 합니다. 주군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왜 아리프 오빠가 하실까.”
“……!”
오빠란 호칭에 흠칫 놀랐던 그는 이내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맹세하듯 말했다.
“진심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
묘한 감상이 들었다.
예전엔 어떻게든 도련님 옆에서 내빼려 하더니…….
내 눈빛을 제대로 읽었는지 그가 시선을 피하며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죄인입니다. 평생 갚을 은혜가 많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니요, 형님.”
“……?”
“앉아주세요.”
내 명령 아닌 명령에 아리프 형님은 눈치를 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반대로 불쑥 일어난 나는 아리프의 곁으로 가까이 가서 그의 의자에 팔을 걸쳤다.
“얘기를 시작했으니 마무리 제대로 짓고 가셔야죠.”
그러자 그가 흠칫 놀랐다.
“7년이나 지났는데, 더 남았을 거 아니에요. 도련님에 대해 저한테 말 안 한 것들.”
가뜩이나 커졌던 눈이 크게 동요했고.
그걸 보니 숨겨진 것들이 정말 더 있긴 하구나 싶었다.
분위기상 좋았던 일은 결코 아닌 듯 보였다.
그러니 들어야 했다.
도련님이 자의든, 타의든…… 숨겼던 것은 모두 알고 싶었다.
아니, 숨긴 것을 제외하고도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도대체 도련님이 저를 위해 또 무슨 무모한 짓들을 했던 건데요.”
이제 많은 것을 가진 도련님의 힘이 되어주긴 어렵겠지만, 그의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
그건 세상에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