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57)
157
……선상에서 잠깐 스친 걸 기억하나?
아니, 고작 그 찰나의 순간으로 이렇게 자신할 수 있는 걸까.
당황한 나 대신 이보 형님이 대답을 해주었다.
“선상에서 마주쳤을 겁니다. 저를 돕느라 같이 가주었습니다.”
그는 그 외에 다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만하면 된 것 아니냐는 듯이 싸늘한 눈으로 히스 레잔다르를 응시했다.
“그랬습니까.”
“……예.”
나는 히스 레잔다르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작게 대답했다.
이 자에겐 무엇도 기억되면 안 되었다.
앞으로 도련님과의 계승식은 물론이고,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몰랐다.
“……다음에 뵐 기회가 또 있겠군요.”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히스 레잔다르가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를 마쳤다.
“그럼. 손님께서도 유익한 시간을 보내다 가시길.”
이보와도 간단히 인사를 마친 히스 레잔다르가 나갔다.
고개를 돌려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데, 그가 나가자 한 사내가 들어왔다.
안면이 튼 이보 형님의 대리인이었다.
“내 손님이 있을 때는 들이지 말라고 분명히 일러두었을 텐데.”
“송구합니다.”
평소엔 상상도 못 한 이보 형님의 싸늘한 불호령이 내려졌다.
나는 두 사내의 대화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보 형님이 이렇게 화낼 때도 있구나.’
확실히 히스 레잔다르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정말 불쾌해하는 눈치였다.
대화를 마친 대리인마저 나가자, 나는 주변 상황을 탐색했다.
‘……히스 레잔다르도, 대리인도 이 복도엔 없어.’
그 사실을 완벽히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레잔다르 공자가 작위를 세습 받았나요?”
“최근에.”
썩 달가운 화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안경 속의 눈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의 형이 지병의 악화로 숨을 거두었거든. 그런데, 로벨.”
이보 형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듣던 내가 움찔할 정도로 짙은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긴장하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데, 그가 조급하게 물었다.
“너, 공작가에선 언제 나올 생각이야?”
“……이미 나왔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은 듯이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다음 말을 뱉을 땐,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경악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미안함과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 그동안 형님을 속였어요.”
“……나를?”
“사실…… 저는 여자예요. 본명은 로벨리아 플로르. 벨리칸의 플로르 상단이라고…… 아실지는 모르겠는데요. 거기에 둘째예요.”
“……그래. 그랬구나.”
의외로 담담한 반응에 어렵사리 고백하던 내가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왜 그랬냐는 흔한 질문도 없었다. 의심이 많고 신중한 이보 답지 않았다.
‘……이상해.’
생각해보면 이곳에 들어오는 처음 순간부터 이상했었다.
피곤함과는 별개로 오늘따라 그의 낯빛이 어두웠다.
기이한 기분이 들어 이보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눈 밑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원작에선 그가 에드릭을 포기하고 황태자와 손을 잡을 때, 저런 모습을 보인다고 했었지…….’
내 비밀이 귀에 제대로 안 들어올 정도로 중요한 거래가 있던 걸까.
대체 무슨 일인지 조마조마하는데, 이보가 불쑥 말했다.
“로벨. 나도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그 기세에 눌린 나는 히스 레잔다르가 있던 때보다 긴장했다.
이윽고 내 귀에 오랫동안 참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얘기가 들렸다.
“나는 네 비밀에 대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동안 모른 척 해왔어.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있기에 차마 한마디도 뱉을 수도 없었다.
“속인 건 더 있어. 네가 지하에서 그 석판을 해석하며 공작가에 헌신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알면서 모른 척한 거야.”
“…….”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겠다.”
이보 형님이 초조한 눈빛으로 물었다.
“로벨리아. 너도 디프였던 거야?”
너도라면…… 도련님의 정체를 눈치챈 건가?
아무리 이보를 신뢰한다 해도 에드릭이 얽힌 일이니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평소라면 단정했을 이보의 일그러진 얼굴도 내 불안감을 가중하는데 한몫했다.
그는 내가 여자라는 것보다 디프냐는 사실을 더 중요시했다.
하지만 절박한 표정을 보아하니 나를 이용하려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왜.’
의중을 파악하기 전에 말을 삼가야 했다.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나를 그가 재촉했다.
“너는 뺏기는 쪽이야, 빼앗는 쪽이야?”
이보는 이미 내가 디프라는 사실을 확신한 눈치였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다른 것까지 알아챈 듯이,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연이었다.
“히스 레잔다르가, 널 함정에 빠트리려 하고 있어. 도망치자. 당장 떠나면…….”
“……잠깐만요. 그 얘기 전에.”
나는 이보의 떨리는 눈빛을 보았다.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 역시 심장이 아프게 뛸 정도로 불안해지고 있었다.
“제가 안 빼앗겼다면…… 남은 디프인 도련님이 뭔가를 빼앗겼다는 건가요?”
***
히스 레잔다르는 호넷의 위엄을 자랑하는 건물을 응시했다.
저 안에 그동안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든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또 불쌍하게 보고 있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던 그는 사라진 목각 인형을 의식했다.
매번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했던 물건이 사라졌는데도 입에 웃음이 걸렸다.
그는 분신처럼 여기던 목각 인형을 저 로벨리아 플로르라가 찾아올 수 있도록 일부러 두고 왔다.
‘이보 마틴이 진실을 말할까?’
냉철한 그의 성격상 말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까 전전긍긍하던 것을 보면 또 아니다 싶기도 했다.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입으로 친히 알려줄 것이다.
넌 네 주인의 생명과 힘을 빼앗아 간 도둑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에드릭 덴카르트에도 이 사실을 고스란히 알려줄 것이다.
그걸 듣게 된 두 사람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땅을 치고 후회하며, 절망할 거다.’
그리고 자신에게 방법을 알려달라며 레잔다르의 대리석 바닥에 피가 나도록 이마를 박겠지.
이것이야말로 레잔다르의 수장다운 완벽한 복수였다.
시골에 쥐새끼처럼 숨었던 올리버 튜더를 찾아 죽일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 좋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 실례.”
어깨를 일부러 부딪치듯 다가온 자는 스텔 가문의 영식이었다.
히스 레잔다르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미안하다는 말과 달리 그를 내려다보는 샛노란 눈동자는 불손하기 그지없었다.
‘백작가 자제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설치고 있군.’
가진 거라곤 북부 세 거점으로 가는 길목의 설원, 제대로 된 영지도 없는 주제에.
히스 레잔다르는 진심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에 비해 레잔다르는 테루아에서 두 번째로 풍요롭다는 곡창지대와 제일의 포도밭을 가꾼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도 올해 첫 포도 수확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의 장소에서 숱한 귀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뜻깊은 축제에 초대할 가치가 없어 초대장도 보내지 않은, 고작 백작가의 미천한 놈과 입씨름할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히스 레잔다르는 안면에 미소를 띤 채 뒤돌았다. 몸을 완전히 돌릴 때는 미소가 가신 후였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넬라노가 호넷 상단의 건물로 들어갔다.
얼마 전부터 계속 발길을 들였으나, 상단주를 만나진 못했다.
그러니 오늘은 기필코 만나리라 각오하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다들 왜 그렇게 돌덩이에 집착하는 거야. 신경 쓰이게.’
짜증을 내면서도 정작 자신까지 집착하는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마넬라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간 이보 마틴의 행적으로 미루어 봤을 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로벨을 위해 물건을 마련해준다 해도 이토록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자가 아니었다.
“상단주님께선 손님을 대접하고 계십니다! 제발, 기다려주시면…….”
“또 그렇게 말하고 도망가려고?”
누굴 바보로 보나.
찾아올 때마다 이보의 핑계로 허탕을 치고 돌아갔던 마넬라노는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상단 대리인을 치우고서 이보의 개인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로벨?”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깨까지 닿는 은발이 평소보다 올라가 있었다.
소파에는 고개를 푹 숙인 로벨이 앉아있었다.
맞은편의 이보 마틴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건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뭐야. 왜 울고 있어. 네가 울렸냐?”
마넬라노는 이보 마틴을 거의 죽일 듯이 쏘아보며 로벨의 떨리는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이보도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열린 문 너머의 대리인을 쏘아봤다.
“누가 이 자를 들이랬지? 당장 내보내.”
“아, 이젠 귀족 취급도 안 해주겠다? 대단하신 상단 나으리네.”
당장이라도 주먹이 오가도 이상치 않을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이제껏 제대로 된 대화는 한 적 없으나, 연회와 사교계에서 숱하게 마주쳤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서로가 물과 기름처럼 결코 맞지 않는 상대란 걸 알고 있었다.
귀족적인 예법은 지키되 솔직한 성품의 마넬라노는 가식적인 미소를 띤 이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대로 이보는 그런 마넬라노의 방식이 거칠게만 느껴졌다.
그동안도 탐탁지 않았는데 지금 로벨을 울린 것도, 그녀에게 손을 댄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팽팽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아직 마넬라노의 팔에 갇혀있던 로벨이 말했다.
“……차.”
두 사내가 퍼뜩 놀라며 로벨을 응시했다.
그녀를 감쌌던 팔을 푼 마넬라노가 어깨를 잡아 물었다.
“로벨. 너 괜찮아?”
그런데 마넬라노와 이보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하얗게 굳은 로벨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완전히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본느로 가는 마차를 준비해주세요. 당장.”
본느.
레잔다르 소유의 핵심 지역이자, 테루아 최대 규모의 와인 포도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