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80)
1
“따로 한잔하지?”
결혼식 피로연 이후 떠나려는 이보의 팔을 마넬라노가 붙잡았다.
이보는 솔직히 탐탁지 않았다.
비교적 어릴 때부터 알아오긴 했다만, 마넬라노에게 호감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명망 높은 귀족가에서 외동으로 자라 온갖 사랑을 다 받아온 그는 대놓고 자기중심적인 면모가 컸다.
이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상이랄까.
그나마 재력과 북부 설원의 자원이 상당하여 거래는 했다만 더는 말을 섞기 싫었다. 로벨리아를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 신경 쓰였고…….
예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걸리적거리기만 한다는 소리였다.
‘평소처럼 핑계를 대고서 가야겠어.’
그러나 이보는 결심처럼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웃는 입매와 달리 마넬라노의 눈빛이 어두워서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답지 않게 묘하게 기가 죽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사실, 이보의 기분도 썩 좋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
이보는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순백의 사륜마차를 떠올렸다.
시련을 겪고 이겨낸 주인공들이 영원히 행복해지는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하게 아름답고 화사했다.
전통대로라면 에드릭은 덴카르트를 상징하는 흑색 마차를 타야 했지만, 그가 아내를 위해 환한 마차를 준비했다는 건 하객들이 알고 있는 바였다.
어디 마차뿐일까. 거기에 오르던 두 사람의 표정도 이야기의 주인공들다웠다.
결혼식 내내 이보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사람들의 환호에 섞여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지금은 속이 얹힌 듯 무거워졌다.
에드릭과 로벨의 혼인은 이미 예상했고, 포기하기로 분명히 결심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쉽지 않네.’
처음이자, 오랫동안 아껴왔던 마음인 만큼 생각처럼 버려지지 않았다.
어쩔까.
생각은 잠시였다.
오늘은 어쩐지, 마넬라노의 제안처럼 일탈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보는 진작부터 기다리던 수행인에게 눈짓으로 명령한 뒤에야 마넬라노에게 말했다.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갈 거면서 괜히 시간 끌긴.”
정말 안 맞는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역시나 마넬라노는 말 한 마디를 뱉어도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날 이보 마틴은 처음으로 스텔 가에서 술을 마셔보았다.
거래 자리가 아닌 만큼 이보는 괜한 말을 꺼내거나 마넬라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마넬라노도 별 기대는 하지 않은 듯이 연신 술만 들이켰다.
“…….”
“…….”
대화는 없었다.
마넬라노는 일찌감치 풍류를 즐기는 귀족이었고, 이보도 상단주의 신분으로 술자리가 잦았던 만큼 두 사람이 비운 술의 종류와 양은 꽤 되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그 후가 문제였다.
그 술자리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고…….
이렇게 몇 해나 지속될 줄은 아마 마넬라노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로벨. 넌 왜 처음부터 나만 싫어했어?”
이보는 카우치에 일자로 엎드려서 훌쩍이는 마넬라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다 큰 사내가 저러고 있는 광경은 썩 보기 좋진 않았다. 특히 징징거리는 소리는 더 그랬다.
호박색 액체가 가득 담겼던 잔을 다 비우고도 마넬라노가 훌쩍이자 이보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카우치에 벗어놓은 재킷을 던져 마넬라노의 뒤통수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물론 이게 오늘이 최초가 아니었다.
‘아주…… 뒤처리용으로 제대로 이용하는군.’
이보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적도 없었고, 딱히 술버릇이랄 것도 없었다.
반대로 마넬라노는 술에 강한 편이지만, 과음할 때는 저렇게 애처럼 변하곤 했다.
이보의 입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이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오지 말아야겠다.
깨끗하게 비운 잔을 내려놓고 가려는데, 마넬라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를 먼저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재킷 속으로 웅얼거리는 말에 이보는 동의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로벨을 먼저 만났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로벨은 이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묵과해준 점에 죄책감을 가졌는지, 따로 몇 가지 비밀을 일러주었었다.
[ 저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아팠었어요. ] [ ……. ] [ 디프의 힘과 관련된 거였어요. 그래서 살기 위해 에드릭에게 접근했던 것이고요. ]그러니 이보 마틴은 설령 가장 먼저 만났다 해도 로벨을 살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헛된 생각을 하던 이보 마틴은 자신이 했던 더 어리석은 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비본에는 디프의 숲에 소원을 이루어주는 나무가 있다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 나무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어린애도 안 믿을 얘기였다.
실제로 세계수 나무는 소원을 이루어주기보단 환상을 보여준다는 설도 있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이보는 어째서인지 그 불확실함에 기대었다.
신비로운 나뭇잎이 길게 드리운 거대한 나무에 서서 손으로 표면을 짚었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랬던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8살 때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아둔하긴.’
이보는 무의미한 행동을 싫어했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은 상인의 기본 덕목이었고, 애초에 이보는 기본이 안 된 자들을 혐오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혐오하는 행동을 했다. 에드릭과 로벨이 결혼하기 전의 일이었다.
‘……이젠 정말 끝내야지.’
이보 마틴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방에서 나섰다.
복도에는 횃불이 크게 일렁거렸다.
별들이 먹구름에 가려 유난히 어둑한 밤이었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세찬 바람 소리, 차가운 공기에 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보의 마음은 따뜻했다.
덴카르트 지역의 기후가 사계절 내내 온화해서 다행이었다. 아이를 가진 로벨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지낼 터이니.
이보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사람이다. 누군가는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짜증을 냈으나 그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랬던 만큼, 이렇게 바뀐 자신이 놀랍기만 했다.
“오늘 밤은 머무르시는 편이 어떠시겠습니까. 백작님께서도 찾으실 겁니다.”
마차에 타려는데 집사가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머무르라 종용했다.
이보는 상냥한 미소를 띤 채 거절했다. 그리고 마차에 타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
아무래도 오늘 독주가 과했던 모양이다. 두통은 마차가 수도를 벗어나고서도 계속되었다.
결국 참을 수 없게 된 이보가 주먹 쥔 손으로 마차 창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마차가 멈추었다.
이보는 술이라도 깰 겸 직접 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순간, 눈앞이 어둑해졌다.
“…….”
마차 문을 잡고서 한 손바닥으로 눈가를 눌렀다. 장갑의 부드러운 감촉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둔화되었다.
이보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오늘 일정을 빠르게 상기해냈다.
오전에 상단 거래처와 한 약속은 취소할 수 없고, 오후에는 그나마 미룰 수 있는 상대였다.
‘오전까지만 버티면.’
그런데 갑자기 바닥이 크게 흔들리더니, 몸이 땅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잠깐의 현기증이라 보기엔 과한 증상이었다.
흐릿해진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보였다.
‘……세계수 나뭇잎?’
묘한 형태를 띤 그것이 왜 여기 있을까.
이보 마틴은 그 의문을 끝으로 무거워진 눈을 감아버렸다.
이윽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일들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
이보는 자신을 빙 둘러싼 무리를 귀찮은 눈으로 응시했다.
“이보, 이 더러운 새끼. 여기에 숨어 있었냐?”
갈색 머리의 소년들이 한껏 비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잊을 리 없었다.
호넷 상단의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제 위로 태어난 형들이었다.
반쪽이긴 해도 그와 피를 나눈 형제들을 못 알아보는 바보는 아니었다.
웃음이 났다.
이런 것도 오랜만에 꾸는 꿈이라고.
어린 이보가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꿈은 익숙했다.
이들은 이보가 매일 아침 해를 보는 걸 두려워하며, 흉터를 가지게 된 원흉이기도 했으니까.
자기 전에 그토록 두려워했으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악몽을 꾸곤 했다.
물론 비가 막 쏟아질 듯이 우중충한 하늘이며 습한 날씨, 어제 막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마저 생생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악몽도 이런 악질적인 악몽이 없네.’
그런데 형제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이 새끼가 웃어?”
형제 한 명이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 즉시 이보의 웃음도 뚝 멈추었다.
아무리 악몽일지언정 더는 당해줄 마음이 없었다.
아니, 이게 정말 악몽이긴 한가.
오히려 저조한 기분을 풀 기회일지도 몰랐다. 과거의 앙갚음 정도로 말이다.
이보는 자신의 광대를 후려치려는 형제의 주먹을 잡았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단박에 꺾어버렸다.
뼈가 뒤틀리는 잔인한 소리와 동시에 비명이 울렸다.
“아아악!”
이보는 손을 잡고서 주저앉은 형제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차가워진 눈으로 다른 네 명을 응시했다.
아이답지 않은 그 눈빛에 절로 주눅 들었던 소년들은 그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씩씩거리다가 이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보는 쉽게 그들을 제압해냈다.
그는 덴카르트에서 하인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래 지속해서 체술을 단련해왔다.
그때 붙잡혀 무엇 하나 하지 못한 자신이 치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에게 매번 농락을 당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늘 보잘것없고 한심한 인간이라 여겨진 탓이다.
그러나 로벨과 생활하고, 그녀의 빛나는 눈을 보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녀가 늘 그런 눈으로 자신을 봐주길 바라왔다. 그러니 아리프라는 기사에게 부탁해 체술을 단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프 브로이어는 선한 얼굴처럼 마음이 여렸고 그에게 선뜻 간단한 체술부터 일러주었다.
후에는 상대의 살기를 읽고 피하는 법과 위협을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이보는 그 작은 가르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어느덧 입만 산 형제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엉엉 울거나 소리를 질러댔다.
‘……한심한 놈들.’
꿈일지언정 무어라 말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현실에선 그의 손에 죽은 이 벌레들이 뭐라고.
이보는 뒤에서 달려오는 사용인들과 사병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저택에 들어섰다.
저택 안에는 그가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그가 가주가 되었을 때, 이미 세상에 없던 자들도 섞여 있었다. 죽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보는 특별한 감상에 빠지진 않았다.
한낱 꿈이니까.
아무리 현실처럼 생생하다 해도 꿈일 뿐이다.
다만 깨기까지 피곤한 일에 휘말릴 의향은 없었다.
이보는 이 저택에서 가장 고요한 방에 들어갔다.
비본 마지막 장의 암호를 해석해야만 알아챌 수 있는 방이었다.
그의 부친조차 이곳의 존재를 몰랐다.
이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의자를 두고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서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