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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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넬라노가 수업을 바꾼 이유는 단 하나, 로벨리아였다.
“두고 봐. 그 평민 계집애를 골탕 먹이고 말겠다고.”
어느 날, 수업을 마친 교정.
마넬라노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정문으로 향하던 중 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 모여 있는 무리 속에서 후작가 자제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떠벌리는 소리였다.
그는 저 멍청한 낯짝이 등진 가문을 금방 떠올렸다.
‘로렌스 후작가.’
그리고 저자의 이름은 앤서니 로렌스.
일찌감치 장남인 형에게 작위 계승 순위가 밀리고, 아카데미에 떠밀리듯 들어온 놈이다.
‘그것도 뒤에서 일등으로.’
거의 가문에서 내버린 자식이라는 뜻이다.
그것만으로도 로벨리아 플로르에게 반감을 품을 이유는 충분했다.
귀족이라는 허울 빼곤 그에 비해 로벨리아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게 잘났으니까.
자신들이 그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으니 폄하하여 저들이 있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무능한 새끼들.’
한심하게 바라보던 마넬라노는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수도에 거처가 없는, 평민인 로벨리아와 달리 그는 타운하우스에 제 거처가 있었다.
기숙사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수업이 공강일 때는 집으로 가서 편히 쉬곤 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거기다 두고 보자니, 무슨 삼류 시정잡배나 할 소릴 지껄이고 있잖아.’
마넬라노는 픽 비웃었다.
‘더 두고 봐도 바뀔 리가 있나.’
실제로 로벨리아는 귀족들에게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기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그들의 배알을 꼬이게 했다.
마넬라노는 그 꼴을 보고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사롭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렸다.
“내가 누구겠어? 조교들에게 명령했거든. 교수에게 조별 과제를 하게 부추기라고. 친목도 도모할 겸, 아카데미에 새 변화를 줄 겸 해야 한다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넬라노는 이내 걸음의 방향을 바꿔 나무 뒤에 숨었다.
뒤이어 들리는 이야기는 더 꺼림칙했다.
“그 계집애가 조원을 구하지 못하게 이미 다른 평민 놈들한테 다 엄포를 놨지.”
“그 교수가 꼬장꼬장하지 않아? 그러다 강제로 조를 짜주면 어쩌려고.”
“그 수도 써놨지. 뭐, 만에 하나라도 교수가 강제로 2인 1조를 짠다면 그 조원을 찾아가야지.”
저놈은 어떤 식으로든 과제를 방해할 생각이었다.
만약 교수가 강제로 조를 짜면, 로벨리아의 조원을 찾아가 과제에 비협조하게 만들어서 그녀에게 최저점을 안겨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것 참 기발하군요!”
“조별 과제라면 그 평민도 어쩔 수 없지.”
비열한 웃음소리가 교정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마넬라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
매번 식사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허겁지겁 도서관과 강의실을 뛰어다니는 여자애가 떠올랐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고생을 하고 다닌다고 했지, 아마.’
그리고 얼핏 소문을 들었을 때, 장학금에는 학비와 기숙사비만 포함되므로 식사 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한다고 한 것도 같았다.
그렇게 개고생을 하는데 저런 놈들한테 당해서 성적이 떨어진다면…….
물론 로벨리아야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단순한 가정만으로도 왠지 짜증이 났다.
눈매를 굳힌 마넬라노는 고개를 올려 중간층의 학과실을 응시했다.
“……평민 계집들이야 뻔해. 위로해주는 척 적당히 맞춰주면서, 꿰어내면 되지.”
그러다가 뒤에서 음흉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오늘 검술 수업 후 바지 주머니에 대충 꽂아둔 장갑을 꺼내 들었다.
그걸 끼면서 앞으로 슬슬 걸어가는데, 기척을 느꼈는지 소년 무리도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들 마넬라노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야 어디서든 환영받는 인사였다.
빼어난 외모와 훤칠한 키는 물론이고, 소년다운 적당한 장난기와 귀족의 기품을 동시에 겸비했다.
이 아카데미든 어느 연회장이든 함께 있으면 즐겁고 뿌듯했다.
하지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가끔 특별한 연회나 카드 게임 장소에서 마주치긴 했어도 사석에서 오랫동안 함께하긴 어려웠다.
특히 다른 반이니 수업 전후로 안부 인사나 가끔 하는 게 전부였다.
소년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했다.
우리 얘기를 엿들었나. 꽤 솔깃했나 본데?
아카데미는 대륙 각지에서 입학한 수천 명의 학생을 교육할 정도로 넓긴 해도 탁 트인 공간이 많았다.
그러니 다른 학생들도 마넬라노가 로벨리아에게 대화를 거는 모습을 목격했고 자연히 호기심을 가졌다.
그때부터 저자가 자신들과 한패라고 생각했다.
마넬라노야 워낙 사교적으로 굴긴 하지만 저렇게 매번 찾아가며 인사하는 상대도 드문 것이다. 게다가 평민 여자를.
다들 아무리 스텔가의 자제라도 사내놈은 사내놈이라고 수군거렸다.
도도해 보이는 평민에게 수작을 부렸다가 대충 꼬시고 버리려는 속셈일 테지.
아니나 다를까. 마넬라노도 순순히 긍정하며 다가왔다.
“재미있는 얘기들을 하고 있던데.”
한편 혹시 정해둔 놀잇감을 선점하려는 자신의 태도에 불쾌했을까, 내심 긴장하던 후작가의 자제가 반응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마넬라노와 몇 번 인사했어도 사적인 대화는 전혀 나눈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자신이 후작가 자제라도 스텔가의 위세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그는 늘 주눅이 들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친목을 도모할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대강 들으셨겠지만 그 평민 계집애 얘기입니다. 그게 곧 질질 짜면서 제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게 될 건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게 영식 취향입니까?”
기쁘게 긍정하려던 영식은 뒤이은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질질 짜면서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건, 보기에 좀 상스럽지 않나. 뭐, 그게 취향이라면 맞춰드릴 의향은 있습니다.”
그 말에 시시덕거리던 후작가의 자제는 뺨에 후려치듯 날아온 장갑에 놀라고 말았다.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 멍하니 있으려니, 바로 옆 건물을 향해 턱을 까딱하는 마넬라노가 보였다.
그날이 나름대로의 평화를 유지하던 아카데미에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결투가 열린 날이었다.
* * *
“아, 이게 바로 흑빵이라는 음식인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로벨리아는 한숨을 참느라 힘들었다.
테루아의 문화, 교양 수업의 명칭에서 내려진 과제대로 그들은 수도의 문화를 체험하러 나왔다.
그중에서도 먼저 대시장에 왔는데 마넬라노는 내내 신기한 눈으로 가판대를 응시했다.
‘하긴, 스텔 백작가는 돈이 넘쳐흘러서 이런 빵을 먹어본 적도 없긴 하겠지.’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며 마넬라노를 살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로브를 걸쳤다만 왠지 모르게 귀티가 흘렀다.
회색 로브의 천 재질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 그보다는 훤칠한 키 때문인가.
어쨌거나 신기한 눈으로 흑빵을 가리키는 그에게 로벨리아는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알면서 뭘 묻고 그러세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그래. 그보다, 넌 보통 뭘 먹지?”
로브 아래로 언뜻 보이는 눈은 ‘설마 평소에 이딴 걸 먹고 사는 건 아니겠지??’라고 묻고 있었다.
……짜증 나네, 정말.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가판대 주인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긴 하지만 속이 영 부글거렸다.
로벨리아는 이놈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대충 다른 빵 몇 가지를 눈짓했다.
마넬라노는 그마저도 신기한지 턱을 만지작거리며 ‘흐음.’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렇군.”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한 뉘앙스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여간, 시험 문제보다 어렵고 부담스러운 소년이었다.
로벨리아는 그 후에도 그를 데리고 오전 내내 시장 곳곳을 누볐다.
상인의 딸로 자란 그녀와 달리 역시 그는 이런 시장 자체가 초행인 모양이다.
작은 가판대 하나하나가 신기한지 눈을 떼지 못했다.
‘좀…… 의외네.’
사실 그녀는 오기 전부터 골치가 아팠었다.
발 딛기도 힘들 정도로 인파가 쏠린 이 시장에 호위 기사며 시종들을 대동하면 어쩌나.
더럽고 냄새난다며 투덜거릴 텐데 그걸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괜히 상인들과 싸우면 어쩌나 등등…….
아무리 시험 점수를 위해 동행한다지만 마넬라노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혼자 가고 보고서도 홀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그 심정을 마넬라노에게 꺼냈을 때,
[ ……과제를 지어내겠다고? ] [ 아니, 지어낸다는 건 아니고요. 제가 직접 다녀와서 혼자 잘 정리하겠다고요. ] [ 둘이 하라는 걸 혼자서 하는 게 지어내는 거지. 너 제정신이야? 네가 그러고도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고 할 수 있어?? ]그는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을 보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로벨리아는 솔직히 너무너무 억울했다.
귀족가 자제들이 가정교사에게 과제를 대신 하라고 시킨다거나, 조별 과제가 있으면 가장 신분 낮은 조원에게 몰아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마넬라노는 직접 과제를 해온 모양이다.
하긴, 마넬라노는 보기와 달리 머리도 좋다고 들었었다.
특히 검술에 아주 능하다고.
‘……괜한 걱정을 하다 잠도 못 잤네.’
오히려 마넬라노 한 명만 상대하니 편하다 싶긴 했다.
주기적으로 시비를 걸고, 도서관까지 쫓아와 공부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있어서 더 그랬다.-마넬라노는 때와 장소를 알아서 그런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또한 마넬라노와 함께 다니니 그의 인기 덕분인지, 다들 흘끗흘끗 보기만 하고 전처럼 들러붙지 않았다.
솔직히 편하기야 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마넬라노만 상대하는 게 나을지도……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로벨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넘어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