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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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착한 곳은, 공자의 침소 앞.
그는 잠시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자 공자가 그를 담담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고작 탁자를 사이에 끼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전보다는 나은 대우였다. 전엔 문턱 안으로 발끝 하나 들여보내지 않았으니.
마넬라노는 다른 이들과 함께일 때와 달리 웃음을 억지로 꾸미지 않았다. 고맙다고 하거나 입에 발린 소리를 뱉지도 않았다.
그리고 에드릭 역시 늘 그렇듯이 마찬가지였다. 그는 약간 경계하면서도 서늘한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먼저 말문을 뗀 것은 마넬라노였다.
“로벨이 공자에게 어떤 것 같습니까.”
질문의 요지를 알 수 없는 에드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넬라노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하고 싶은 얘길 돌려 말했다.
“글도 제대로 모르는 주인에게 고어를 아는 시종이라.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고집만 부리는 공자와 천박한 놀이만 하며 끼고 있기엔 아깝다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신지.”
어둑해진 녹색 눈동자는 녹음이 완전히 말라붙은 여름 같았다.
그러나 마넬라노는 남의 사정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탐내는 것을 썩히는 어리석은 이에게 충분한 대접을 해줄 의향은 조금도 없었다.
스텔 가문이 설원의 눈밭에서 마정석을 발견해낸 것도, 그들이 그 안에 숨겨진 가치를 알아낼 수 있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스텔에서 가장 훌륭한 피를 타고난 주제에 남들에게 누구보다 무심했던 마넬라노였지만, 현재는 그 피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로벨의 찬란한 앞날이 보였다. 그걸 이끌어주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라 일시적인 충동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은 진심이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겠습니다. 로벨을 아카데미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보내주십시오. 공자께선 아무것도 해주실 수 없다면 차라리 보내는 게 그를 위해 낫지 않겠습니까.”
“…….”
“알아보니 그 목발도 로벨의 사비로 찾아왔다 하고.”
공작부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해도, 그걸 받은 이는 로벨이니 로벨의 돈이다.
로벨이 그 귀한 하사금을 순전히 제 주인에게 썼다는 사실은 저택 내에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면 공작부인께서 심히 유감을 표하셨을 것이고…… 아무리 시종이라지만 앞으로 너무 험난하지 않겠습니까.”
마넬라노가 이렇게 나선 이유였다. 다른 시종들을 통해 알아본 바로, 로벨은 이 공자를 지나치게 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작부인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방계인 그는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넬라노는 그 후에도 연속해서 에드릭을 자극했다.
다른 자들은 공자가 생긴 것처럼 예민하고 우울한 놈이라고 했었다.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울거나, 화를 내면서…….’
그런데 에드릭은 상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또 깊게 안도한 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랬구나. 로벨이 네 제안을 거절했던 거야.”
예상치 못한 미소도 볼 수 있었다.
기쁨이었다.
소년의 모습이 고혹적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런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마넬라노의 기분은 깊게 가라앉았다.
* * *
나는 중앙 정원에 서 있는 마넬라노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소매도 풀고 약간 흐트러진 차림이지만 맵시가 훌륭했다.
그보다…….
‘……이따 떠나는 애가 왜 여기서 한가하게 저러고 있어?’
다시 보니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간 또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가 내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중요한 손님을 보고서도 도망가는 무례한 짓은 네 멍청한 주인한테 배운 거야?”
왜 여기다 요새 잘하고 있는 우리 도련님을 걸고넘어져?
아니, 그보다 오늘따라 마넬라노가 한층 더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를 잘 안다고 말할 순 없지만 평소에 사교적인 척하고 다니는 것쯤은 아는데, 오늘은 기분이 저조한 티가 역력했다.
얼마나 인상을 썼는지 매끈하던 미간에는 희미한 잔주름도 보였고.
그렇다고 내가 아픈 걸 참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단 이거부터 놓고 말씀해주세요, 마넬라노 도련님. 제가 좀 아픕니다.”
“마넬.”
“…….”
“마넬이라고 불러. 그럼 놔줄 테니까.”
이것까지 거부하면 진짜 짜증 낼 기세였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 저녁엔 바로 떠난다니까. 한 번만 봐주자.’
앞으로 평생 가야 한 번도 안 볼 사람이니까.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네, 마넬 도련님.”
“그 도련님 소리는 빼고.”
“……원하신다면 그러죠. 마넬 님.”
하여간 성격 참 별나다니까.
약간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지며 흘겨보자 그가 재밌다는 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째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거칠긴 해도 딱 십 대 소년에 어울리는 청량함은 보였다.
예의 바른 백작가 자제 웃음보다 저게 더 잘 어울리기도 했고.
‘저게 나중에 자라나면 그 어마무시한 집착남이 된다는 거지…….’
현재로선 의아하다.
뭐, 다른 놈들도 그렇기야 하다만…… 이놈도 이놈이란 말이지.
내가 본인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는지도 모르고 마넬라노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난 원래 새것만 써. 남의 손 탄 건 딱 질색이야.”
“……부럽네요. 저도 헌것 버리느라 귀찮은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데.”
하나도 궁금하지 않던 얘기지만 일단 맞장구를 쳐줬다.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랬더니 마넬라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그래도…… 하나쯤은 감내할 의향이 있어. 내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하나쯤은.”
“……?”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마넬라노가 뜬금없는 자랑질을 이어갔다.
“수도에선 매일 대연회가 열려. 난 늘 거기에 참가할 자격이 있고. 볼거리, 놀 거리도 많고 세상 온갖 귀한 것들이 다 모여있지. 거기서 살면 지루할 틈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야.”
“……그렇군요!”
내가 멀뚱멀뚱 듣다가 박수를 짝짝짝 치자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를 곤란하게 바라보던 그는 잘생긴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턴 아카데미와 수도 타운 하우스에만 있을 거다. 너도 어디든 내 이름을 대고 찾아와. 언제든 방을 내줄 테니. 그리고…….”
말을 하던 그가 불시에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내 등을 도닥여주면서 무언가를 살피듯 시선을 올렸다.
“……혹시 더위 드셨어요?”
“아니.”
내 질문에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기 싫은 티를 있는 대로 내더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지막 인사는 필요할 것 같았다.
“마넬 님, 모쪼록 우리 도련님처럼 좋은 남자…… 아니, 사람 만나세요.”
내 말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가, 이내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불쾌한 악담을 들은 사람 같았다.
“네 주인만큼 성격 더러운 놈은 어디에도 없을 거야.”
흘리듯 투덜거린 이야기는 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넬라노가 떠난 며칠 후, 도련님은 후계자 수업을 받겠노라 말했다.
* * *
귀족 소년들이 돌아간 이래 도련님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밥도 잘 먹고, 약은 더 잘 먹고.
심지어 의원이 진찰할 때는 더 빨리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먼저 물어본 적도 있었다.
‘……또래 애들을 봐서 자극이라도 되었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아했으나 곧 기쁨만 남았다.
도련님 상태가 호전된다면 그 본인이나 내게 결코 나쁘지 않으니.
더불어 기특하기도 했다.
아픈 사람에게 내일이 어떤 의미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력감을 이겨내려고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오늘도 잘 먹네.’
침대 위의 간이 탁자에서 식사하는 도련님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요새 그의 체형이 달라졌다.
전에는 주변 사람이 안쓰러워질 정도로 말랐었다면, 이제는 뺨이며 여기저기 살이 약간은 올랐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다.
핏줄이 비칠 정도로 창백하던 피부에는 혈색이 돌았고, 차분하고 아름다운 금발 아래 짙은 음영이 지던, 가끔은 음침하던 눈동자도 생기를 품었다.
최고급 품종의 꽃들이 넘치는 덴카르트에서도 도련님보다 아름다운 꽃은 없었다…….
‘앞으로 도련님 때문에 울게 될 남자들이 불쌍해지는군.’
“……왜 그렇게 봐. 나한테 할 말 있어?”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도련님이 식기를 내려놓고서 물었다.
내게 집중하는 눈빛, 전과 다르게 차분해진 목소리에도 희미한 온기가 묻어났다.
그리고 그 변화는 종종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그대로 턱을 괸 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예뻐서 봤어요.”
“……!”
“왜 그런 놀란 표정을 지으세요. 그냥 도련님 예뻐서 봤다니까. 도련님은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 모르셨어요?”
“……!!”
“아……. 이 중요한 걸 왜 이제야 아셨을까. 도련님 제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쁜데. 아마 다음 생도 그럴걸요.”
한동안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도련님은 손등으로 붉어진 뺨을 문지르더니 식사를 마저 했다.
직전보다 다소 거칠어진 스푼질에 수프가 여기저기 튀었다.
‘부끄러워하긴. 귀엽게.’
손수건으로 그의 뺨에 묻은 수프 방울을 닦아주었다. 그마저도 이제 도련님은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고는 하지만, 참 신기할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그런데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이건…… 지금으로선 조금 부정적인 의미의 변화이지만.
‘……후계자 수업까지 받는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