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28)
28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충실한 기사의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자 공작부인이 먼저 후원의 길을 따라 나갔다. 여유롭고 가벼운 걸음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리프는 그녀를 부르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
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커다란 가시처럼 걸렸다.
‘공자가 그와 시종 로벨의 이름을 쓴 종이를 액자에 걸어두었습니다, 공자가 한 걸음을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 속으로 몇 번이나 말하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이제 쫓겨날 아이들이야…….’
이 저택에서 처음으로 그 한 뼘 남짓한 작은 액자 하나 가졌다고, 고작 한 걸음 움직였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설령 공작부인이 알면 노할 일이라도…… 이 정도는 감싸도 되지 않을까.’
주군의 명을 어기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명백히 그릇된 행위.
하지만 이미 걷지도 못하는 약자를 상대로 비겁한 짓을 일삼으며 기사도를 훼손한 그이니 이 정도 위선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긴 상념 끝에 아리프는 후원을 나섰다. 그 안색이 전에 없이 우울했다.
입구쯤 다다르자 백조 형태의 토피아리 옆에서 빵을 먹는 소년이 한 명 보였다.
갈색 종이봉투에 담긴 빵을 우물우물 씹자 볼이 금세 볼록하게 부풀었다.
그러고 보니 눈도 크고, 다람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웃을 땐 여우 같은데.
기척을 느꼈는지 로벨의 보라색 눈이 곧 아리프에게 향했다.
곧 그 눈이 보기 좋은 반달로 휘었다.
“아리프 형.”
로벨은 반쯤 남은 빵을 대충 봉투에 넣어 묶으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새로운 봉투를 그에게 냉큼 건넸다.
“자요. 오늘 잘 구워진 거래요.”
무의식중에 빵 봉투를 받았다.
굽자마자 챙겨왔는지 갈색 봉투는 약간 눅눅해져 있었다.
하지만 속에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빵보단 이 시간에 로벨이 왜 여기에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유를 물으려고 하는데, 로벨이 빨랐다.
그가 앞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가요.”
“……예.”
어차피 두 사람의 목적지는 같았다.
목적은 가는 길에 물어봐도 되었으므로 아리프는 그의 걸음 속도를 맞춰 움직였다.
그러면서 어깨 아래쯤 있는 소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입가에 묻은 빵가루도 아직 떼지 않았다. 감시하러 왔다기엔 영 허술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로벨이 말했다.
“형 잘생긴 얼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알잖아요, 저 형한테 관심 많은 거. 형도 저한테 관심 많고.”
“…….”
아리프는 가끔…… 이 로벨이라는 소년이 공작부인보다 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감하게 생각하는데 나란히 걷던 로벨이 고개를 돌려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얼굴에는 주인에 대한 우려가 한 점조차 없었다.
그렇다. 공자의 소식에도 로벨은 누구보다 한결같았다.
그 사실에 아리프는 조금은 안도했다. 두 소년의 친밀한 사이를 알기 때문에 내심 우려가 되었었다.
그의 주인에게 해를 가하려는 입장에선 우스운 위선이지만.
“그런데 형은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사실인데요, 뭘. 저도 형 잘생긴 얼굴 덕분에 요샌 늘 고마운걸요.”
정말로 기분 좋은 얼굴이라서 아리프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아리프는 누군가의 살기를 느끼고 고개를 올렸다.
오랜 시간 감각을 단련한 기사만이 감지할 수 있는 기운이었다.
2층 테라스였다.
그곳에서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는 공자가 보였다.
다른 이는 몰라도 아리프는 그의 눈빛에 숨겨진 진의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을 거의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아리프는 곤란해진 심정으로 공자에게 묵례했으나, 공자는 이제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눈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지만,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단 하나였다.
결국 아리프는 입을 뗐다.
“……저는 들를 곳이 있습니다.”
“어디요?”
정면만 보고 걷던 로벨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아리프는 느릿하게 답했다.
“……연무장입니다.”
오늘처럼 볕이 강렬한 날에는 오후 훈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로벨과 반대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의아하게 아리프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은 로벨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그래요. 전 먼저 일이나 열심히 하러 가야겠어요.”
그건 아무것도 안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실제로 근래 로벨은 에드릭에게 글을 알려주다가 자주 졸았다.
로벨의 역할은 몇 가지 알려주고 그가 제대로 썼는지 검토하는 것까지였기 때문이다. 에드릭이 글을 쓸 때는 봐주다가 눈이 슬슬 감겼다.
문 앞에서 대기하다가, 기척 없이 살짝 문을 연 적이 있었다.
그 틈으로 두 소년을 엿보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을 뻔한 로벨의 이마를 받쳐주는 에드릭이 보였다.
오른손잡이인 공자는 그때 왼손으로 아슬아슬하게 만년필을 움직였다. 손은 종이 위에 있었으나 눈은 시종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리프는 공자가 웃는 얼굴을 그때 처음으로 봤었다. 봄에 막 돋아난 새싹처럼 여리고 자그마한 미소였다.
그 모습이 선명히 각인되어 마님에게 오늘 일을 알리지 못했다.
“아무튼, 아리프 형, 고생하세요.”
아리프는 격려하듯 주먹 쥔 손을 흔드는 로벨을 등지며 쓰게 웃었다.
이 빵은 먹으면 체하겠으니 다른 동료에게나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도련님은 내가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오늘 메뉴가 별로였나? 아니면 나 없는 동안 림슨 형이 또 무슨 재미없는 얘기를 했나??’
옆에 앉아서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도련님이 나를 복잡하게 바라보다가, 우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는 침대 옆자리를 눈짓했다.
올라와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몰라도 둘이 있을 때 가끔 도련님은 내게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내가 천둥 번개가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던 다음 날부터였다.
나는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처럼 침대에 잽싸게 올라갔다.
그러자 도련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유의 화려하면서도 우울한 낯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로벨. 그 선생은 너였던 거야?”
“저였으면 좋겠죠?”
입술을 꾹 다무는 그가 ‘그건 그렇지만…….’이라고 긍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애초에 성립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아무리 에드릭이 나를 신임한다 해도 정식 교사로 쓸 수는 없지.
실실 웃으며 은근슬쩍 에드릭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당황했는지 손을 빼려다가 그냥 내버려두었다.
언제나 손발이 차가운 도련님에 비해 나는 사시사철 펄펄 끓는 난로와 같다.
도련님은 그래서 내가 손을 잡는 것도 괜찮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요새 건강에도 부쩍 관심이 커졌고…….’
참으로 바람직한 변화다.
‘원작이었다면 지금쯤 마님에게 줄곧 당하고만 있었을 텐데…….’
씁쓸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되도록 내가 과거에 죽었던 것과 원작의 내용은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지금은 도련님과 내 현재에 충실해지고 싶으니까.
“집사에게 들었어. 내가…… 곧 다른 곳에 갈 것 같아.”
도련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내 손을 놓지도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마른침을 삼키다가 내게 물었다.
“그래도…… 따라와 줄 거야?”
“왜 당연한 걸 물으세요?”
“…….”
“도련님 없으면 저도 없는데.”
사실이다.
원인 모를 빙의와 회귀, 그리고 다음엔 어떻게 될지 내가 알 리 없었다.
만약 도련님과 떨어져서 내가 죽고 나면 다음번에도 회귀가 있을까.
글쎄.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정말이지?”
“저 지금 왜 이렇게 서운하죠?”
안 믿어주니 서운하다는 뜻으로 말하자 도련님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중얼거렸다.
“……믿을게.”
“예. 저 말고 다른 놈은 하나도 믿지 마세요.”
정말이다.
아리프 형도 최근엔 우리를 감싸주지만…… 또 언제 변심할지 모르니까.
아, 그래도 림슨 형은 좀 다르지.
나는 더부룩한 갈색 머리에 험상궂은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림슨 형은 반쯤 믿어도 돼요.”
“……그 시종이 네게 특별해?”
그런데 조금 전까지 예쁘게 휘던 눈동자가 갑자기 가늘어졌다.
‘……림슨 형이랑 잘 지내던 거 아니었나?’
조금 의아했으나, 곧 그의 의중을 알아냈다.
도련님한텐 친구는 내가 처음이니, 다른 사람과 더 친하게 지낸다고 하면 서운할 것이다.
나는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특별하죠. 특별하고말고요.”
“…….”
“그런데 저한텐 도련님이 가장 특별하죠. 비교 불가.”
약간 뜸을 들이고서 말하자 도련님이 ‘뭐야, 그게…….’라고 기운 없이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다 보인다. 입꼬리 계속 올라가는 거.
귀엽네, 귀여워.
나도 간질거리는 웃음을 참느라 흠흠, 헛기침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 내일 잠깐 나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