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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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에밀리 덴카르트.
덴카르트의 안주인인 그녀는 후원과 자선 사업 등 모범적인 일에 가장 먼저 앞장서며, 귀족 사회에서 수많은 존경과 찬미를 사고 있다.
어디 그뿐일까.
희귀한 백금발에 고급스럽고 청초한 외모의 소유자이며 다방면에 뛰어난 재원으로, 혼인 전부터 많은 귀족가에서 탐낸 며느릿감이기도 했었다.
“네가 로벨이구나.”
그러니까, 지금 내 앞의 공작부인, 에밀리는 그 대단한 명성을 그대로 증명했다.
차를 마시는 동작은 흠잡을 데 없이 우아했고, 적당히 그려진 미소엔 기품이 넘쳤다.
고상한 귀부인의 정석이랄까.
하지만 속지 말자.
에드릭 모자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매수하여 독약을 타게 한 것도 공작부인이고, 앞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잡을 장본인이다.
그런 자였다.
누구에게도 의심조차 사지 않을 만큼 철저하고 교묘한.
‘만약 나도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속아 넘어갔겠지.’
“듣던 대로 아주 총명해 보여.”
……역시 악역 주연 중 하나인가.
악랄함과 별개로 보는 눈은 제법 있는 것 같군?
뭐, 어차피 에드릭의 시종이 되었으니 나를 한 번 정도는 호출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다만 에드릭 방보다 몇 층 더 올라오는 게 귀찮기도 했고…….
지금은 에드릭 곁에서 치유하고 싶기도 했는데…….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곳에 마님과 앉아 있어도 되는지요…….”
귀찮은 속내와 달리 잔뜩 긴장한 것처럼 머리를 더 아래로 조아렸다.
어린 나이답게 매사 열정적이지만, 어리숙한 면모가 남아있는 풋내기로 보이려 했다.
‘그래야 얕잡아 보고 빈틈을 낼 거야.’
다행히 의도처럼 그럴듯하게 비친 모양이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준비된 다과 따위를 권하며 긴장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나는 눈치를 보는 척하면서도 슬금슬금 접시에 손을 뻗어 쿠키를 하나둘 집어 먹었다.
‘아, 맛있다.’
감동적인 맛에 자연히 진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그녀의 견고하던 낯도 서서히 느슨해졌다.
내가 접시를 반쯤 비우자 그녀는 시녀에게 쿠키를 따로 포장해오라 명하기까지 했다.
분위기는 그녀의 의도대로 무척 훈훈해졌다.
“아주 귀여운 아이구나. 편히 더 들렴.”
“이, 이제 충분합니다. 그런데…… 저…… 마님. 저는 왜 부르신 건가요?”
겁에 질린 척 머뭇거리며 묻자 그녀는 무척 너그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들어온 이래 에드릭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구나.”
“그, 그건…….”
“다 들었단다. 집사에게 네 공을 치하하라 일러두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만히 있을 순 없더구나. 내 아들 일이니 네게 직접 성의 표시를 하고 싶었단다.”
마님의 전속 시녀들이 그 ‘성의’가 들었을 법한 가죽 가방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쿵, 쿵.
묵직한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상당한 재물일 것 같다.
‘아하. 요컨대 나를 풀매수해 보겠다는 소리네?’
“이, 이런 걸……!”
나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제가 받아도 될지……. 저는 한 게 없는데요…….”
……물론 챙길 건 챙길 거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민망할 정도로 한 게 없긴 했다.
요즘도 도련님은 대체로 침대 이불 속에서 살고 있거든.
“겸손함도 갖춘 아이구나. 네가 그 아이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준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
월급 루팡과 다름없는 내 상황을 알 텐데도 그녀는 최고급 사탕 같은 목소리로 나를 살살 달랬다.
입 안에 굴리기엔 너무 달고 부드러워서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앞으로도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면 꼭 말해주렴.”
나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그러겠노라 맹세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 * *
에드릭의 침소로 돌아왔을 땐 깊은 밤이었다.
이미 의원 여럿이 그의 침소에서 차례대로 진맥하고 있었다.
그 과정이 짜증 날 법도 한데 그는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침대에 누운 그의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잔뜩 망가져서 줄이 다 끊어져 버린 인형처럼 보였다.
‘그래……. 내 병도 문제지만, 도련님 병과 상황도 문제란 말이지.’
쓴 숨을 삼키며 에드릭의 방을 훑어봤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호화로운 이곳에 온전한 그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도 황제의 부름을 받아 영지를 떠난 마당에 그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어쩐지 속이 답답해졌다.
원작에선 ‘덴카르트 대저택에서도 에드릭의 그늘은 가시지 않았다.’ 정도로만 이 시점이 서술되었으나…….
‘이건 뭐, 실제로 보니 염전 밭이 따로 없잖아.’
열아홉, 스물아홉에 걸려도 억울한 희귀병이다.
그런데 고작 아홉 살에 이런 병에 걸려서 혼자 참아내야 하다니…….
그때, 에드릭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윽.”
“도, 도련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됐어.”
짧게 부정한 그가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았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정신력이다.
‘페러스에 걸렸는데도 소리 한 번 내지르질 않는다니…….’
‘악마의 병’이라 불리는 페러스는 발병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성 질환이다.
처음에는 발목이 굳고 썩는 것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면 다리와 허벅지, 심장과 얼굴까지 그 끔찍한 병세가 전이되었다.
그 고통의 강도나 병세는 날마다 달랐다.
어느 날은 얇은 단도로 전신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고, 또 다른 날은 생살을 불에 태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걸린 환자들은 제멋대로인 악마가 끔찍한 장난질을 한다며 치를 떨었다.
‘……후우.’
나 역시 진저리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나보다 어린 아이가 혼자 저렇게 참는 걸 보니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나는 매번 엄마와 아빠, 오빠한테 매달려서 울곤 했는데……. 언젠가는 차라리 죽여달라고도 했었고…….
“힘드시겠지만 약과 식사를 규칙적으로 챙기셔야 합니다. 또한, 화를 내시는 건 안정에 좋지 않으니 유념해주세요. 자칫 잘못하다간 의식을 잃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 약을 좀 먹어. 그럼 아픈 건 그나마 덜할 것 아니야…….’
의원도 나처럼 답답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도련님. 제발 명심해주십시오.”
그러나 에드릭은 의원의 첨언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나는 그 광경을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지켜보다가, 바로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의원에게 슬며시 물었다.
“저기, 의원님. 제게 인공호흡 방법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걸 네가 왜 물어?”
아픈 와중에도 내 말은 용케 들었는지 에드릭이 불쑥 고개를 올렸다.
병색으로 몽롱하게 흐려졌던 눈빛이 한층 선명해져 있었다.
역시 얘한텐 좋게 말하는 것보다 이게 잘 먹힌단 말이지.
나는 사납게 이를 가는 그를 향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어조로 답했다.
“혹시 도련님이 쓰러지셔서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조치를 해야죠.”
“넌 내가 쓰러지길 바라?”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제가 도련님 시종인데 도련님께서 지금처럼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다가 쓰러지실 경우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염려치 마세요. 제가 제일 먼저 나서겠습니다.”
그러면서 오므린 입술을 도발적으로 쭉 내밀자 도련님이 질색하며 고개를 반대로 휙 돌렸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약 좀 먹자.
시간이 흘러 모두 진찰을 마치고 나가자 도련님과 나를 포함한 몇몇 시종만 남았다.
그런데 그사이에도 칼날처럼 예민해진 도련님은 우리가 건네는 약들을 다 거칠게 쳐냈다.
또 시작이었다.
“이딴 거 하나도 필요 없으니…… 내보내! 난 여기가 싫어!! 날 여기서 내보내라고!!!”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의 지랄맞은 패악질이 아닌, 발악으로 보였다.
에드릭의 침의 아래 충격적일 정도로 마른 발목과 썩어가듯 검게 물든 발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무례함과 별개로 안쓰러울 수밖에.
다른 시종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평소보다 깊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리를 지켰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약병들만 여기저기 부딪치고 바닥에 엉망으로 굴렀다.
나는 근처에 구르는 약병을 하나 주워서 손안에 굴렸다.
어느덧 교체한 약병은 비싼 값을 하는지 작은 흠집 하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서 생각을 가다듬은 후, 도련님에게 다가갔다.
그는 가녀린 어깨를 바르르 떨며 헐떡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새끼 짐승 같았다.
좀 진정시키기 위해 평소보다 차분하게 물었다.
“그럼 나갈 채비를 하면 될까요?”
그럼에도 내가 장난을 치는 것으로 판단했는지 창백하게 질렸던 낯이 싹 굳었다.
하긴, 그는 그간 단 한 번도 이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지.
굳이 넓게 저택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방에서조차도.
아무리 요구해도 건강을 이유로 마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다.
없었던 일을 쉽게 말하니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그래도 어떤 것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다. 그 첫 시도가 어려울 뿐이지.
미리 포기하긴 이르다.
“나가요.”
나는 더 시간 끌 필요 없이 말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시중 외에 도련님 뜻을 들어드리는 것이니 도련님도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내 태도에 경을 치려던 도련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의심이 역력하지만,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가 한번 들어는 보겠다는 얼굴이었다.
듣고 내키지 않으면 즉시 발톱을 드러낼 것 같았다.
나는 어린 고양이 같은 반응을 섬세히 살피며 흥정을 시도했다.
“제 소원은 한, 열 개 정도?”
“…….”
“아. 이런. 너무 과하죠. 그럼…… 여덟 개?”
“…….”
“으음……. 아니다. 다섯 개.”
“…….”
“좋다! 세 개!! 세 개로 합의 봅시다!!!”
짝짝짝!!!
박수로 극적인 협상 타결을 알리자 도련님과 시종들이 미친놈 보듯이 나를 봤다.
이에 나는 뻔뻔한 미소로 응수했다.
“도련님도 아시잖아요. 일개 시종인 제가 도련님을 내보냈다간 어떻게 되는지요. 도련님이야 뭐, 혼 한 번 나는 걸로 끝나겠지만, 전 모가지를 걸어야 하는걸요?”
언제 장난스러웠냐는 듯이 금세 비장한 표정을 꾸민 나는 손날을 칼처럼 세워 내 목을 쓱쓱 그었다.
“뎅강.”
“…….”
“뎅강뎅강.”
“……장난 그만하고 원하는 걸 말해.”
나는 경계하는 짐승을 달래듯 부드럽지만 분명한 어조로 요구했다.
“첫 번째로, 저를 도련님의 사람으로 받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