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53)
53
도련님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뺨을 긁으며 어색하게 웃다가, 목적을 상기했다.
내가 귀족도 아닌데 넋 놓고 감상할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도련님의 안위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물론 호위기사들이야 있다만, 위험한 것이나 수상한 사람이라도 있나 꼼꼼히 살필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휠체어 담당인 림슨 형님에게 다가갔다.
“잠깐 주변 좀 살피고 올게요.”
그런데 형님은 이상하게도 퍼뜩 놀라더니 안 된다고 나를 붙잡았다.
물론 그 말에 멈출 내가 아니지.
나는 형의 부름을 뒤로한 채 사람들 사이를 헤쳐 다녔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다 최고로 좋은 것들만 가득했다.
‘일단은…… 괜찮아 보이긴 하네. 수상한 사람도 없고.’
반쯤 안도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다시 꼼꼼히 훑어봤다.
그러는 내내 귀빈들의 이야기가 귀에 조금씩 들렸다.
“휠체어라, 역시 소문으로 듣던 그 희귀병이 확실하군.”
“안타깝긴 하다만…… 공작가의 흠이네요.”
“그래도 시 낭독회까지 공개적으로 열어주다니. 덴카르트 공작이 아주 관대한 결정을 내렸네요.”
어째서 그게 관대한 결정이지?
나는 그 얘기를 나눈 귀족들을 쏘아봤다.
자식을 낳아놓고도 그동안 일말의 책임조차 지지 않았던 공작 아닌가.
고작 자기 자식에게 낭독회 열어줬다고, 명문 귀족가에선 당연시되는 것 하나 해줬을 뿐인데 칭송을 받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도련님에 대한 불유쾌한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병에 관한 것까지였다.
다리가 썩을 수도 있는 병이라더라, 잘못하다간 후사조차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오갔다.
“내, 궁의 출신인 의원에게 들었네. 저 병을 가진 자가 다시 땅을 밟는 건 기적이라더군.”
듣다 보니 치가 떨렸다.
그들을 향해 도련님은 머지않아 그 기적을 이룰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성년이 되면 지금 네놈들보다 훨씬 멋진 어른이 되어 두 다리로도 당당히 설 수 있다고 똑똑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도련님이 수도 귀족에서 처음 인사하는 자리인 만큼, 소란 없이 지나가야 했다. 그게 옳았다.
그래서 그저 분노를 삭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을까.”
“…….”
“유행을 선도하는 공자님의 유능한 시종께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내렸던 고개를 올리자 발치 앞에 잘 차려입은 소년이 보였다.
평소에도 단정한 차림이었으나, 오늘은 더 신경 쓴 태가 났다.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들이 머리카락보다 조금 밝은 회색 정복의 단추며 소매에 은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급히 굳은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마넬 님도 오셨군요.”
“기분 탓인가. 그 말투, 좀 거슬리는데.”
“……하하. 그럴 리가요.”
“그렇지. 반갑다고 하는 거 맞지?”
단정한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삐딱하게 묻는 투가 참 마넬라노다웠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진 회색 눈동자가 선명한 노기를 품고 있었다.
“우리 로벨이 시작 전까지 심심했나 보네? 벌레들 우는 소리 하나하나에도 귀를 기울여주고.”
그 소리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던 귀부인 몇몇이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옮겼다.
나는 마넬라노답지 않은 처사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니, 얘가 그래도 사람들 앞에선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편인데…….
하지만 싫진 않았다.
내가 하지 못할 말을 뱉어줘서 내심 고마우면서 시원했고, 여기까지 와준 성의도 있어서 진심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
마넬라노가 호의적인 내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게 처음으로 또래 애들처럼 순진해 보였다. 귀엽기도 했고.
나는 그에게 조금 풀어진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심심할 리가요. 무척 기대되는걸요.”
“흐음, 그래.”
“그런데 저어기, 좋은 자리 있습니다. 저쪽에서 일행분들을 아주 좋은 자리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자신감을 좀 가져 봐. 너도 나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우리 도련님도 이젠 얼굴부터 딱 잘 사는 집 귀공자의 태가 나지만, 이놈도 도련님 티가 났다.
본인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화법조차 재수 없는 도련님이랄까……. 나랑은 참 안 맞아.
“예. 큰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바로 모시겠습니다.”
어쨌거나 빨리 치우고 도련님한테 돌아가자.
그런 결심으로 분주히 움직이는데, 그가 느긋하게 나를 따라왔다. 다리 길이 차이부터 심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여자치곤 큰 키인데 말이지. 은근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많이도 왔군. 엔가프도 오고.”
“예. 감사하게도 많은 귀빈께서 참석해주셨습니다.”
나는 순순히 답했다.
림슨 형과도 마차를 보면서 아주 수도에 귀족이란 귀족은 거의 다 온 것 같다고 했었고.
그런데 그때, 마넬라노가 나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대단하신 레잔다르는 안 오셨지만.”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언뜻 기분이 상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늘 불참이지. 내 낭독회 때에도 안 왔거든. 자, 안내해.”
“……예.”
곧 그에게 정면에서 가까운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이미 객석은 빼곡하지만, 이 자리는 집사에게 미리 말해두어 준비했었다.
……사실 마넬라노가 나를 귀찮게 할 것이라곤 좀 예상했었거든.
“로벨.”
이제 진짜 떨궈 내고 가려는데, 마넬라노가 대뜸 나를 불렀다.
대답하기도 전에 손이 쭉 잡아당겨지고, 손등에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툭 닿았다.
그것은 곧 따뜻하고 간질거렸다.
“나도 유행을 따르는 거야.”
마넬라노가 손등에 입을 맞춘 채로 뻔뻔스럽게 웃고 있었다.
무슨 불만을 표시하기도 전에 그가 짐짓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손을 놨다.
그가 몸을 낮춘 탓에 객석과 사람들에게 가려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태연한 작태라서 여기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단순한…… 장난인가?’
그래서 떨떠름하긴 했지만, 그냥 손을 회수하고는 돌아가려고 했다.
장난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와 함께 왔던 영식 중 한 명이 착석하며 빈정거렸다.
“이렇게 꾸며봤자지. 기껏 귀한 시간 내서 참석해준 손님들이 제대로 집중이나 할 수 있겠어? 무대로 오는 휠체어 소리에 분위기가 다 깨질 텐데.”
윤기가 흐르는 구두가 바닥의 자갈을 탁탁 쳤다. 듣기 싫은 소리였다.
나는 당장 저 구두를 벗겨서 저놈의 주둥아리를 치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럼 뭐 어떡하라고. 여긴 목발 쓰기도 사나운데.’
그냥 업혀 왔으면 우리 도련님한테 뭐라고 더 빈정거렸을 놈이 말이 참 많기도 했다.
그러나 마넬라노를 제외하고 다른 영식들은 동조하듯이 저들끼리 키득거렸다.
“뭘 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인원을 수용하려면 여기가 최선이었을 텐데.”
“그거, 병명은 뭐였는지 기억나십니까? 영영 서지도 못하는 병이라던데.”
“주치의한테 물어보니까 낫는 게 기적이라던데요. 일찍 뜰 수도 있고.”
가만 들어보니 어떤 트집이라도 잡으려는 한심한 무리였다.
‘……참자. 도련님이 매일 밤을 꼬박 새우며 준비한 이 낭독회를 망칠 수는 없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깊은 탄식이 하나둘 울렸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저런 일이…….”
불쑥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마넬라노조차 입을 벌린 채 말문을 잃었고, 객석 곳곳에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들도 있었다.
나도 천천히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어?”
림슨 형의 부축을 받으며, 도련님이 무대의 단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에 비해 월등히 느린 걸음이지만, 그는 분명히 자기 발로 걷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대정원을 환히 비추는 달빛에 어린 공자가 빛났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과 꾹 다문 입술에선 그의 결연함이 강하게 묻어났으며, 걷는 걸음걸이에 망설임은 없었다.
도련님은 분명히 걷고 있었다.
“……도련님?”
걸어가는 동작이 익숙한 걸 봐선…… 분명히 그동안 걷는 연습을 해온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도련님과 같은 병을 앓아온 나로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으로 보고도 상황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가, 미간을 모았다.
‘아니, 언제 저렇게…… 나으셨던 거야?’
표정 변화 없는 공작을 제외하고 다들 놀라는데, 그 와중에 크림슨 형님과 아리프 형을 보니…… 저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단 뜻이다.
‘……그럼 나한테만 안 밝힌 거잖아?’
그동안 내가 누구보다 걱정했는데. 나한테만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사실을 쏙 빼놓은 도련님께 서운하고 화도 조금은 치밀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도련님이 걸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래서 웃었다.
결국은 기쁨의 웃음인 것이다.
그렇게 터진 웃음은 쉽사리 멈추지도 않았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듯 가리고 그를 봤다.
그 사이에도 도련님은 그들이 말한 기적처럼 걸어 단상 앞에 섰다.
그땐 오롯이 혼자였다. 림슨 형의 부축도 받지 않고서 선 것이다.
다들 숨죽인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연한 밤을 등지고도 말간 녹색 눈동자가 객석 하나하나를 훑더니, 내게 닿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쩐지 긴장한 듯 입매를 굳혔던 도련님이 내게 웃어주었다.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기적을 일궈내신 우리 도련님께 경의를 표해주시죠?”
나는 마넬라노와 그 일행에게 들릴 정도로만 낮게 말하며 두 손바닥을 부딪쳤다.
나를 시작으로 눈썹을 찡그린 마넬라노가 동참했고, 멍한 얼굴로 도련님만 쳐다보던 한심한 소년들이 함께 박수를 쳐댔다.
그러자 객석에서 모두가 손을 부딪쳤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도련님은 박수갈채가 끊일 때까지 자리를 꼿꼿이 지켰다.
곧이어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나는 혹여 한 음절이라도 놓칠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몸을 낮춰 그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도련님과는 손끝 하나 닿지 않고 멀리 있는데,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이렇게 온몸에 꿀이 흐르는 듯이 달콤해지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