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55)
55
그간 알아본 결과, 저 로벨이라는 놈의 신분패에 적힌 것은 모두 가짜였다. 심지어 그 이름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어째서 덴카르트에 겁도 없이 기어들어 왔는가.
재물 때문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점만 가득했다.
자금이 흘러간 곳도 없고, 사라진 물건도 없었다. 따로 연통하는 자들도 없었고.
그렇다면 다시 원점.
왜 그렇게까지. 무슨 이유로.
권력을 바라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첫날부터 자신에게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광대 같은 짓을 벌이지 않았으리라.
수하는 차라리 ‘처리’, 즉 심문하겠다며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저 소년은 협조적이었고, 여러모로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었다.
여기서 없애는 건 명백한 손해였다.
“내가 직접 더 지켜보도록 하겠다.”
“예, 주군.”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나.”
그러자 머뭇거리던 수하가 믿기 힘든 말을 전했다.
이번에도 이상한 얘기에 알렉시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용변을 안 봐?”
“공자께선 방에서 나오지 않은 날들은 테라스에 모두 세숫물을 흘린 흔적만 보였습니다. 조사해본 결과, 덴카르트 영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난 같지도 않은 소리에 이번에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만약 이자가 전쟁터를 함께 누빈 전우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쓸 만한 덴카르트의 검이 아니었다면 당장 목을 쳐도 모자랄 만큼 우스운 얘기였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 저, 저를 품어주셔야 해요. ]알렉시스는 아주 오래전, 달리는 마차 앞을 가로막은 한 여인을 떠올렸다.
초라한 행색이지만 짙은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이던 여자였다.
[ 저만이 공작님의 저주를 풀 수 있어요. 덴카르트에 얽매인 사슬을……. ]그때를 떠올리던 알렉시스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거짓이 아니었나?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수하를 향해 말했다.
“가신들을 모두 소집해라.”
* * *
내 예상대로 도련님에 대한 소문은 수도를 발칵 뒤집었다.
“아아! 그 이름도 찬란하다! 기적을 일궈낸 덴카르트의 천사, 배포가 남다르고 총명함도 뛰어난 소오녀언 에드으릭 덴카르트으!…….”
“……이제 그만 좀 해, 로벨.”
하프의 줄을 엉성하게 튕기며 음유 시인처럼 지껄이자, 도련님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 귀가 아주 새빨갰다.
오늘 막, 틸리 언니를 통해 들은 소문을 전하며 나는 킬킬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도련님에게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나고, 건강도 회복되어서.
도련님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았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내가 흥얼거리며 하프 줄을 엉성하게 튕기자 소파에서 책을 읽던 도련님이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몇 번이나 봐도 놀라워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이처럼 느린 걸음이라도, 도련님이 이젠 조금씩 걸으실 수 있다는 사실이.
“이건, 이렇게 하는 거 같아.”
곧 맑은 음이 방에 퍼졌다.
몇 번 써보지 않았어도 도련님은 하프를 아주 잘 다뤘다. 이것도 혈족 계승인 것 같다.
나는 능숙하게 연주하는 그를 감탄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디프는 하프를 잘 다룬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인가 봐요?”
잠시 고민하던 도련님도 그런 것 같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요새 우린 둘만 있을 때는 디프를 화두로 스스럼없이 대화했다.
하지만 완전히 좋은 건 아니었다.
이 중요한 얘길 나에게만 밝힌 뜻은 도련님이 나를 신뢰하는 것이라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처음부터 도련님을 속이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죄책감이 들어서 다짐하듯 말했다.
“도련님. 제가 더 잘해드릴게요.”
“지금도 충분해.”
“더, 더, 더, 더요!”
있는 동안까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약속하자, 도련님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는 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도 했다.
저택 사방을 돌아다니며 도련님에게 부족한 것들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사실 딱히 없었다.
이제 후계자로 인정받은 도련님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공작이 참 성격이 더럽긴 해도 확실한 사람이란 말이지.’
공작은 그동안 언제 방치했냐는 듯이, 도련님에게 필요한 것은 다 몇 개의 방에 나누어 제공했다.
또, 도련님이 받은 것은 하프와 수많은 교육용 서적뿐만이 아니다.
낭독회가 끝나자 공작이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가신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집사님이 내게 공작님께서 도련님의 교육을 맡을 이들을 직접 선별하신다고 귀띔해주었다.
소집 당일인 오늘, 나도 테라스에서 멀리서나마 누가 오는지 예리하게 살펴보았었다.
‘누가 오려나.’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덴카르트의 가신 무리는 낭독회에서도 봤던 자들이라 얼굴이 익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한 노인이 있었다.
‘덴카르트 공작의 오른팔, 클란트 백작…….’
머리가 모두 백발로 희끗희끗한 그는 노인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과연 덴카르트 공작의 오른팔이라는 명성에 맞게 대단한 존재감이었다.
그런데 나는 저 백작이라는 자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작에서 도련님을 쫓아내려는 세력 중 하나였지, 아마.’
낭독회에서 실제로 봤을 때도 별로였다.
도련님을 향한 눈빛이 먹이를 관찰하는 뱀의 눈처럼 음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역량이 후계자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단번에 집어삼킬 것 같았다.
도련님 곁에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랐어도, 저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기도하듯 꼭 맞잡은 두 손을 이마에 붙였다.
‘……제발, 제발. 저 사람만 아니어라.’
그런데 꼭 이런 건……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후계의 기초 수업을 담당하는 자는 클란트 백작으로 정해졌다.
당장 오늘부터 바로 수업이 시작된다는 보좌관 데니안의 설명에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나가야 하나요?”
그 백작님 눈빛을 떠올려보니……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에 물어봤다.
싫다면 숨어서 들어야지, 계획을 짜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수업에 공자를 각별히 모시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 말대로, 교육용 응접실로 들어온 백작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밖으로 내쫓지 않았다.
게다가 염려와 다르게 그는 꽤나 적극적인 태도로 수업을 진행했다.
백작은 자신의 집사를 시켜 덴카르트와 이 수도 타운하우스의 역사를 정리한 양피지들을 가져오라 명했다.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직 못 본 귀한 자료들이 테이블에 빼곡하게 쌓였다. 관리도 어찌나 잘했는지 작은 흠집 하나 없었다.
그것들을 직접 하나둘 풀어놓은 백작이 엄중한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했다.
“모름지기 내밀한 부분부터 파악하는 것은 후계자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도련님은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그 양이 상당히 많은데도 지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다 보니 소파 뒤에서 슬쩍슬쩍 곁눈질했는데,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번뜩이는 눈이 나를 못마땅하게 훑어보더니 다시 도련님께 향했다.
찰나인데도 가슴이 철렁했다.
‘……공작은 어떻게 이런 자를 수족으로 부려먹는 거지.’
수업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윽고 백작이 나가자,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여전히 몰입하여 양피지를 읽는 도련님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는 그가 다 읽은 것들을 하나둘 꺼내 훑어보며 물었다.
“보시면서 어려운 단어나 표현은 없었어요?”
“응. 이젠 없어.”
태연히 답하는 도련님의 모습에 조금 더 묘한 감상이 들었다.
확실히 주인공은 주인공인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고, 중압감이 대단한 백작까지 어렵지 않게 부리다니…….
나는 양피지들을 슬쩍슬쩍 들춰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저 부탁 하나 들어주시면 안 돼요?”
“들어줄게.”
……대답은 일 초도 안 걸렸다.
그래서 나는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뭔진 알고서 답하셔야지. 세상천지에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단 나부터도 도련님을 속이고 있긴 하다만…… 걱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왜 뭔지도 안 물어보고 바로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
우리는 서로를 황당한 눈으로 봤다.
도련님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오늘 할 건 다 했잖아. 그런데도 부탁하는 거면 이번에도 손이나 입으로 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랬다.
그동안 일과가 끝날 무렵에는 도련님께 뺨을 맞거나, 손도장을 찍히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우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창백하게 질린 낯의 웨인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 더미를 줍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다소 산만하고 정신없는 동작으로 움직이던 그가 이내 탁자에 서류 더미를 올려두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문밖으로 나갔다.
쏜살같은 걸음에 도련님은 ‘왜 저러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화장실이 급한가 봐요.”
도련님은 ‘그게 저렇게 달려 나갈 일인가?’ 하고 놀라는 눈치였다.
그를 보다가 장난기가 생겨서 원망하듯이 말했다.
“뭐, 물론 도련님이야 그 심정을 모르시겠지만요.”
도련님은 그동안 화장실을 빌미로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게 미안한지 시선을 피했다.
그에게 괜찮다며 살살 달래주다가, 나는 문득 특이점을 떠올렸다.
‘……가만. 나도 요새 화장실 가는 횟수가 좀 줄어든 것 같은데?’
되짚어보면, 웨인의 작당으로 어딘가에 갇혔을 때도 불편함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었다.
도련님이 나를 닮아가듯이 나도 도련님을 닮아가는 건가?
“로벨. 무슨 생각 해?”
“도련님. 우리 정말 닮아가나 봐요.”
“……닮다니?”
“도련님 필체도 저랑 비슷해지고, 저도 도련님처럼 화장실도 좀 덜 가는 것 같고. 그리고 도련님이 저처럼 막 착해지고 밥도 많이 드시고 있잖아요. 좋아하면 닮는다는데 맞나 봐요.”
내 횡설수설하는 말에 도련님은 뭔가 이상한데, 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부정하지 않았다.
끝말에는 뺨을 살짝 붉히며 ‘그건 그렇지…….’라고 수긍하시기까지 했다.
역시,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다 믿어줄 사람 같았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고 당부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도련님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로벨. 부탁이란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