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57)
57
제자의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한 애저튼 공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덴카르트는 가진 것이 많은 만큼, 빼앗으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게 철저해지셔야 합니다. 물론 이건, 제 소관은 아닙니다만.”
“……”
“진정한 덴카르트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면, 테루아 황가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애저튼은 볼일을 마쳤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에드릭은 생각에 잠겼다.
테루아 황실 역사를 배웠으니, 황가와 황족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유독 신경 쓰는 황족의 이름이 있었다.
‘황태자, 루이스 하워드 테루아…….’
그 이름을 상기함과 동시에 로벨의 아쉬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로벨은 지난번 낭독회에서 황태자가 참석하길 누구보다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순회 길에 올랐다는 사실을 듣고 로벨은 무척이나 낙담했었다.
황태자 전하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표정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에드릭은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었다.
[ 황태자란 자를 그렇게나 보고 싶어? ] [ 예, 그럼요! 루이스 전하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족이잖아요. ]에드릭은 내심 충격받았다.
로벨이 자신을 제외한 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 줄은 몰랐었다.
특히나 그렇게 들뜬 어조로…….
[ 게다가 공과 사 구분이 투철하시고,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품성도 좋고, 자애로움으로 존경받는……. ]에드릭의 표정이 서서히 싸늘해졌지만, 로벨은 책장에서 책을 고르느라 등을 돌린 상태였기에 그걸 보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지껄이다가,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던 크림슨이 그만 간식이라도 먹자는 헛소리를 하며 대화를 간신히 끊어냈다.
“……황태자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때를 떠올리던 에드릭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벨이 자리에 없으니 그 질문을 받은 건 크림슨과 아리프였다.
연무장에 가기 위해 휠체어를 밀던 크림슨은 도대체 뭔 얘긴가 싶어서 눈을 굴렸고, 아리프는 신중히 답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생각에 갇힌 에드릭은 두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벨이 평민이라서 다행이야. 만약 귀족이었다면, 누구든 황태자의 시종으로 부족함 없다며 추진했을 테니.’
애초에 자신의 시종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마넬라노나 다른 놈들의 시종이라면…… 자신과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테니까.
평생, 자신의 시종이기만을 바랐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러다가 자신의 생각을 자각한 에드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드렛일을 하는 로벨이 안타깝다고 생각한 게 얼마 전인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고개를 휘휘 저은 그는 창밖을 응시했다. 아직 로벨을 만나기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어쩐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차를 준비해.”
* * *
로벨리아.
반쯤 잊었던 이름은 대시장의 소란에도 귀에 또렷이 들어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우리 상단 식구들이었다.
대부분 나를 등지고 있었으나 우리 상단 특유의 보라색 조끼며 얼굴들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나는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서 멍하니 그들을 응시했다.
반가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로벨리아 맞아?”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나와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오라버니였다.
다른 사람들은 판매 중인 품목들을 신중히 살피는데, 그만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반신반의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늘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하게 기르던 머리도 짧게 치고, 남자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분들이 여긴 왜…….’
우리 상단 사람들은 수도의 대시장까진 직접 오지 않은 데다, 판매 지역도 거의 지방이었다.
애초에 여기서 마주친다는 가정을 하지 못한 것이다.
구매하더라도 주로 대리인을 통하지, 이렇게 단체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때, 푸근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한쪽 어깨에 실크 더미를 메고 왔다.
‘……설마 라이너 아저씨도 온 거야?’
내가 가장 잘 따르는 상단의 식구이자, 저 오라버니의 부친이었다.
그런데 내가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봤는지, 상단의 오라버니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너…… 너! 너 로벨리아 맞지!”
내가 답하기도 전에 그가 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가까이 선 그는 내게 긴 팔을 쭉 뻗었다.
“로벨리아! 거기 서!”
그 소란에 상단 사람들이 반응했다.
“로벨리아? 로벨리아가 여기 있다고?”
그들은 수군거리며 내 쪽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나는 그들을 완전히 등지고 도망쳤다.
걸리면 안 돼!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고, 로벨리아!”
그는 내 이름을 쩌렁쩌렁하게 부르며 전력으로 쫓아왔다.
하지만 대시장에 빼곡한 인파로 바로 올 순 없었다.
그건 도망치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어렵게 헤쳐서 움직여야 했다.
끝내 간신히 골목으로 숨어든 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추격전에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귀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죽어도 들키면…… 안 돼.’
반가움보다 막막함이 컸다.
나 때문에 내 가족과 상단 사람들이 다 위험해질 수 있었다.
내가 남장을 해서 덴카르트 공자를 모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상단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막대한 배상금과 귀족 기만죄가 추가될 것이다.
숨을 참고, 벽에 딱 붙어 숨은 채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저 앞에 골목까지 쫓아온 우리 상단 식구들이 보였다. 다행히 내가 여기까지 숨어든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 가운데서 오라버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있었다.
“여기 있었어요. 제가 이 두 눈으로 로벨리아를 똑똑히 봤다니까요!”
“정말 제대로 본 것이 맞아?”
“그렇다니까요! 분명히 로벨리아였어요. 제가 그 애를 못 알아보겠어요? 로벨리아를 몇 살 때부터 봤는데!”
상단 식구들은 난감하다는 듯이 이마를 감싸거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돌아가자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내 눈빛을 교환한 그들이 어떻게든 나를 찾으려는 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 벽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은 나는 머리를 싸맸다. 이것 참 감동이긴 하다만…… 큰일이었다.
‘아……. 미치겠네.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지?’
덴카르트 마차까지 가려면 시장을 가로질러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상단 사람들이 있어서 불가능했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꽉 막힌 골목길과 식구들이 있던 곳을 번갈아 보다가 머리를 싸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오늘 시종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
눈이 예리하기론 상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럴드 오라버니이니, 옷에 새겨진 자수며 덴카르트의 문양으로 실마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초조함에 땀으로 흥건해진 얼굴을 감싸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까?”
고개를 돌리자 골목 그늘진 곳에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기척조차 없었는데…… 누구지?’
아니, 그보단 대화 소리도 들리면 안 되었다.
나는 검지를 입에 붙이며 ‘쉿, 쉬잇!’ 하고 조용히 하길 부탁했다.
그런데 소년이 피식 웃더니 양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없어. 다 갔어.”
“……하아.”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데 그가 한 걸음씩 걸어왔다.
‘……혹시 내게 무슨 나쁜 짓을 할 속셈인가?’
도주로를 다시 슬쩍 곁눈질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늘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우리 도련님의 옛날 모습이 생각날 만큼이나 하얗고 빼빼 마른 소년이었다.
앳된 얼굴에는 살기며 위압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럼…… 어디서 망토라도 한 벌 가져다준다는 건가 추측하는데, 소년이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여기 길을 아주 잘 알아. 네가 원하는 곳까지 눈에 띄지 않게 데려다줄 수 있거든.”
유하고 상냥한 태도이지만, 어째 꾸민 것 같은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신뢰가 가진 않았다.
장사꾼 집안 딸이 사기를 당할 리는 없거든. 세상에 공짜가 어딨다고.
한편 가식적인 소년이 어느덧 내 앞에 섰다.
곧, 뼈가 도드라진 그의 손이 내 상의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내 재킷의 은 단추였다.
“그 단추.”
금은 아니지만, 정교하게 세공되어 값이 꽤 나가는 것이었다.
“그거 하나면 다 해결되는데.”
나는 그 상태로 가만히 있는 소년을 의심스럽게 훑어봤다.
일단, 외모는 특출했다.
특이하게도 천연 터키석처럼 오묘한 색감의 곱슬머리를 가졌는데, 그게 코 중간까지 내려왔다.
그런데도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나 매끈하고 갸름한 턱선 때문인지, 지저분하기보단 부드러운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외모가 다가 아니다. 그의 상냥한 태도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색이 구석구석 끼워져 있었다.
여기저기 쫓기는 내게 어떤 경계도 없이 능숙하게 접근하는 태도도 거슬렸고…….
‘……이거 순 사기꾼 아니야?’
혹시 일행이라도 불러서 나를 납치할지도 모른다 싶었다.
우리 도련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저 정도 외모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혹할 테니까, 방심을 시켜서…….
그런데 내 의심스러운 시선에 소년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동작에 그의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흔들리더니, 가을의 하늘처럼 청명한 눈망울이 드러났다.
나는 그 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
쌍꺼풀이 얕지만 또렷한 눈동자 사이에는 곧은 콧대가 자리 잡았는데, 그 윗부분에는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 때문에 빼어난 외모를 가리는 느낌이라 내심 안타까울 정도였다……. 어, 잠깐만.
순간, 내 입에선 아주 공손한 투가 나왔다.
“선생님. 제가 꼭 하나만 드려야 하는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