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77)
77
뭐…… 그렇게나 챙겨주셨는데 이렇게 말없이 떠나는 것부터가…… 무례한 일이긴 하다.
머릿속에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죄책감들을 숨기기 위해 나는 더 밝게 말했다.
“안 먹었어요. 저 사실 보약 잘 안 받는 체질이거든요. 보기에도 엄청 튼튼하잖아요.”
“하나도 안 튼튼해 보여. 왜 안 먹었어. 안 건강하잖아, 너.”
“어…… 도련님도 제가 비리비리해 보이나요?”
림슨 형의 표현을 빌려서 얘기했더니 도련님이 눈썹을 휙 올렸다.
잘생긴 이마라서 그것마저도 잘 어울리긴 했다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에이, 아닌데. 저 건강한데. 모르셨어요? 건강 하면 로벨이고, 로벨 하면 건강이죠.”
“…….”
“덴카르트 전역에서 저보다 건강한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하세요.”
오랜만에 치는 장난이라 조금 더 신이 난 투로 말했다.
그런데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 듯 듣던 도련님이 고개를 창문으로 휙 돌렸다. 그 그림 같은 옆모습에서 노기가 단단히 드러났다.
‘왜…… 화났지? 내가 말실수도 하지 않았는데.’
날도 더운데 도련님의 숨결에서 찬바람이 솔솔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얘기를 더 나누려고 했다.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절박한 마음이 컸다.
“거기에 은사슴이 있다고 하던데요. 기대되지 않으세요?”
“전혀.”
“아……하. 그러시구나. 그렇죠. 그러실 수 있죠. 기대가 하나도 안 될 수도 있죠.”
“…….”
하지만 도련님은 내 바람과 달리 나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과로 때문일까. 어쩐지 화가 나 보이기도 했고…….
결국, 나는 슬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저……. 저 가요?”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질척거렸다.
하지만 도련님은 끝내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단단하게 당겨진 입매만 봐도 잔뜩 골이 난 게 분명했다.
‘……왜 또 저러시지?’
다시 내 마차에 돌아갈 때까지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황성에 당도하면 그의 기분을 좀 풀어주려고 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획처럼 도련님을 달래주지 못했다.
황성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정신없이 몰려와서 말할 틈이 없었다.
한참을 뒤로 물러나 먼발치에서 도련님을 봤다.
‘……멀다.’
잘 차려입은 귀족들 사이에서 웃는 도련님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멀어진다는 사실에 기분은 더 먹먹해졌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도련님 목소리라도 조금 더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리는 것이라곤 도련님을 질시하는 놈들의 수군거림뿐이었다.
“이야. 정말로 왔네? 걷긴 하는데…… 저 석궁이나 들 수 있겠어?”
“봐. 다람쥐나 토끼 새끼나 한 마리 잡고 말겠지. 아니면 울면서 돌아오든가.”
놈들을 쏘아보다가 아차 싶었다.
저런 놈들에게 한눈팔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나는 다시 도련님을 바라봤다.
그런데 벌써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도련님이 사냥터 입구까지 가고 있었다.
‘벌…… 벌써?’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미처 인사할 새도 없던 것이다.
‘아니……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더 멀어지는 도련님의 뒷모습을 보자, 속이 어쩐지 뜨거워졌다.
마지막이었다.
정말 마지막.
하지만……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이건 아니야.’
아무리 이별을, 마지막을 예견했어도 이런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간다면,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것을 직감했다.
‘……이대론, 싫어!’
“로벨, 오랜만…….”
“죄송해요, 마넬 님.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화려한 깃털로 장식된 모자까지, 오늘따라 한껏 멋지게 차려입은 마넬라노가 내게 인사했다.
하지만 바로 지나쳐 왔다.
얼핏 허망한 그의 옆모습이 보였지만,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그리고는 도련님을 따라가려는 림슨 형의 팔을 충동적으로 붙잡았다.
“형님. 이번 한 번만 부탁드려요! 저 안에는 제가 도련님과 함께 들어가게 해주세요!! 제발요!!!”
내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고 무모했다.
이미 도련님을 모시는 시종은 림슨 형으로 정해졌으니까.
당연히 림슨 형은 장난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 어서 도련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무슨 짓이냐며 욕설까지 뱉었다.
림슨 형님은 내게 붙잡힌 팔을 세게 휘저으며 나를 떨궈내려 했다. 그러나 나는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예정된 이별이었고, 늘 그를 떠날 준비를 해왔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욕심이 앞섰다.
“마지막이에요, 정말 마지막…….”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시종으로서 도련님을 제대로 보필하고 싶었다.
내 간절한 진심을 알아챈 림슨 형이 질렸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미 정해진 걸 어떻게……. 야, 로벨! 미쳤다고 그걸 가져가면!…….”
지금이다!
방심하는 림슨 형의 목에 걸린 시종 패를 낚아채 버렸다.
그러자 그가 허둥거리며 내게서 빼앗아 가려고 했다.
나는 빽빽한 사람들 사이로 요령 있게 피하며 설득하려고 했다.
“거기 호위 기사들도 많고, 저 말도 잘 타잖아요! 마지막으로 부탁드려요. 제가 도련님 모시고 싶어요. 제발요, 제발.”
“넌 정말 제정신이냐……! 여기서까지 도련님이랑 붙어 있으려고 하면…….”
욕을 뱉던 림슨 형이 환장하겠다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는 내 애절한 표정을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설명을 요구했다.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특히 대외적인 자리에서 나는 몸을 사리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린 길게 말할 틈이 없었다. 이제 도련님은 입장해야 하니.
도련님이 있는 방향과 나를 초조하게 번갈아 보던 림슨 형이 침음을 삼켰다.
내 간청에 결국 져주고 만 것이다.
“……에이씨, 진짜! 가라, 가!!”
“형님이 최고예요!”
그렇게 다시 급한 걸음으로 도련님께 향하려는데, 누군가와 탁 부딪쳤다.
아까부터 내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어느 귀족의 시종이었다.
나를 못 본 건지, 급하게 몸을 돌리는 나를 피하지 못했다. 나는 얼른 사과했다.
“별말씀을.”
다행히 그는 까다롭게 굴거나 불쾌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가볍게 웃은 그가 옆으로 한 걸음 움직여 틈을 내주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감사의 눈인사를 하고는 도련님께 향했다.
그동안 나는 이맘때쯤이면 망가졌던 내 두 다리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항상 기쁘고도 감사했다.
하지만, 도련님께 달려가는 지금 이 순간이, 그중에서도 최고로 기쁜 순간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 * *
황제의 축사 후 사냥제가 시작되었다.
사냥터에 입장하려던 도련님이 나를 발견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급히 돌아가라는 듯 뒤를 눈짓했다.
하지만 나는 못 본 척 말의 고삐를 당기며 그의 바로 옆에 능숙하게 섰다.
마부석에서 짐마차도 내가 직접 몰고, 급한 물건은 내가 배달도 해서 가능한 솜씨였다.
그런데 도련님의 눈빛은 한층 더 사나워졌다. 걱정이었다. 저 표정은 오랜만에 보는데…… 왜 이렇게 반갑지.
어쩐지 고삐를 잡은 손이 간질거려서 꼼지락거렸다.
“안 돌아가고 뭐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었어요. 림슨 형이 배탈이 났대서요.”
도련님은 물론 내 거짓말을 단박에 알아챘다.
“로벨!”
하지만, 도련님이 나를 부르기 무섭게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뒤에서 시작되는 말굽 진동과 소리에 가문의 깃발들이 사방에서 펄럭거렸다.
“여기서 무를 수 없는 거 아시죠?”
이제 다른 참가자들이 뒤에서 밀려오는 터라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무언가를 인내하듯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뜬 도련님이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우린 곧 숲 어귀로 진입하게 되었다.
도련님은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으나, 내게 화를 내진 않았다. 허락의 의미였다.
날씨는 화창했고, 옛 여왕이 사랑했다는 숲길에 나뭇잎이 만드는 그림자는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었다. 신이 난 나는 그에게 더 바짝 붙으며 물었다.
“뭘 잡으실 거예요?”
“은사슴.”
은사슴은 모두가 노리는 귀하디귀한 사냥감이었다.
역대 사냥제 동물 중 가장 기민하고 희귀하여 잡기만 하면 우승이 확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대 사냥제 참가자 중에 사냥에 성공한 사람은 알렉시스와 대공을 포함하여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어려운 사냥감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련님은 그 사냥감을 목표로 했다.
마차에서 얘기를 꺼냈을 때 하나도 관심이 없는 척하더니, 아니셨나 보네.
혹시 아까 비웃는 말을 하던 놈들 때문인가…….
“오늘 바로 잡을 거야.”
심지어 은사슴을 발견까지만 하는 데도 사나흘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데, 그 여정을 하루에 해내려고 했다.
도저히 믿기 힘든 계획이었다.
걱정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의 손이 지도를 가로질러 올라갔다.
동쪽 숲에 길게 이어진 협곡 지대였다. 그중에서도 협곡이 시작되는 초입 부분이었고.
“여기서 기다리면 돼.”
“숲에 더 들어가지 않고요?”
은사슴은 동쪽 숲 가장 깊숙한 곳에서 종종 목격담이 전해졌다.
그 사실을 기반으로 묻자,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은사슴은 프넨 잎의 섭취 주기가 확실해. 프넨 잎은 여기서만 나고. 오늘 분명히 올 거야. 그 얘긴…… 클란트 백작의 지난 수업에서 들었어.”
그 느릿한 어조가 어쩐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최근을 제외하고 후계자 수업은 나도 함께했지만, 그동안 그런 얘긴 나오지도 않았다.
‘……혹시 디프 종족의 기록을 통해 아신 건가.’
그렇다면 사실대로 답하긴 어려울 것이다.
혈통의 비밀을 더 밝히려 하지 않겠지. 그럴수록 약점이 될 뿐이니까. 예전에는 내게 숨김없이 말했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해하면서도 아쉬워진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자 도련님은 석궁을 묵묵히 챙겼다.
여전히 내게 눈길은 조금도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 태도는 협곡 초입에 도착할 때까지 변함없었다.
“로벨. 난 다녀올게.”
도련님은 이곳에서도 보초를 서는 황실 근위병들을 확인하며 말했다.
“같이 가지 않으시고요?”
“은사슴은 기척에 예민해. 사람 숨소리도 잘 파악하지. 둘보단 혼자 다니는 편이 나아.”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도련님의 석궁과 화살, 그리고 전서구 따위를 모두 꼼꼼히 확인했다.
묵직한 석궁은 도련님이 들기에 무거워 보였으나,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연습 삼아 하늘에 나는 새를 맞추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다행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어둑한 그의 눈빛이 걸리긴 하다만…….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도련님이 무언가를 얻길 바라는 것은 처음 아니던가. 그러니 꼭 해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그리고 도련님을 비웃던 놈들에게도 본때를 보여주셨으면.
그런 간절함 마음을 담아서 오랜만에 장난처럼 시건방지게 물었다.
“저 그럼 은사슴 구경 가능한 거예요? 기대합니다??”
“……그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도련님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떠나기 직전이니 눈으로도 보고, 손으로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 작업을 상단의 어떠한 물건을 살폈을 때보다 꼼꼼하게 하자, 그제야 마음에 찼다.
만족감에 입꼬리를 올리는데, 눈이 마주쳤다.
“…….”
언제부터였을까. 도련님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숲에 일어난 신선한 바람에 가지런히 정돈된 그의 금발이 휘날렸다.
하지만 햇빛을 받아 투명해진 연녹색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눈빛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마 그간 지겹도록 반성했던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그의 옷깃을 급히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