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78)
78
에드릭은 난생처음 황성에 발을 디뎠음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숱한 귀족들이 가문의 명예와 위상을 위해 나선다는 사냥제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저 못내 답답할 뿐이었다.
‘……로벨은 내게 상처의 비밀을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아.’
그동안 기회를 충분히 주었으나, 로벨은 끝내 제대로 된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째서 시종인 그가 그런 능력을 지녔는지, 붕대로 숨긴 상처에 대해서도…….
오히려 자신을 속이거나 말을 돌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도 따로 캐묻진 않았다.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름에 따라 감정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건가? 그래도 요샌 후계자도 되고, 많이 달라졌는데…….’
생전 처음 느끼는 서운함이었다.
에드릭은 그간 로벨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디프 종족이라는 혈통의 비밀과 어머니의 일, 비참하고 불우한 과거…….
모두 다 원해서 알린 것은 아니지만, 다 밝혔다.
그리고 안 보여주었던 것도 그가 물어본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흔쾌히 밝혔을 것이 자명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의 마음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은근한 실망감이 들었다.
혹여 자신만 빼고 크림슨이나 이보 같은 놈들에게는 말했을까 봐……. 유치한 걸 알면서도, 자꾸만, 줄곧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요샌 글도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에드릭은 자신에게 이런 어리숙한 면모가 남아 있었다는 것에 놀라웠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날이 갈수록, 로벨을 볼수록 깊어지는 감정들이었다.
‘……로벨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야. 지금처럼 기다리자.’
서운함을 가다듬으며 석궁을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등을 기댄 바위 너머 상황을 살폈다.
은사슴이라면 고서에 적힌 바와 같이 오늘 필히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에드릭의 목적이었다.
에드릭은 주변을 살피며 사냥제 시작 지점에서 자신을 비웃던 수많은 귀족 소년을 떠올렸다.
[ 아아. 걸을 수 있다더니. 낭설은 아니었군. ] [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망신이나 당하고 끝날 것이야! ]그때, 로벨도 듣고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 분노한 얼굴로 귀족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크림슨이 그 큰 덩치로 로벨의 눈을 가리지 않았다면, 아마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에드릭은 놈들이 입은 사냥복에 수놓아진 가문의 문양을 떠올리며 석궁으로는 숲 깊은 곳을 겨누었다.
그들의 가문을 짓밟기 전에, 보란 듯이 은사슴을 잡아서 그 콧대부터 눌러줄 것이다.
달의 단검을 얻으면 그들의 헛된 자존심 따위는 쉽게 뭉개지리라.
그런데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예상대로 신비로운 은빛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게 흔들리는 빛과도 같았다.
그 즉시 에드릭은 본능적으로 석궁을 당겼다. 그러자 저 멀리 흔들리던 빛이 멈추었다.
‘……성공이야.’
에드릭은 석궁을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탄내가 느껴졌다.
‘……!’
알 수 없는 기묘한 불안감이 서서히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이전에도 이런 기분을 한 번 느낀 적 있었다.
옆집 부인과 차를 마시는 어머니를 볼 때와 같은 날이었다.
그날, 그의 어머니는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었다.
‘…….’
뻣뻣해진 고개를 뒤로 돌리자 고요한 사방만이 보였다.
어느 곳에도 불길은 없었다. 우뚝 솟은 나무 위로 석양만 서서히 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할 정도로 고요했으며 탄내는 가시지 않았다.
에드릭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석궁을 챙기지도 않고 그쪽을 향해 달렸다.
아무리 회복이 되었다 해도 무리하지 말라던 의원의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마침내 도착했으나, 그곳엔 로벨이 없었다. 나무에 묶인 말과 근위병들만 그대로였다.
……로벨과 말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에드릭이 윽박지르듯 물었다.
“로벨! 로벨은 어디 있어!!”
“그 은발의 시종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말이 갑자기 구토해서 말의 목을 축이러 다녀온다고 했습니다.”
“……혼자?”
에드릭의 되물음에 주변 근위병들이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귀족도 아니고 고작 시종에게 호위라도 붙이겠냐는 의미였다.
에드릭은 제 아둔함을 저주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풀이 발목까지 오는 땅에 귀를 붙였다.
“고, 공자님! 일어나십시오!”
경악한 기사들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에드릭은 대응하지 않았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디프 종족의 여러 능력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그 말대로 땅에 귀를 붙인 채 가만히 있자 절규와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야.’
울림이 강했다.
‘……동굴.’
이 부근에 있는 동굴 하나가 떠오르자, 에드릭은 말을 몰아 바로 동굴로 향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챈 기사들도 따라붙었다.
도착한 동굴 앞에선 연기가 정신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풍향 때문인지, 하늘로 치솟지 못하고 숲 안쪽으로 비껴가고 있었다.
에드릭은 더 생각할 필요 없이 동굴로 들어가려 했지만, 불길이 거센 입구엔 한 발도 디딜 수 없었다.
절망한 에드릭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여기서 불이…….”
“연막! 연막을 올려!!”
에드릭은 주변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연막을 피우는 기사들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그 발걸음이 멈춘 곳은 낭떠러지 같은 폭포였다. 그 앞에서 에드릭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고, 무거운 소지품들을 모두 버렸다. 그 일을 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에드릭은 커다란 배도 금방 쓸려갈 정도로 물길이 거센 폭포 정중앙을 응시했다.
이윽고 무언가 물에 거세게 떨어지는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공자님!”
* * *
나는 나무 그늘에서 두 말과 함께 도련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작부인이 선물한 명마 안드레아가 갑자기 풀숲 위로 노란 위액을 뱉기 시작한 것이다.
“안드레아, 안드레아. 괜찮아질 거야. 잠깐 이거 좀 마시자. 응? 착하지, 우리 예쁜 안드레아.”
당황했지만, 수통의 물을 모두 먹이고, 진정하라고 갈퀴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에서 미세한 경련이 느껴졌고 체온도 빠르게 식어갔다.
나는 안드레아를 두 팔로 안아서 달래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상단의 말이 아플 때와 증상이 흡사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상단의 말은 애석하게도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챙긴 비상약을 뒤져도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위한 것이지, 말의 것은 없었다.
‘……미치겠네.’
말도 걱정이지만, 도련님도 걱정이었다.
공작부인이 아끼던 말에게 큰일이라도 생긴다면…… 난리가 날 텐데.
이제야 겨우 후계자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공작부인에게 공격할 빌미를 내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물이라도 더 보충해줘야겠어. 그리고 도련님이 돌아오면, 바로 말을 치료해야지.’
판단을 마친 후에는 주변 기사들에게 말을 전했다.
“혹여 도련님이 먼저 도착해서 저를 찾으시면 곧 돌아온다고 해주세요.”
“알겠다.”
그들은 귀찮은 기색을 하고서도 거절하진 않았다.
그 후, 나는 오던 길에 보았던 호숫가로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라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안드레아. 착하지. 금방 나을 거야. 자, 마시자.”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안드레아에게 먹여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했더니 다행히 안드레아의 흐릿한 눈동자도 생기가 돌았다.
안도하면서 일어나는 순간, 후두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웃는 얼굴이 보였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네요. 잘 가요.”
‘아까…… 황성에서 부딪쳤던 시종…….’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무언가가 입가를 빠르게 덮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전신이 모두 밧줄에 감겨 있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했고 숨이 막혔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코에서부터 입까지 가로막은 천이 있었다.
처음에는 눈에 안대라도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꺼풀에 닿는 게 없었다. 어두운 곳이었다.
‘……여긴 어디지?’
고요함 속에서 균일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와 불안정한 내 호흡만 들렸다.
사냥제 진행 중이니 황성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한 건지 아픈 몸을 억지로 비틀자 등에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흙은 아니었다. 차갑고 습한 느낌이 강했다.
‘……나를 동굴에라도 가둔 건가?’
마지막으로 봤던 비열한 인상의 시종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면이었다. 결코 원한 살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련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그에게서 나를 떼어내려는 가신들이겠지.
무서운 생각이지만, 바로 죽이지 않은 걸 봐선 잠깐 겁을 주거나 하는 것일 터다.
‘……괜찮아. 우리 도련님이 나를 그냥 두고 갈 리가 없지. 구하러 오실 거야.’
아무리 최근에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해도 도련님이 나를 버릴 리 없다.
내가 사라진 걸 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을 사람이었다.
아직 불안감이 다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들을 깨닫자 점차 진정이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를 믿으니까.
‘그래…… 도련님이 찾아올 거야. 도련님만 기다리면 돼.’
그런데 그 안도가 무의미하게 어느 순간, 목이 아파졌다. 그리고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덴카르트에서도 하인들이 쓰레기 따위를 소각할 때 종종 맡을 수 있던 탄내였다.
다시 한번 머리를 가격당한 것처럼 강렬한 충격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