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96)
96
“……하.”
에드릭은 그동안 스스로를 과신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심하게 앓았다.
황소도 3분 안에 즉사한다는 치명적인 독에 노출되었을 때도, 야만족의 수장이 휘두른 도끼에 어깨가 찍혔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극심한 갈증과 머리가 깨질 듯한 고열에 시달리며 몸을 떨어야 했다.
이런 열병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 증상에 시달리다 못해 약을 먹기까지 했다. 의원은 자신을 찾아온 에드릭을 보고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의심했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증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만 가중되었다.
‘로벨. 네 부모를 속여가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한 게…… 결혼 때문이었어?’
로벨의 고향은 상업 도시답게 타국과의 교류가 잦았고, 조숙한 그녀는 일찌감치 상단 일을 시작했으니 사랑에 빠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넬라노 스텔이 건넨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주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던지던 고지식한 로벨이라면 10년 전의 상대를 다시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이상치도 않았다.
공작부인이 준 돈을 안 쓴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그건, 떳떳하게 번 돈이 아니니까……. 정의로운 로벨이라면 분명히 받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석연치 않은 점들이야 아직 있었다.
하지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로벨이 정말 귀화를 원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소식이 에드릭에게 전해지길 원치 않은 듯했다.
과거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 살뜰히 전해주던 그녀가 이상한 핑계를 대고 나간 걸 봐선, 그가 떠날 때까지 침묵한 걸 봐선 안 들어도 뻔했다.
심지어 로벨은 평생 그와 연을 끊고 살 작정인 듯 보였다.
‘……나를 두고 정말 간다고?’
복귀했을 때 로벨이 곁에 있다는 것은 에드릭에게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는 것처럼 절대적인 불변이었다.
그런데 그 절대적인 믿음이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그 사실에 오랫동안 그를 굳건히 지키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에드릭은 자신의 속에 그런 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미처 몰랐다.
그렇게 십 년보다 길게 느껴지는, 지옥 같은 한 주가 흘렀다.
그리고 그때쯤 덴카르트에 당도한 크림슨이 소식을 전해왔다.
[ 일전에 전달된 소식 받았습니다. 하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에드릭은 첫 줄부터 불안해졌다.
그동안의 전적을 생각해보면 크림슨이나 트레이시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눈치가 없는 새끼들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 로벨이 단순히 밀당을 하려는 것이니……. ]아무리 크림슨이 갖은 미사여구로 괜찮다 표현해도 로벨이 떠나려고 함은 변치 않았다.
그는 읽는 내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고, 다 읽은 서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구겨졌다.
이쯤 되자 곁에서 지켜보던 수하들도 염려를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전보를 처음 전했던 트레이시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가는 주군의 모습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동반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눈치가 없어도 행동력은 꽤나 확실한 놈이었다.
엉망으로 구겨져서 바닥을 구르는 서신을 주운 트레이시가 슬그머니 물었다.
“시온 경을 불러올까요?”
그는 본인의 입으로 말하길, 테루아에서 가장 여자 마음을 잘 안다는 놈이었다.
실제로 녀석의 막사 앞엔 늘 가장 많은 양의 서신이 쌓여있곤 했다. 주기적으로 오는 서신의 반이 거의 그놈 몫이었다.
거기에 편지마다 얼마나 향수가 뿌려졌는지, 온갖 꽃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남들보다 후각이 뛰어난 에드릭은 그게 늘 거슬렸다.
그래도 그간 단 한 번도 지적하진 않았다. 이곳이 웬만한 기사들도 견디기 힘든 곳임을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한심한 바람둥이에 불과했다. 그런 놈을 애타게 기다리는 귀부인과 영애들이 많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연이은 충격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에드릭은 오늘 그 한심한 놈에게 흔들리고 말았다.
그렇게 많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로벨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멍청하긴. 이렇게 사내들이 수두룩한데 무슨 사내를 또 부르나! 자고로 사내들의 일이라면 사내를 가장 잘 아는 우리가…….”
“데려와.”
평소엔 인간 취급도 안 한 놈을, 이럴 때 찾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중요치 않을 정도로 에드릭이 절박했다.
“결국…… 그, 그 소문이 사실인가…….”
“것 보게! 우리 주군이 여자 역할일 리가 없어.”
에드릭은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온갖 개소리를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곧 도착한 시온은 사내치고 꽤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빼어난 용모도, 기사의 체격도 에드릭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에드릭은 어릴 때부터 로벨을 제외하고는 자신보다 예쁜 사람을 본 적 없었고,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실전으로 단련한 몸집은 이제 건강을 넘어 건장해졌다. 공작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이곳에서 가장 장신이기까지 했다.
평생 외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온 시온도 그걸 느끼고선 움찔했다. 그러더니 어째 완벽히 패배한 얼굴로 어깨를 옹송그렸다.
하지만 그 굽었던 어깨는 에드릭의 질문에 곧 깃을 자랑하는 공작새처럼 자랑스럽게 펴졌다.
“네가 그렇게 여자 마음을 잘 안다고.”
시온은 속으로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얼핏 들었던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세상은 계급과 얼굴이 다가 아니지.
그 코흘리개 시절부터 이 전장을 구르던 주군이니 이성 관계만큼은 자신의 조언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어른들만의 실전 경험이랄까.
시온은 언제 주눅이 들었냐는 듯이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눈에 든 상대라면 누구든 저와 눈을 맞추고, 한 번이라도 말을 섞으면 입을 맞추고, 손을 잡으면 그날 바로…… 흐이익!”
쾅!
그런데 순간, 새파란 검 끝이 땅을 뚫어버렸다. 검날이 반 이상 땅에 처박힌 광경에 수하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어떻게 검날이 미스릴 지대에 저만큼 박힐 수가 있지?
이곳 지형은 모래나 흙바닥이 아닌 갑옷을 제작하는 특수 재질의 미스릴이었다.
아무리 검기를 실어도 저렇게 깊이 꿰뚫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편, 난데없이 부츠 앞에 칼이 처박히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한 시온은 뒤로 철퍼덕 넘어져 주저앉았다.
그 꼴이 우스웠지만 아무도 비웃지 못했다. 뻔뻔한 시온이니 저 정도지 자신들은 오줌까지 지렸을지도 몰랐다.
언제 검을 뽑았냐는 듯이 자리에 앉은 에드릭이 긴 다리를 꼬더니 싸늘한 얼굴로 명령했다.
“더러운 소리 지껄이지 말고 방법부터 말해.”
그리하여 시온의 목숨을 건 특강이 시작되었다.
공작의 서신을 확인한 에드릭이 황성으로 향하기 전까지.
* * *
그동안 림슨 형은 내가 모르던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도련님이 그간 북부의 여러 독에 중독되었고, 그 독성이 몸에 아직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나는 걱정을 금치 못했다.
[ 그래서…… 정상인에게 아-무 문제 없는 향초라도 도련님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더라……. ]림슨 형도 어찌나 걱정스러워하는지.
그는 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 땅바닥만 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마저 바닥을 기어가는 듯하여 나도 염려를 감추지 못했다.
[ 그 정도면 황성이 아니라 저택에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형님. 이럴 때가 아니에요. 그냥 제가 공작님께 따로 보고를 올릴게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성대한 환영식이고 뭐고 저택에서 따로 회복부터 해야 했다.
황제도 도련님의 증상을 전달받는다면 그 정도는 용서해줄 것이다.
림슨 형님이 말한 정도라면 대외적으로도 분명 티가 날 테니, 성군으로 인정받고 싶은 그가 관용을 베푸는 척 취소하리라.
그런 뜻으로 강경하게 말하자 림슨 형은 갑자기 엄청나게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 야, 무슨 보고야. 진짜 도련님 어지간해선 괜찮다니까? 아, 맞다. 그, 그, 그 있잖냐. 어, 공작님도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알아보셨는데. 거기 벽이며 붙박이장에 미리 해독제를 발라놓는 작업을 하라고 하셨다. ] [ 해독제를 발라요? ] [ 어, 따로 구하셨대. 그게 미리 해놔야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고. ]황가에는 환영회 대기 장소들을 살핀다는 핑계를 이미 댔다고도 했다.
하기야 황가뿐만 아니라 숱한 귀족들이 도련님을 노리고 있으니 이해가 되었다.
그간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귀족들의 질시도 함께 얻은 도련님이니까. 북부와 다르게 이곳에서도 또 다른 위험이 만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왜 굳이 림슨 형에게 시키지?’
의아했지만, 곧 이어지는 림슨 형의 말에 이해했다.
그도 도련님처럼 그 독의 여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며 덧붙였다.
[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꼼꼼한 편이 아니지 않냐. ]나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전부터 같이 시종 방을 공유하던 룸메이트로서 모를 리가 없지.
림슨 형이야 짐이며 뭐며 다 늘어놓고 다니고, 물건도 자주 잃어버리고, 청소도 잘 못 했다.
[ 네가 가서 도와주면 더 확실할 것 같다. 해줄 수…… 있겠냐? ]마지막까지 도련님께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거들고 싶었다.
그래서 림슨 형의 부탁에 당연히 응했고, 지금 이 황성까지 함께 당도하게 되었다.
물론 도련님이 귀환하기 직전에 저택을 벗어나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있을 때 해결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황성에 오자 문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