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0)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4화(10/203)
004
짹짹, 짹짹.
아침을 지저귀는 새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중이었다.
‘벌써 시간이.’
전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스탯, 스킬창을 걸리적거리지 않게 시야 구석으로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큼한 이슬 냄새. 피곤함에 찌든 육체가 재충전되는 기분이었다.
황제 육성 시뮬레이션 《Lost Saga》.
처음엔 현생이 게임 속 세상이기라도 한 건가 의심했었다.
‘아닐 확률이 높아.’
일단 스킬창의 그 방대한 스킬들. 더군다나 태권도, 천마신공 등을 검색한 결과, 접근권한이 없어?
그런 게임, 있을 리가 없다.
– 아르카나 시스템 접속 중.
특히 [Login]을 눌렀던 순간 스쳐 지나갔던 그 메시지.
– 왕자님, 오늘은 지식의 여신 아르카나에 대해 들려드릴게요. 그녀의 도서관에는 모든 세계의 지식은 물론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까지도 기록되어있다고 전해져요.
어릴 적 잠자리에 유모가 들려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세계는 신이 실존한다.
지식의 여신과 시스템의 이름이 똑같은 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르카나 시스템에 접속 중’이라는 문장에서 시스템을 도서관으로 바꿔도 지금 내 능력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전생에 내가 구했던 아이가 유희 중인 아르카나였을지도?
하여튼.
밤을 홀딱 새며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뭔들 어쩌리.
내가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앞으로 이 능력을 이용해 어떻게 살아가느냐겠지.
주변 상황이 엿 같아도 환생을 경험한 김에 인생 리셋을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다음이 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이미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자는 다짐을 했다.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극히 혐오한다.
‘기회가 되면 아르카나 교단의 신전을 한번 찾아가 보자.’
그렇게 새벽 공기를 마시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빗자루를 손에 쥔 알폰소가 터덜터덜 걸어가는 게 보였다.
하품을 쩍쩍하며 정원길을 청소하는 녀석.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구석에 처박아뒀던 상태창들을 살폈다. 알폰소의 것을 찾아 눈앞으로 끌고 왔다.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관계 : 경계]일단 저것부터 개선해봐야 할 것 같았다.
스킬을 익히는 데 필요한 재화 RP. R이 아무래도 관계를 뜻하는 Relation의 약자 같단 말이야.
······ 잠깐, 굳이 저 의뭉스러운 녀석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하나? 조금 더 속이 투명한 인간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
다음 날.
머리 부상을 핑계로 침실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던 내게 손님이 찾아왔다.
3왕녀 아네트 리오넬.
허리까지 오는 웨이브 진 흑발과 에메랄드빛 녹안이 눈길을 사로잡는 나의 동복 누님. 한때 북부의 꽃이라고 불렸다던, 펜던트 속 초상화에 담긴 어머니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리오넬 왕가의 상징과도 같은 흑발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유령이 왕궁을 떠돈다는 괴담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에반, 정말 괜찮은 거니?”
“네. 누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에 룬디네 교단의 주교님도 뵙지 않았습니까? 보시다시피 상처 하나 없습니다.”
평소라면 신관을 보조하는 치료사 선에서 끝났을 일. 어제 뜬금없이 물의 여신 룬디네의 주교가 방문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었다.
알폰소가 다급하게 준비해왔던 차를 한 모금 마신 누님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녀석이 끓이는 차가 더럽게 맛이 없긴 하지.
“그런데, 말투도 그렇고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우리 동생이랑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다니 이 누나는 기쁘단다.”
내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는 누님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딱히 남의 몸을 빼앗은 것도 아닌데 변명을 지어내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전생을 자각하고 좁았던 시야가 탁 트였다. 그대로 살았다가는 적당한 시기에 죽기 딱 좋은 곳으로 보내질 게 뻔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설령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누르고 [Login]은 눌렀을 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분명 달라졌을 거다.
“그, 그렇니? 갑자기 어른이 되었구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누님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찻잔에 손을 가져가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누님 뒤에 서 있는 호위 기사를 힐끔 바라봤다. 동시에 유령손으로 그의 이마를 톡 하고 터치.
나와 그의 관계를 재빨리 확인했다.
[관계 : 불신]경계보다 조금 더 붉은 글씨.
‘저 인간도 불신이네.’
RP를 얻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올려보자고 마음먹은 후, 보이는 사람마다 상태창을 열어봤었다.
그 결과.
상대방과의 관계가 상태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과 큰 연관이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불신이면 보나 마나 [숨쉬기], [걷기] 같은 걸 제외하면 전부 [?].
추가로 불편한 진실도 하나 알게 됐다.
앞에선 친한 척 다해놓고 나를 ‘경계’하던 알폰소. 알고 보니 누님을 제외하곤 나와 가장 돈독한 사이더라.
어째 주변에 죄다 나를 ‘불신’하는 놈들 뿐이었다.
뭐, 이해는 한다.
가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내 주변 사용인들의 목이 싹 날아갔었다. 그런 왕자, 나라도 친해지고 싶지 않다.
가물에 콩 나듯 확인이 가능했던 그들의 스탯 한두 개로 일반인의 평균이 D 정도라는 걸 검증해낸 건 그나마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씁쓸, 알싸한 맛이 나는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며 아까 몰래 펼쳐봤던 누님의 상태창을 슬쩍 바라봤다.
━━━━━━━━━━━━━━×
아네트 리오넬
성별 : 여
나이 : 16
종족 : 인간
[스탯] [스킬] [관계 – 신뢰]━━━━━━━━━━━━━━
녹색의 ‘신뢰’라는 글자에 눈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훈훈해졌다.
‘신뢰 관계면 물음표가 거의 없겠지?’
대화 중이라 스탯, 스킬창은 열어보지 못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유령손이 움찔움찔 검지를 움직였다.
‘안되지, 대화 중인데.’
안 그래도 금방 자리를 파해야 할 것 같으니 그때 확인하면 된다. 지금도 누님의 시녀가 연신 회중시계를 여닫으며 내게 뜨거운 눈치를 주는 중이었다.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바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내 말에 시녀가 반색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누님의 귓가에 뭐라 뭐라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은데, 선생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구나.”
“괜찮습니다.”
“조만간 어머니의 기일이니 올해는 꼭 함께 가자꾸나.”
“알겠습니다.”
누님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내 옆을 지키던 알폰소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폰소, 정리 부탁해.”
“넵!”
능숙한 솜씨로 테이블의 찻잔을 치우기 시작하는 녀석. 본래 시종이 할 일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에메랄드궁은 기본적인 유지보수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된 탓에 인력이 극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천천히 다녀와. 볼일도 있으면 좀 보고 와도 돼.”
“하핫, 바람처럼 다녀오겠습니다.”
쟁반에 찻잔을 챙겨나가는 알폰소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녀석이 방문을 닫고 나간 후, 혼자 남게 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한번 볼까?’
호위 기사의 것은 바로 꺼버리고, 누님의 상태창을 자세히 살펴봤다.
먼저 스탯.
예상대로 물음표로 가려진 것 없이 전부 확인이 가능했다. 체력이 다소 낮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별다른 특이사항은 찾을 수 없었다.
스탯창을 닫고 스킬창으로 넘어갔다.
━━━━━━━━×
[숨쉬기] [걷기].
.
.
[승마] [꽃꽂이] [궁중 예법].
.
.
[미녀] [?]━━━━━━━━
딱 하나 확인할 수 없는 걸 제외하면 전부 왕실의 왕녀라면 보유하고 있을 만한 것들.
재미있는 건 누님이 보유한 [미녀]가 내가 보유한 [미남]보다 한 단계 높은 희귀 등급이라는 사실이었다.
원래 [미녀]가 [미남]보다 더 고평가받는 건지, 아니면 이름이 같은 스킬이라도 등급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뭐, 나중에 표본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었다.
걸리는 게 있다면 역시 저 [?].
‘신뢰’ 관계에서도 확인이 안 되는 거면 뭐지? 대체 무슨 관계를 형성해야 볼 수 있는······.
‘설마 군신관계?’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
로스트 사가, 이하 로사의 장르가 황제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고려하면 꽤 그럴듯했다.
‘황제라······.’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을 내려다보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열고, 작은 수첩을 꺼내 펼쳤다.
환생, 로스트 사가, 황제 육성 시뮬레이션······ 남들이 보면 이게 뭔가 싶은 단어들이 나열된 페이지들.
의식의 흐름대로 이런저런 것들을 두서없이 메모해놓았다. 한글로 적어놓은 탓에 보안에 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펜을 들고 수첩에 ‘알폰소’를 크게 적었다. 녀석의 이름 위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어떻게 해야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똑똑, 똑똑.
“왕자님. 다녀왔습니다.”
“들어와.”
시종, 시녀는 왕족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 365일, 잘 때는 물론이고 화장실을 갈 때조차 모시는 이의 주변에서 대기한다.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보통은 수석 시종을 필두로 5명 내외의 인원이 역할을 분담한다.
하지만 내게 배속된 시종은 알폰소 단 한 명.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홀로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 평소라면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은 녀석이 어제부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유야 뻔하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으니 혹시 마족이나 흑마법사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슬쩍, 책상 옆에 서 있는 녀석을 훔쳐봤다.
‘눈을 뜬 거야 만 거야.’
눈이 하도 작아서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 한동안 노트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던 나는 펜을 내려놓고 알폰소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알폰소.”
“넵, 왕자님.”
“넌 어째서 왕궁에 들어왔지?”
“하하, 시골 남작가의 셋째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대충은 알고 있다.
작위를 계승할 가망이 거의 없는 그들이 왕실의 사용인이 된다는 건 전생으로 치면······ 행정고시 패스까지는 아니더라도 7급 공무원 합격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닌가, 그것보다는 위려나?’
아침에 복도에서 마주쳤던 하녀의 귀에 걸려있던 루비 귀걸이가 떠올랐다. 이래저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콩고물도 짭짤한 것 같았다.
‘비싸 보이던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개판이 따로 없었다.
어떻게 하녀가 당당히 장신구를 착용하고 돌아다니지? 다른 궁 같았으면 어림도 없다. 최소한 전속 시녀는 되어야, 그것도 모시는 이의 허가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질 안 좋은 4왕자나, 그의 누이인 4왕녀의 궁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모진 채찍질에 등짝이 터져나갈 거다.
“저희 하임델가는 말이죠······.”
알폰소의 이어지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요한 이야기 중에 잠시 딴생각을 해버렸다.
아무래도 내 전속 시종이 되었을 때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하려는 것 같았다.
진짜도 아닐 지루한 소설을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재빨리 말을 잘랐다.
“내가 물어본 사람은 너야, 알폰소 아인베르크. 하임델 남작가의 셋째가 아니라.”
“네?”
들었으면서 왜 되물어.
도무지 어떻게 녀석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지 방법을 못 찾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
정면 돌파였다.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알폰소 ‘아인베르크’, 너는 왜 왕궁에 들어왔냐고.”
알폰소의 본래 성에 강한 강세를 주며 다시 물었다.
“······.”
언제나 실실 웃고 있던 녀석의 가면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실눈 너머로 보이는 녀석의 파란 눈동자가 지극히 차가웠다.
오싹.
오한이라도 난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살기라는 건가? 직접 겪으면 어떤 느낌인가 궁금했었는데.
‘한번 죽어봐서 그런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