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06)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06화(106/203)
106
리오넬 왕국의 국왕, 필리프는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메랄드궁의 유령왕자라 불리었던, 지방 남작가의 영애만도 못한 세력을 보유했었던 그였다.
필리프는 에반이 걸어온 길을 되새겨봤다.
누명을 쓴 왕실 재판에서 2왕자를 끌어들여 자신을 궁지로 몬 4왕자를 시원하게 물 먹이며 유령왕자라는 허물을 벗어 던졌다. 그 일은 4왕자가 암살당한 사건의 시발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종을 살리기 위해 불체포특권을 발휘하고, 청문회에서 베오르티오를 남부의 마녀로 만들며 자신을 섣불리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톡톡히 경고했다.
검은 모루 부족과 마정석 광산의 개발, 유통 협상으로 서부인들의 환심을 얻었다.
북부해방군을 품에 안기 위해 동부의 골칫거리였던 해적들의 소탕. 그 과정에서 석함도 해군들도 충돌을 꺼리던 조 베이리 해적단을 침몰시켰다.
역병을 경고했다. 붉은별열병이 세계를 휩쓸기 시작할 때 그 치료제를 개발하면서 에이츠 상회라는, 왕국의 유례없는 대형 상회를 설립했다.
붉은별열병의 치료제를 탐낸 아르야 왕국의 7성 소환사 아미카 아르야와 매국노 바이스를 처단. 곧바로 그 주동자인 2왕자를 사형시켰다.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삼색 지팡이단을 뿌리 뽑고, 왕국 제일의 권력가였던 남부의 왕 모리아 룬티아를 청문회에서 몰아붙였다.
그리고.
남부의 민란을 정리하고 돌아온 에반이 이제 자신을 왕세자로 선포하라 필리프 그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군.’
말이 되는 업적인가?
불과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필리프가 아는 것만 그랬다. 그 이면에는 어떤 숨겨진 뒷이야기들이 있을까? 그는 그것들이 너무나 궁금했다.
“언제 왕위에 오를 생각이지?”
“폐하가 떡하니 살아계신 데, 제가 어찌 왕위에 오르겠습니까? 더는 왕국의 대소사를 살피기 어렵다 느끼셨을 때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필리프는 재떨이에 담배를 털며 픽 웃었다.
“성인식을 치르고 왕관을 쓰는 게 가장 모양새가 좋겠군.”
“뜻대로 하시지요.”
“혼자 있고 싶으니 이제 가서 볼일 보도록. 피곤해 보이는군.”
에반이 요구한 것들에 대한 확답은 필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바로 내일에도 필리프는 왕관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에반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접견실을 나갔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필리프는 에반이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며 앉은 자리에서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웠다.
“콜록콜록.”
재떨이에 다 태운 담배를 비벼 끄는데 폐를 쿡쿡 쑤시는 기침과 함께 목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녀석의 성인식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소매로 입가를 훔친 필리프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레온궁을 벗어나는 에반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릴 적 자신이 꿈꾸었던 모습이었다.
필리프는 에반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
1왕자의 장례식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국가적 행사가 아닌, 왕족과 주요 귀족들이 참석한 정도의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다.
자결인 탓이었다.
내가 우려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1왕비가 내 멱살을 부여잡으며 따귀를 날리려거나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루카스의 편지 덕분이었다.
밀로아의 말에 의하면 입관식 직후 루카스의 편지가 1왕비, 갈라드 단장과 같은 중요 인물들에게 속속들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편지들의 내용은 대동소이.
루카스가 론스웰의 민란군 앞에서 복부에 검을 찌르기 전에 말한 것들을 조금 자세히 풀어쓴 내용이 작성되어있다.
말미에는 자신이 선택을 존중해 달라고, 나를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필로 작성된, 그가 썼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편지 덕분에 장례식은 별다른 소동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1왕비, 그녀는 오늘 아들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자식 잃은 어머니였다.
“그럼 하관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실 묘지에 마련된 루카스의 자리에 그의 관이 자리 잡았다. 무덤덤한 표정의 국왕과 눈물이 말라버린 1왕비를 시작으로 왕실 사람들이 흙을 한 줌씩 덮어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삽으로 뜬 흙을 가짜 시신이 담긴 관에 부으며 그 대열에 동참했다.
“형님이 부탁하신 것들. 제가 반드시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연기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하관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장례식에는 앞으로 나와 한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모리아 룬티아 이하 남부의 대귀족과 그들과 붙어먹는 왕족들도 있었기 때문.
궁지에 몰린 인간은 상상도 못 했던 미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법. 혹시라도 그들이 관뚜껑을 열고 ‘여기 있는 게 진짜 루카스인지 확인해야 한다!’라고 외치기라도 할까 봐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이제 국왕이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을 전할 때가 되었다.
“먼저 이 자리에 참석해준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본래라면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 해야겠지만, 오늘은 그대들에게 꼭 전달해야 할 말이 있다.”
대신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루카스가 죽기 전, 남긴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되는군. 그렇네, 우리를 떠나간 1왕자 루카스는 왕위 계승을 포기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5왕자 에반에게 남긴다고 선언했지.”
국왕이 품에서 편지를 꺼내 보였다.
“루카스의 관이 닫힌 날, 나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받은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네. 루카스가 론스웰에서 벌인 일이 우발적이었다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적혀있지. 그리고 내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부탁도 적혀있지.”
잠시 뜸을 들이며 편지지를 펴는 국왕.
“폐하. 에반이라면, 리오넬 왕국을 세계에서 손꼽는 강국으로 이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사라지면 에반을 왕세자로 선포해주십시오.”
다 읽은 국왕이 편지를 접어 다시 품에 넣었다.
대신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5왕자님이 왕세자······.
– 드디어 왕국의 왕위 계승 싸움이 끝난 건가······.
– 반대가 있을 수 있나?
대개 내가 왕세자가 되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모리아 공작이었다.
“에반 왕자님의 왕위 계승 서열은 3위에 불과합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타국으로 시집가면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 1왕녀, 4왕녀를 빼도 내 위에는 2왕녀와 3왕녀가 존재한다.
내가 반박하기에는 모양새가 좀 떨어진다.
나는 베르트와 클리앙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서로 누가 나설지 눈빛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조금 더 발언력이 센 베르트가 나서려는 순간. 조용히 있던 누님이 손을 들었다.
“왕국의 3왕녀인 저 아네트 리오넬은 지금, 이 순간 부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함을 맹세합니다.”
모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 풉.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코에 먼지가 들어가서······.”
베르트였다.
“모리아 공작, 1왕녀님이 시집가기 전 왕위 계승 서열이 분명 1위 아니었나? 그때 분명히 왕위 서열 2위였던 1왕자님을 왕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로남불을 지적하는 그의 말에 모리아가 즉각 반박했다.
“왕위 계승 서열은 마력을 각성한 왕족에게만 의미 있는 것! 당시 1왕녀님은 마력을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이었소! 아직 왕국에는 5왕자님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앞서는 천재 마법사 2왕녀님이 존재하오!”
“오늘 장례식장에 참석하지도 않은 2왕녀님 말이오?”
“머나먼 타국의 마탑에서 수학하고 있기에 연락이 늦어서일 터! 곧, 돌아오실 거요.”
“호오, 2왕녀님과 연락이라도 하신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구려.”
베르트의 말에 모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연락이 안 되겠지.
왕궁으로 복귀 직후, 밀로아로부터 2왕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 말로는 루카스의 연락을 받고, 귀찮은 일을 피해 몸을 숨긴 것 같다고······.
“모리아 공작.”
갑작스러운 국왕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왕위 계승 서열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는 걸 잊었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국왕의 말에 모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바로 국왕인 나의 의지지.”
국왕이 나를 슬쩍 바라봤다.
통쾌해 보였다.
그동안 국왕이 남부의 왕인 모리아의 의견에 반하는 일,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큰소리 한번 치지 못했던 모리아에게 그의 귀청이 떨어지도록 원 없이 고함쳐보라고.
“나는! 리오넬 왕국의 국왕인 나 필리프 리오넬은! 왕국의 유일한 왕자인 에반 리오넬을 왕국의 왕세자임을 이 자리에 선포하는 바이오!”
국왕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일체의 반박은 허용하지 않겠소. 왕세자, 에반 리오넬의 첫 소임으로 남부 민란으로 미뤄졌던 건국 500주년 신년회의 주관을 맡기겠소. 에반,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무릎을 굽힌 후, 고개를 살짝 들어 국왕을 바라봤다.
“물론입니다. 국왕 폐하.”
잠시의 침묵.
“국왕 폐하 만세! 왕세자 전하 만세!”
베르트와 클리앙을 시작으로 모여있는 이들 대부분이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은 채 파르르 떨고 있는 모리아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다음날.
『왕세자로 책봉된 에반 왕자님!』
『즉위식은 언제?』
『왕세자 전하의 첫 데뷔는 500주년 신년회?』
본래 신년회는 매년 1월 15일에 열리지만, 올해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상식적으로 남부에서 그런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는데 신년회를 개최할 정신 나간 국가는 없다.
예년 같았으면 이왕 늦어진 거, 신년회 없이 조용히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는 안 된다.
500주년이다.
‘미래’에서는 붉은별열병이 왕국을 휩쓰는 와중에도 소박하게나마 진행했던 500주년 신년회.
“엄청 열정적이시네요.”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결재하다 잠시 알폰소가 가져온 신문을 읽고 있던 내게 녀석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뭐가?”
“올 초에는 500주년이 뭔 대수냐며 신년회를 준비하는 걸 엄청 귀찮아하시지 않으셨어요?”
“내 왕세자 즉위식도 함께 있잖아. 게다가 붉은별열병에 이어 남부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란으로 왕국민들이 속이 뒤숭숭한 때야. 분위기를 환기해줄 필요가 있어.”
나는 다 읽은 신문을 알폰소에게 건네줬다.
“가져가고 가서 줄리앙을 좀 데리고 와.”
“넵.”
알폰소가 나가고, 나는 계속 서류를 결재했다. 갈 곳이 사라진 토파즈궁의 인원 일부를 에메랄드궁에 배치하는 계획서를 점검하고 있을 때.
똑똑, 똑똑.
“왕자님, 줄리앙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 들여보내고 알폰소 넌 네 일 봐.”
“알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줄리앙이 들어왔다.
나는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올리고 그를 바라봤다. 요 며칠 사이 허옇고 까맸던 안색이 조금 더 까매진 것 같았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냈나?”
“알폰소 님이 붙여준 아이에게 부탁해 읽고 싶던 책들을 잔뜩 읽었습니다.”
“그래? 주로 무슨 분야를 읽었지? 정치? 행정? 외교?”
“딱히 가리는 분야는 없지만, 전쟁사 쪽이 특히 재미있더군요.”
그의 눈빛에 진한 아쉬움이 엿보였다.
“아쉬운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 억울합니다. 제게 이렇게 짧은 운명을 내린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왕자님이 만들어갈 미래를. 그 과정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 분합니다. 제가 심은 나무가 자라 거목이 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왕자님 곁의 가신들이······ 미친 듯이··· 부럽습니다.”
주먹 쥔 줄리앙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대고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욕심인 건 잘 압니다. 남부인들에게 바람을 넣어 민란을 일으킨 저는 본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겠지요. 지금같이 호화스럽게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쓸만한 계책을 세운 보상이야. 내가 상벌이 좀 철저한 편이거든.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인간을 괴롭혀봤자 잠자리만 뒤숭숭하겠지.”
“클리앙 백작, 밀로아 백작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세운 계책이 통했을 때 느꼈던 전율은 죽어서도 기억이 날 겁니다.”
나는 뒤로 늘어져 있던 몸을 줄리앙 쪽으로 기울였다.
“살고 싶나?”
“네?”
“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상상해 봐. 하나는 왕국의 8성 기사를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자네에게 주어진 천명을 연장하는 것.”
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줄리앙, 자네는 자신이 8성 기사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