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10)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10화(110/203)
110
“당신도 꽤 재미없는 사람이었군.”
데릭은 줄리앙을 압박하던 기운을 풀며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내심 그의 강단을 인정했다.
굶주린 사자에게 먹히기 직전인 쥐새끼 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어지간한 범인이라면 당장이라도 공포에 질려 정신을 잃었을 터.
“어쨌든 내 답은 거절이야.”
데릭이 자신이 먹은 속이 텅 빈 게 다리 두 개를 X자로 교차시키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줄리앙.
‘역시······ 반골의 기질을 타고났어.’
그는 데릭을 대면하면서 드디어 그라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갈림길에서 남들이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 홀로 왼쪽으로 걸어갈 인간이다. 다 함께 영차영차 힘을 합쳐 일할 때면 시원한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자고 싶겠지.
지금도 마찬가지.
왕국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에반을 지지하고, 자신도 그 무리에 합류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을 거다.
‘하지만 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갈 만큼 어리석지도 않아.’
본능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딘지 아는 게 분명했다.
줄리앙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핑계로 에반에 대한 지지를 미루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못이기는 척 합류하는 데릭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그래서 왕자님도 적극적으로 데릭 후작을 설득하지 않은 걸 거야.’
어차피 종국에는 데릭이 자신을 지지할 수밖에 없음을 에반도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레이나 남작의 제자, 로이르를 붙여놓는 선에서 내버려 두고 있던 거겠지.
데릭이 없더라도 소각 대상인 모리아 공작 이하 남부 귀족들을 깔끔하게 불태울 자신이 있는 거다.
그 자신감의 근원은 아마도······.
‘아미카 아르야와 매국노 바이스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은 숨은 송곳니.’
뭔지는 아직 모른다.
클리앙은 아는 눈치였는데,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데릭 후작을 설득해야 했다.
줄리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데릭 후작님은 왕세자 전하를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익살스럽게 웃던 데릭의 눈꼬리가 움찔했다.
“어이, 말은 바로 해야지. 나는 ‘당장’ 왕세자님을 지지하기엔 내 모양새가 영 그렇다고 했잖아?”
“제 귀에는 지금 후작님의 말씀이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왕세자 전하를 지지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후작님, 후작님은 지금 큰 착각을 하나 하고 계십니다.”
“착각?”
“왕세자 전하가 후작님을 원할 거라는 착각이죠.”
“그게 우리 왕세자님의 지지를 선언하라 설득하러 온 사람이 할 말인가? 뭐, 일단 계속 떠들어 봐.”
“객관적인 입장에서 왕세자 전하에게 있어 데릭 후작님의 가치를 말해드리죠. 있으면 좋지만, 절실하진 않다. 딱 그 정도입니다.”
자존심을 후벼파는 줄리앙의 말에 데릭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 어디까지나 제 사견입니다. 왕세자 전하가 직접 언급한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동부 해상 방어의 핵심 지역인 블랜트 후작령의 주인이자 7성 기사, 거기에 석함도의 해군 대장인 내 가치가 고작 있으면 좋다? 당장이라도 모리아 노친네에게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하고 싶어지게 만드는군.”
줄리앙이 빙긋 웃었다.
“안 하실 거 압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리아 공작과 손을 잡는 순간, 블랜트 후작가는 동부에서 고립됩니다. 그리고······ 그런 블랜트 후작가를 군침 흘리고 바라볼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죠. 요 몇 년, 남부라는 커다란 적을 두고 하나로 뭉친 것 같은 동부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시도 때도 영지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7성 기사인 내가 지키는 블랜트 후작가를 누가 노린다는 말이지?”
“한 손으로 열 구멍 막을 수 없는 법이죠. 그리고 이건 정말 가정입니다만, 왕세자 전하가 왕위를 계승한 후, 블랜트 후작 가문의 모든 것을 프란 님에게 넘겨준다고 선언하시면, 막으실 수 있습니까?”
“······.”
“아마 왕세자 전하가 오늘 이후 데릭 후작님을 설득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일이 없을 겁니다. 직접 오시는 일은 더더욱이요. 어차피 후작님은 결국에 왕세자 전하를 지지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 기회다.
손을 내밀어 줬을 때 얌전히 잡아라.
줄리앙은 그런 눈빛으로 데릭을 바라보았다.
“아까 했던 말을 철회해야겠어. 자네, 꽤 재미있는 인간이었네? 우리 왕세자님이 나를 설득하러 보낸 게 맞나 싶어. 나를 설득해야 신임을 얻는 거 아니었나?”
“후작님의 설득은 제가 왕세자 전하의 신임을 얻기 위한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줄리앙이 자신 앞의 수프를 바라봤다.
“왕세자 전하가 제게 바라신 것이 이 수프를 만드는 거였다면······ 후작님을 설득하는 것은 주재료인 게살을 준비하는 것에 해당하겠군요. 하지만, 수프를 꼭 게살로 만들 필요는 없죠. 게살이 없으면 다른 고기나 야채로 주재료를 바꿔도 될 일 아니겠습니까?”
다른 재료를 준비할 시간이 매우 촉박하단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 어이가 없군. 클리앙 자네도 이 인간과 같은 생각인가?”
얌전히 둘의 대화를 들으며 깔끔하게 게살을 발라 먹고 있던 클리앙.
냅킨으로 입가를 꼼꼼히 닦은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 돌려 말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어디에도 줄리앙이 말한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데릭의 입과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줄리앙, 후작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건가?”
“네, 클리앙 백작님.”
“매우 귀한 음식인데 식사를 하나도 안 했군.”
“괜찮습니다.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지요.”
“알았네. 그런 이유로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데릭 후작님. 로이르군, 아니, 로이르 대위도 오랜만에 반가웠네.”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클리앙과 줄리앙.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로이르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갔다.
로이르는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을 동석시킨 데릭은 물론, 일개 해군 대위 앞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꺼내는 클리앙과 줄리앙도.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벌써 반년 넘게 데릭을 보좌했다. 지금 당장 나가서 두 사람을 다시 데려오라는 그의 눈빛을 해석할 짬은 되었다.
“데릭 후작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로이르는 후다닥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쫓아갔다.
***
국무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내 발언이 끝나고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질문들 때문이었다.
오늘 발의한 귀족명예법은 왕실위원회, 귀족의회와의 조율 후 최종적으로 공표될 거란 말을 마지막으로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회의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끝이 났다.
나는 밀로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왕국 밖으로 나섰다. 크리스티 백작가에서의 저녁 약속이 잡혀있었다.
물론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진짜 이유는 어제 루카스가 깨어났단다.
다그닥, 다그닥.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밀로아가 먼저 말을 붙였다.
“왕실사관학교 필수 교양 과목인 ‘국가론’을 들었을 때가 생각나는 시간이었어요.”
“유치했다는 말인가?”
“설마요. 회의 시간에 봤던 영상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해요. 단순히 말로만 안건을 발표하는 것과는 확실히 색달랐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조만간 국무위원들이 안건을 올릴 때마다 왕자님을 따라 한다고 가랑이가 찢어지게 생겼네요.”
종이 몇 장 가지고 와서 툭툭 안건을 발의하던 기존 국무회의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런 것까지 의도한 건 아닌데······.
발표 자료 준비를 위해 장관들에게 들들 볶일 아래 관료들이 잠깐 안쓰러워졌다.
‘뭐 나쁜 일은 아닌가?’
학예회만도 못한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비웃음거리도 돼보고 그러다 보면 국무회의의 질도 급상승하지 않겠는가.
“아! 교육 현장에서도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마정석이 지금보다 10배는 싸져야 가능한 일이겠죠? 검은 모루 부족이 소유한 마정석 광산 정도의 매장량을 가진 광산이 다섯 개 정도는 왕국에서 발견되어야······ 왕자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니,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까 해서.”
“왕국에 마정석 광산이요?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제가 행정관료가 되고 처음 했던 일이 국토조사였어요. 리오넬 왕국에 상급 이상의 마정석이 발굴될 광산은 존재하지 않아요. 정말 슬프게도 말이죠.”
나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저출력 마정석의 여러 개를 이용해 고출력을 낼 수 있게 만드는 프란의 프로젝트 ‘스텔라’의 프로토타입이 거의 완성되었다.
스텔라가 세상에 선보이는 순간, 세계 각국은 마력초전도체 때 이상의 충격을 받을 것이다.
“혹시······ 마정석 광산 하나 꿍쳐두셨어요? 저한테만 살짝 말해주세요. 절대로 비밀로 할게요.”
“없어. 그런 거.”
“으음······ 분명히 뭘 숨기고 있으신데······.”
나는 침묵으로 답했다.
밀로아가 치사하다는 듯 나를 흘겨본 후 뾰로통한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봤다.
다그닥, 다그닥 이동 내내 그녀는 손가락을 가만히 놔두질 못하고, 간헐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금단증상이다.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죽을 것 같은 모양이네.’
결국 대화로 흡연욕을 참을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데릭 블랜트 후작의 설득은 잘 되었을까요?”
“글쎄······ 어떨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신 것 같네요.”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이면 일찌감치 나를 지지해주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겠지. 하지만, 남부의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버텨도 상관없어.”
“······ 귀족의 힘이 더 줄어들 테니까요?”
밀로아의 정답에 씩 웃어주었다.
바이스가 가주로 있던 동부의 로크르크 공작 가문은 매국 행위와 연루되어 몰락했다. 거기에 곧 남부의 룬티아 공작가도 같은 운명이 될 처지.
귀족파의 힘은 내가 전생을 막 자각했을 때의 절반 수준으로 깎였다.
블랜트 후작 가문은 남은 귀족 가문 중 한 손에 꼽히는 세력을 지니고 있다. 내게 일찍 합류할수록 도의상 챙겨줘야 할 것이 많다.
만약 그가 남부 쓰레기 청소 시기까지 합류하지 않는다면, 남부의 쓰레기들을 태우는 데 매우 많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막강한 금력은 7성 기사도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로 만들어버릴 힘이 있다는 것이 바이스를 잡을 때 이미 증명되었다.
‘사용된 비용은 블랜트 후작가에게 청구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크리스티 백작가의 사용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크리스티 백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왕세자 전하.”
“환영합니다, 왕세자 전하.”
마차에서 내린 밀로아가 집사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집무실에 있을 거야.”
“접견실이 아니라 집무실 말입니까?”
“오늘 국무회의에 올라왔던 안건에 관한 자료가 집무실에 있어서 말이야. 왕자님과 의논할 게 좀 많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밀로아의 집무실에 나와 그녀, 그리고 내 호위로 따라온 레이나만 남았다.
“잠시 볼일 좀 보고 올게요.”
“담배 피우고 오는 게 아니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가만 보면 왕자님도 매너가 있는 척, 참 없으셔요.”
화장실 가는 척 잠시 뒤에 돌아온 밀로아에게서 담배 냄새가 풀풀 났다. 내가 코를 살짝 찡그리자 그녀가 킁킁 옷의 냄새를 맡았다.
“분명 향수를 뿌렸는데······.”
“원래 흡연자들은 자기 냄새 몰라.”
겸연쩍게 웃으며 책장으로 다가간 밀로아.
“잠시 뒤돌아봐 주세요.”
나와 레이나는 부탁대로 등을 돌렸다. 뒤에서 그녀가 책장의 책을 뽑았다 꽂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리고.
구궁- 구구궁.
벽난로 옆에 사람 한 명 들어갈 입구가 생겼다.
“하, 이거 진짜 크리스티 백작가의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비밀 통로인데······. 빨리 오세요. 레이나 경도요.”
밀로아가 꿍얼거리며 나와 레이나를 안내했다.
어두운 길을 이리저리 걷다 보니 어느 순간 환해지고, 지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쾌적한 공간이 나왔다.
“······ 967, 968, 969··· 여! 왔어?”
그곳에서 웃통을 훌렁 까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루카스가 우릴 반겼다.
살짝 야위긴 했지만, 건강해 보였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그의 가슴팍에 시선이 갔다.
칼에 찔린 흉터가 선명했다.
“여유가 되면 흉터도 치료하시죠.”
“됐어.”
“혹시라도 상처 위치 때문에 살아 계신 게 들킬까 봐 그런 겁니다.”
“정 없는 녀석.”
루카스가 투덜거리며 웃통을 주워 입었다.
“그래서 안 죽었나 확인하러 온 거야?”
“그것도 있고 드릴 게 있습니다.”
“나한테?”
나는 품에서 유령가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네이브, 앞으로 형님이 자주 사용하실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