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23)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23화(123/203)
123
<123>
오랜만에 누님과 티타임을 가졌다.
아이라, 그리고 비번인 레이나가 함께였다.
날씨가 좋아 시원한 그늘이 있는 곳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자리 잡았다. 트레이를 끌고 온 시녀가 찻잔에 차를 또르륵 따랐다.
확 퍼지는 고소한 향.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약같이 시커먼 차의 색에 옆에 앉아있던 레이나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누님이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아이라 자작이 남대륙에서 들여온 카핀이란 차랍니다. 독특하게 잎이 아니라 열매를 볶아 우려내지요. 향이 정말 좋아요.”
나는 찻잔을 들어 향을 깊게 음미했다.
‘아, 이거······.’
머릿속에 잠들어있던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로변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카핀이라······ 커피랑 이름도 비슷하네.’
어떻게 커피를 잊어먹고 있었지?
시간이 지날수록 전생과 ‘미래’의 기억 중 현생을 사는 데 보탬이 안 되는 것들은 빠르게 매몰되어 간다.
중요한 건 현생이기에 그렇게 아쉽거나 하진 않다.
다만 궁금하긴 하다.
전생에 난 대체 뭐하던 인간이었을까?
아카드와 베오르티오를 모략에 빠트릴 때 머리가 핑핑 돌아갔던 걸 떠올리면 정치 관련 일을 했었을 것 같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이공계 지식을 생각하면 대학원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프랑켄의 죽음을 위장했을 때는 고위 마법사들도 속일 정도의 마술 트릭을 사용했었지. 마술사였을지도?
으음······ 그것들을 종합해보면.
‘마술이 취미인 이공계 대학의 총학생회 회장을 지낸 대학원생?’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추측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실을 알 수 있는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에반, 카핀의 향이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내 웃음을 오해한 누님.
“네. 뭔가 추억이 떠오르는 향이네요.”
적당히 화답하며 카핀을 한 입 홀짝 마셨다.
망설이던 레이나도 찻잔을 손에 들어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갔다. 본격적인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군요.”
누님이 고른 첫 화제는 클리앙과 밀로아.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와이트 백작가와 크리스티 백작가. 동부와 남부를 대표하는 두 유력가문의 결합은 세간의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길에서 쑥덕대고 있는 이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면 열에 여덟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 것이다.
“아이멘 제국에서 출장 중에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레이나 자작님은 알고 있었어요?”
“전혀 몰랐습니다.”
7성 기사가 된 레이나는 자작으로 승작했다.
시간의 문제일 뿐, 백작위까지는 고속도로가 뚫려있다.
“예전에 두 분이 파혼했던 이유가 밀로아 백작님이 다른 남성분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하실 줄은······”
“어머, 어머. 레이나 자작님. 완전히 잘못 알고 계세요. 그건 밀로아 백작님이 가문에서 마음대로 정한 약혼을 파기하기 위한 연기였어요!”
“그, 그런가요?”
그 거부했었던 혼처가 와이트 백작가의 클리앙이었단 것이 아이러니. 굳이 꺼낼 말은 아닌 것 같아 조용히 있었다.
“확실해요. 밀로아 백작님, 정말 멋지지 않아요? 가문이 정한 혼처를 거부하고 본인이 개척한 길을 걷는 신여성!”
밀로아가 롤모델인 귀족 영애는 매우 많다. 아이라도 그중 하나였다.
아이라가 알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면서 밀로아의 뒤를 잇는 신여성으로 아이라를 추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이다.
“후훗,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라 자작 곁에 꼭 붙어 다니는 신사분이 있다고 들었어요. 오늘은 왜 안 데리고 왔나요?”
“앗! 전혀! 전혀! 아무 사이 아니에요. 왕자님이 부탁하셔서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거랍니다.”
줄리앙을 말하는 거였다.
슈이츠의 치료를 받은 그는 현재 약만 잘 챙겨 먹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해외 출장이 잦은 아이라 곁에서 세계를 직접 경험해보라고 잠시 붙여놓은 건데 이런 오해를 살 줄은 몰랐다.
“맞습니다. 제 부탁으로 아이라 자작이 그를 데리고 다니고 있는 겁니다.”
얼른 해명해줬다.
“어머, 내가 오해를 했네요. 미안해요, 아이라 자작. 제가 나서서 헛소문을 바로잡아야겠네요.”
“꼭! 꼭! 부탁드려요.”
그동안 별다른 보고가 없어 몰랐는데 아이라와 줄리앙이 썩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가 여자한테 다정다감한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아마 마차를 탈 때도 에스코트 안 해주고 혼자 훌렁 올라갔을 거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불현듯 무엇인가 떠오른 표정의 누님이 호위기사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시선이 오늘 비번인 레이나 대신 내 호위를 맡고 있던 아돌을 향하고 있었다.
“아돌 경, 잠깐 이리 와보세요.”
그가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녀님.”
“아돌 경, 애인 있으세요?”
누님의 직설적인 물음에 당황한 더먹머리 아돌.
“어, 없습니다!”
그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외쳤다.
“아돌 경을 꼭 뵙고 싶어 하는 영애가 있는데,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저를 말입니까? 전 일개 기사일 뿐입니다. 왕녀님과 친분이 있을 정도의 귀한 영애분과 만나기는 조금······.”
“후훗, 현명한 여인은 현재보다 미래를 보는 법이죠.”
친선 대항전 당시 선발된 기사들 간에 실력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뒤치락엎치락하는 정도?
그런데도 그들 중 아돌만 왕국민 사이에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3명의 흑기사에게 연거푸 승리하던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반면에 다른 세 명은 실력을 속이고 참가한 흑기사 유랜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
뭐, 운이 좋은 거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왕국민들 사이에선 다음 7성 기사는 아돌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상태다.
“이 영애예요. 어때요? 참 곱죠?”
“헤······.”
아돌이 누님이 건넨 영애의 사진을 보고 입을 바보처럼 벌렸다.
저 모습을 베록과 버논이 본다면······.
‘수련에 더 박차를 가하려나?’
때론 질투가 좋은 원동력이 될 때도 있으니 굳이 그들을 위로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제가 날을 잡아볼 테니 그동안 머리도 단정하게 정리 좀 하시고요. 아셨죠?”
“아, 알겠습니다.”
아돌과 볼일을 마친 누님이 매의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 에반도 기다리렴. 이 누이가 좋은 사람을 엄선하고 있단다.”
갑자기 들어온 누님의 공격.
잠시 멈칫했던 나는 이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보다 누님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
깔끔하게 방어 성공.
나는 조용해진 분위기에 만족하며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근데, 정말 누님도 슬슬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할 텐데······.
아니, 여기 있는 세 여자 모두.
***
클리앙과 밀로아의 결혼식은 성대했다.
나도 축사를 읊으며 한 손 거들었다.
10여 년 넘게 갈등하던 남부와 동부. 두 지역의 유력가문 간 결합이니만큼 화합의 시작을 알리기 딱 좋았다.
두 백작 가문의 가주인 두 사람이었기에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들이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태어날 아이의 ‘성’을 와이트라고 해야 하나, 크리스티로 해야 하나, 그런 것들 말이다.
일단 밀로아의 배가 불러오기 전에 후다닥 결혼식이 진행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결혼 전에 임신부터 덜컥해버린 걸 들킬 수는 없는 일.
응? 뭔가 말이 조금 이상한데?
어쨌든.
결혼식을 무사히 마친 둘이 신혼여행으로 부재한 동안 나는 그들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강마의 후유증으로 앓아누웠던 동안 밀려있던 왕세자로서의 업무에 대체자가 없는 두 사람의 업무까지 일부 떠안고 나니 와······ 서류에 파묻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매일매일이었다.
그래서 둘이 손잡고 돌아오길 간곡히 기다렸건만.
“클리앙, 밀로아는 어디 두고 혼자 온 거지?”
나는 본인의 업무를 받아 갈 클리앙과 책상에 한가득 쌓여있는 기무대 관련 서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조금 말썽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고 나면 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크게 다퉈 잠적해버린 건 아닌지 걱정했었다.
“아! 절대 다투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일정에 조금 문제가 생겨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알아내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클리앙과 밀로아는 둘 다 일기를 쓰는 훌륭한 습관을 지니고 있다. [도서관]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
남부와 동부의 화합을 상징하는 둘이 시작과 동시에 깨져버리면 모양새가 안 좋다.
>클리앙과 밀로아가 왜 다퉜지?
그러니까 이건 사적인 호기심을 채우려는 게 아닌 공적인 업무의 일환이다.
「삼 일 전, 기상과 동시에 모닝 키스를 하려는 밀로아 백작에게 클리앙 백작이 양치부터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지니의 답변에 밀로아 백작이 화난 게 이해가 갔다. 쯧 하고 혀를 찬 나는 서류 하나를 집어 클리앙에 건넸다.
“이거나 읽어봐.”
“이건······ 왕실사관학교 개편안?”
왕국 내 최고의 교육기관인 왕실사관학교.
신분 상승을 꿈꾸는 평민에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바로 왕실사관학교에 입학 후 준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관료나 군인이 되는 것.
아, 기사학부는 조금 특별하니 논외로.
“여기 왕실사관학교를 졸업하는 귀족 출신들에게 가산점을 준다는 말,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지. 내가 언제 허튼 소리하는 거 봤어?”
“교육을 핑계로 후계를 인질로 잡는다고 여기는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생기겠지. 근데 실제로 그 의도도 있어서 할 말은 없네.”
“으음······.”
“왕실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능력이 출중하면 등용할 거야.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보다 찬성하는 이들도 많을걸?”
“신흥 귀족들 말입니까.”
내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몰락한 귀족 가문이 한가득. 하지만 그와 반대로 기회를 잡은 이들이 있다.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신흥 귀족들.
기존 왕실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료가 된 평민 출신 단승 귀족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 귀족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실 생각이시군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물론, 전처럼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인 상황까지 가선 안 될 일이야. 어차피 파벌은 생기게 되어 있어. 이왕 생길 거 처음부터 나를 전적으로 지원할 이들이 파벌을 형성하는 게 좋겠지.”
“으음······.”
“일단 계속 읽어봐. 사실 앞의 내용들은 이왕 왕실사관학교를 개편하는 김에 곁가지로 끼워 넣은 거니까.”
“알겠습니다.”
클리앙은 다시 서류를 읽어나갔다.
“마공학부의 신설? 거기다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이 혜택들은······ 이게 진짜 목적이셨습니까?”
“클리앙, 앞으로는 마공학에 가장 앞선 국가가 세계를 선도하게 될 거야. 우리 왕국의 비공정 하나가 타국 비공정 서넛은 손쉽게 격파할 수 있는 성능을 가졌다고 생각해봐. 어떨 거 같아?”
“어디 가서 소국 소리는 안 듣겠군요.”
“그걸 실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마법사와 마공학자야.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다 해도 마공학자는 양성할 수 있어.”
나는 확신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력초전도체가 발표된 이후 열강 중 상당수가 마공학에 이미 막대한 투자를 하기 시작했어. 왕국도 결코 뒤처져선 안 돼. 이건 생존의 문제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겠군요.”
“뭐, 그렇지.”
클리앙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류를 끝까지 살폈다.
“그건 어디까지나 계획안일 뿐이야. 세부 상황과 예산은 재정경제부에서 다시 한번 검토해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공학부의 학부장을 맡을만한 사람이 왕국에 있습니까?”
“있잖아. 저기.”
나는 프란의 연구실 쪽을 가리켰다.
“프란 님이 허락하신 겁니까?”
“클리앙도 이제 알잖아? 일단 저지르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어.”
“······ 제가 뭘 저질렀다는 겁니까.”
“에이, 남사스럽게 꼭 말로 해야 해?”
내 의미심장한 미소에 그가 이맛살을 팍 구겼다.
“그건 상호 합의··· 후······ 아닙니다.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르신 분한테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군요. 일이 잔뜩 밀려있느니 돌아가서 업무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