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27)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27화(127/203)
127
<127>
“하핫. 폐하, 알고 보니 확고한 연상 취향이셨군요.”
알폰소의 말에 픽 웃었다.
내 정신연령상 연하는 왕비로 맞아들이는 상상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기분이다.
사실 동갑부터 10살 연상까지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육체의 나이가 있으니까······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던져줬다.
“보자,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폐하와 동갑 이상 10살 연상 이하 중에서 능력이 출중하지만, 집안은 한미한 영애를 찾아보면 되겠군요. ······ 어렵군요. 정말 어려운 조건······ 응?”
“왜? 누구 떠올랐어?”
알폰소가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진 레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 폐하가 여태 말씀하신 조건들에 제가 딱 들어맞아 조금 쑥스럽군요.”
콰앙! 망치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알폰소의 물음에 별생각 없이 내뱉은 조건들이 레이나의 배경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레이나가 왕비?’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4왕자의 목검에 머리통이 깨지며 전생을 자각했던 이후, 그 누구도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바리사다]의 시련을 통해 ‘미래’의 기억을 되찾은 후에는 더더욱.
하물며 ‘미래’에서 내 검술 스승으로서 북부 베링턴 요새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함께 넘긴 그녀를 어찌 이성으로 생각했겠는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하하핫. 폐하, 두루뭉술하게 ‘능력’이라고 표현하셔서 레이나 자작이 당황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왕비가 해야 할 행정 업무 능력을 말씀하셨던 거겠죠?”
알폰소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날 묘수를 떠올렸다.
“어, 어······ 그렇지! 그러면 일도 밀렸는데 슬슬 돌아가 볼까?”
얼떨결에 녀석의 말에 동의하고 황급히 집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행정 능력······.”
뒤에서 레이나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아카샤궁.
3왕녀 아네트 리오넬의 거처.
그곳에서 은밀한 회동이 열렸다. 참석자는 아네트, 아이라, 밀로아, 그리고······ 청일점 알폰소.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그는 오랜만에 휴가를 맞아 에메랄드궁의 정원에서 따사로운 일광욕을 즐기던 중 아이라에게 붙잡혀 끌려온 참이었다.
“후훗, 다 모였군요.”
아네트의 말에 알폰소는 일단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알폰소 시종장은 왜 이 자리에 불려온 건지 전혀 모르는 눈치군요.”
“으음······ 그렇습니다.”
“얼마 전! 폐하가 결혼을 서두르라는 밀로아 백작의 말에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는 답을 한 것. 들으셨겠죠?”
“당일에 바로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넷?”
“우리 에반, 아니, 국왕 폐하의 반려가 될 사람을 저희가 나서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한 열정을 보이는 아네트.
알폰소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모일 사람이 더 있지 않습니까? 왕실의 큰 어른이신 베르트 의원님이라든지, 클리앙 백작이라든지······.”
“여자는 여자의 눈으로 봐야 정확한 법이죠.”
“저도 남자입니다만?”
“알폰소 시종장에게는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확인하고 싶으신 것들이요?”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답해 보세요. 폐하와 알폰소 시종장,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금단의 사랑을 나누는 건 아니겠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질문에 알폰소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만신전에 등록된 모든 신들을 걸고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길길이 날뛰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저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확인 차원에서 물어봤어요. 그만큼 중요한 문제니까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라고 하셨죠? 언제부터 그런 헛소문이 떠돈 겁니까!”
알폰소의 물음에 아이라가 답했다.
“폐하가 청문회에서 알폰소 시종장의 무죄를 증명했을 때부터 여자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은밀히 돌았었어요.”
까마득히 오래전부터였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밀로아가 풋 웃으며 덧붙였다.
“당연한 거죠. 폐하가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여자 보기를 돌 같이하고 두 사람이 딱 붙어 다니는데. 누가 봐도 의심하지 않겠어요?”
“그건······.”
알폰소가 생각해도 조금 이해가 안가긴 했다.
에반이 아무리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해도 이제 17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나이였다.
‘설마 폐하가 진짜로 나를?’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후훗.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가 알폰소 시종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혹시나 제 눈이 잘못되었나 확인 차원에서 물어본 거였어요.”
“왕녀님의 눈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언제부터인가 누가 누구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로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어렴풋이 알겠더라고요.”
아네트의 연결로 결혼한 아돌과 그의 부인이 떠오른 알폰소.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혹시 밀로아 백작과 클리앙 백작의 사이도 알고 계셨습니까?”
“두 사람의 결혼은······.”
“왕녀님!”
밀로아가 다급히 아네트의 입을 막았다.
“후훗, 밀로아 백작, 왜 그러시죠? 저는 절대 몰랐었다고 말하려고 했답니다.”
질문을 던졌던 알폰소와 귀를 쫑긋 세웠던 아이라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무언가 내밀한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나 궁금했지만, 아네트가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저희에게 중요한 건 이미 어여쁜 딸을 낳은 두 사람이 아니라 폐하랍니다. 혹시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 한 명이 없는 걸 눈치챘나요?”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라면······.”
알폰소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인들을 쓱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레이나 자작이 안 보이는군요. 근데 폐하를 호위하고 있을 시간이라 안 부른 거 아닌가요?”
“아뇨. 일부러 지금 시간을 잡았어요. 자, 알폰소. 요즘 폐하와 레이나 자작 사이에 별다른 일 없었나요?”
알폰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답변을 들은 아네트는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는데.’
레이나가 동부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돌아왔을 때, 아네트는 그녀가 에반을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레이나의 감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초월자이기 때문이었다.
아네트가 초월자들의 애정전선을 파악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심적으로 크게 혼란스러울 때뿐이다.
당시 아네트는 모른 척했었다.
레이나는 평민 출신에, 에반과 나이 차도 많이 나고,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하기로 했었다.
무엇보다 에반이 레이나를 전혀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뿐이랴, 에반은 그 어떤 여자도 이성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남자를 좋아한다느니, 알폰소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그런 해괴망측한 소문이 났겠는가.
그런데······.
‘그게 얼마 전에 변했단 말이야.’
이틀 전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쳤던 에반과 레이나.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예전과 지금은 다르지.’
레이나는 왕국의 단 넷뿐인 7성 기사가 되었다. 시기의 문제일 뿐 백작으로 승작도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폐하가 밀로아 백작을 만나고 왔을 때 일이 좀 있긴 했습니다.”
“뭐죠?”
“빨리 말해보세요.”
“저를 만났던 당일 말이죠?”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 여자가 눈에 빛을 내며 알폰소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어, 그게 그러니까······.”
당황한 알폰소는 떠듬떠듬 당시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 그렇게 제가 센스를 발휘해서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하하핫.”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세 여자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알폰소 시종장이.”
“굳이! 그 상황에서.”
“폐하가 말한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은.”
“레이나 자작이 아니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죠?”
세 여자가 돌아가면서 하는 말에 알폰소는 자신이 무엇인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제가 뭘 잘못했나요?”
“후우······.”
그의 물음에 세 여자가 동시에 큰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남자들은······.”
“알폰소 시종장, 잘 들으세요.”
“무슨 실수를 했냐면 말이죠······.”
***
“레이나 자작님, 잠시 이리로 와보시죠.”
“무슨 일이죠, 알폰소?”
“여기 이 서류 좀 잠시 보시겠습니까?”
“으음, 이건 레온궁의 조각상을 담당할 조각가들의 포트폴리오군요.”
“맞습니다. 폐하가 저보고 마음대로 정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죠, 폐하?”
펜을 놀리며 귀를 열어놓고 있던 나는 잠시 눈을 돌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여기 세 명의 조각가를 후보로 뽑았거든요. 레이나 자작님도 포트폴리오를 보시고 이 셋 중에 누가 가장 마음에 드시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네? 제가 의견을 내도 괜찮은 건가요?”
“하핫. 레이나 자작님의 의견도 참고하고 싶어서요.”
“으음······ 전 이 두 번째 조각가의 작품들이 마음에 드네요.”
“좋습니다. 그럼 이 조각가로.”
“넷? 그렇게 바로 정하셔도 되는 건가요?”
“하핫. 폐하가 제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으니 괜찮습니다. 아! 이것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이건······.”
알폰소에게 떠넘겼던 왕비의 직무 중 일부. 녀석이 그것들을 레이나에게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다.
신경 쓰였다.
업무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 쓰였다.
“하핫, 벌써 끝냈군요. 어제 왕궁에 들어온 막내 하녀도 일주일만 해보면 금방 할 정도입니다. 대단한 행정 처리 능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왕비의 업무를 깎아내리는 알폰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폰소, 네가 처리해도 될 정도로 간단한 것들만 넘겨서 그래.”
“하핫,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어이쿠! 생각해보니 엄청나게 급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폐하! 시키신 일을 다 했는데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나가.”
차라리 녀석이 없는 편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핫!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바람처럼 사라지는 알폰소.
머리가 아팠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녀석이 나와 레이나를 단둘이 남기려는 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알폰소뿐만이 아니지.’
엊그제도 누님의 티타임에 갔다가 다들 무슨 사정들이 그리 생겼는지, 레이나와 단둘이 차를 마시고 왔다.
가끔 나와 레이나가 지나가면 뒤에서 소곤거리는 시녀들을 보면 내가 모르는 이상한 소문도 돌고 있는 모양인데······.
왠지 모를 두려움에 [도서관]에서 선뜩 확인을 못 하고 있다.
‘쯧, 일단 이거부터 처리하자.’
나는 보고 있던 ‘문화 예술 후원 명단’을 마저 검토했다.
예술가들과 예술 단체들을 후원하여 왕국의 문화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본래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왕비가 해야 할 업무라는 것. 막대한 예산을 쓰는 일이기에 알폰소에게 맡기지 않은 업무였다.
사락, 사락.
서류를 모두 검토한 나는 결제 사인까지 마무리하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레이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다.
미친 듯이 어색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긴 왜야. 내가 말했던 조건들 때문이지.’
나는 알폰소가 물었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비의 조건을 별다른 고민 없이 툭툭 내뱉었던 걸 잠시 후회했다.
조건의 내용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제는 그 자리에 레이나가 있었다는 거지.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레이나, 잠깐 산책 좀 하러 가지.”
“넷?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조금 심신이 편해졌다.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레이나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완연한 봄 내음을 맡았다.
짹짹, 짹짹.
정원 나뭇가지에서 사이좋은 부부 새가 서로의 부리를 맞대며 지저귀고 있었다. 한번 결혼하면 평생을 함께한다는 새였다.
‘한참 안 보이다 갑자기 나타났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잘 찾아보면 레이나 말고도 얼추 내가 생각했던 조건에 맞는 영애를 몇몇 있다.
그런데······ 앞으로 왕국이 헤쳐 나가야 할 험난한 길을 그녀들이 버텨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미래’에서 기이할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았던, 나와 결혼했던 여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려는 찰나였다.
“폐하.”
레이나가 나를 불렀다.
“응? 뭐지, 레이나?”
“저는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비혼 선언에 스멀스멀 떠오르려던 전처들의 기억이 싹 사라졌다.
“어째서?”
“저는 폐하의 호위기사입니다. 결혼하는 순간,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저의 소임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비혼을 할 것까지는······.”
레이나는 할 말을 모두 마쳤는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서로의 털을 다듬어주고 있는 부부 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아! 이거 설마······ 고백인가?
저벅저벅 레이나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올려봤다. 새빨간 것이 홍당무가 따로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체 누구 머리에서 방금 그런 고백 멘트가 나왔을까.
누님? 밀로아? 아이라?
뭐, 됐다.
어쩐지 레이나라면 나와 함께 걸으며 닥칠 불행들도 모조리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안타깝네. 레이나라면 왕비로서 내 옆을 평생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앗! 앗! 그······.”
당황한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봄바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갑게 얼어있던 내 심장을 녹여놓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