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28)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28화(12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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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국왕의 결혼은 국가의 중대사.
나와 레이나 둘이 간소하게 반지 하나씩 교환한 뒤 평생 부부로 살겠다 맹세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가장 걸리는 건 역시 그분들인가.’
왕실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대쪽 같은 성격의 어르신들이 존재한다.
평민 출신, 그것도 용병단을 따라다니는 창부 집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레이나. 그녀를 왕비로 맞이한다고 하면 입에 거품을 물 게 뻔했다.
귀족파가 득세하던 당시에는 내게 큰 힘을 실어주었던 이들이지만, 이럴 때는 또 골치가 아프다.
‘뭐, 결혼식을 강행하려면 강행할 수도 있지만······.’
내가 반인륜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일방적으로 통보할 힘이 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레이나에게는 생애 한 번뿐일 결혼식인데, 만인의 축복 속에서 치러야 하지 않겠나.
결정을 내렸으면 신속 과감하게.
나는 왕실의 큰 어른인 베르트를 찾아갔다.
“레이나 자작을 왕비로 맞으시겠다고요? 진심이십니까?”
“그녀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내 말을 모두 듣고 침음을 삼키는 베르트. 혹시 그도 레이나를 왕비로 맞이하는 걸 반대하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베르트 의원님도 그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왕국의 미혼 여성 중 레이나 자작만큼 능력 있는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10살 차이라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7성 기사인 그녀라면 신체 노화가 극히 느리게 진행될 테니 크게 문제가 되진 않겠죠. 폐하가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시겠다는 의도도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다만 그녀의 출신성분을 문제 삼을 영감탱이와 노파들을 떠올리니 머리가 아프군요.”
“출신성분······.”
일국의 왕비가 창부 집단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분명 후대에까지 레이나를 괴롭힐 약점이 될 것이다.
그녀가 6성 기사의 경지에 올랐던 순간 퍼진 이야기라 비밀로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에겐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레이나의 진짜 출생의 비밀을 공개할 때가 되었군요.”
“네?”
“사실 레이나 자작은 150년 전 하믈 제국의 침략으로 멸문했던 엘렌베이라 지역의 공작 가문, 로잔가의 살아남은 후예입니다.”
눈이 동그래진 베르트가 이내 너털 웃음지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아, 증거라면 있습니다.”
“네?”
자신 있는 내 말에 베르트의 눈동자가 떨렸다.
“로잔 가문의 가주는 대대로 검공이라고 불리었죠. 지금은 실전된 그들의 검술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 설화검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엘렌베이라 지역. 살을 에는듯한 삭풍 속에서 피어나는 설화란 꽃이 있다.
아주 청명한 향이 나는 꽃이다.
“설화검술을 익혀 경지에 이른 기사의 검에선 설화향이 난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설화가 피어난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조만간, 레이나 자작의 검에서 설화향이 피어날 겁니다.”
“!!”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는 베르트. 이내 봇물 터지듯 그의 입이 열렸다.
“서, 설마! 진짜로 그녀가 로잔가의 살아남은 후예란 말입니까!”
“아무렴, 제가 없는 말을 했겠습니까. 그럼 베르트 의원님만 믿고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베르트의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속으로 빙긋 미소 지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이라는 말이 있다. 7성 기사인 베르트조차 반신반의하는 걸 보면, 대부분 속아 넘어갈 게 뻔했다.
베르트를 찾기 전 레이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레이나, 꼭 익혀야 할 검술이 있어.
-검술이요?
-설화검술, 들어봤지?
-실전된 로잔가의 검술을 말씀하는 건가요? 경지에 이르면 설화향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 설화검술. 최대한 빨리 검에서 설화향을 피워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레이나는 내가 설화검술이 어디서 구했냐, 그걸 왜 익혀야 하나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었다.
-설화검술을 어디서 구했고, 왜 익혀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폐하가 불필요한 일을 시켰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옅은 미소를 띠며 답했었던 레이나.
문득, ‘미래’에서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사지로 가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 부탁을 들어주었었다.
‘그런 부탁, 두 번 다시 하지 않아.’
그리고 보름 뒤 소집된 왕실위원회.
레이나가 시연한 검에서 퍼진 설화향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고, 그녀를 왕국의 국모로 삼겠다는 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
『리오넬 왕국의 국모, 레이나 잔느. 그녀는 누구인가?』
『성대하게 치러진 리오넬 왕국의 결혼식』
『결혼식을 마치고 왕도를 순회하는 리오넬 국왕 부부』
리오넬 왕국민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진 에반과 레이나의 결혼식. 하지만 도저히 둘을 축하해줄 수 없는 이도 있었다.
아르야 왕국의 1왕녀 얀데르시야.
이웃 나라에서 열린 결혼식을 대서특필한 신문들을 읽는 그녀의 손이 부들거렸다.
『리오넬 왕국의 왕비, 레이나 잔느. 그녀의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창부의 딸로 알려지면서, 아무리 천한 출신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산 증인이었던 레이나.
그녀가 사실은 150년 전 하믈 제국의 침공 당시 멸문했던, 엘렌베이라 지역을 호령했던 로잔가의 후예였다는 기사에서 얀데르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이! 이게 사실일 리 없어!”
얀데르시아는 미친 사람처럼 신문을 쫙쫙 갈기갈기 찢었다.
한참이 지나 겨우 진정된 그녀는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책장 뒤, 은밀히 숨겨진 비밀방을 열었다.
에반의 사진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그곳.
“후우, 후우······.”
사진 속 에반들이 환한 미소로 얀데르시아를 반겼다. 악귀와 같던 얀데르시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별안간 에반의 손을 잡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레이나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거긴······ 내 자리야······ 내 자리······.”
얀데르시아는 왜 에반이 자신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었다.
조 베이리 해적단을 침몰시키며 기사에 실린 그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냥 그랬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건 필연.
식물이 햇빛을 갈구하고, 나비가 꽃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당연한 일. 그녀에게는 에반이 햇빛이요, 꽃이었을 뿐이다.
얀데르시아는 비밀방 중앙의 책상에 앉았다.
사각사각.
편지를 써나가는 그녀.
발신인은 에반.
수신은······ 얀데르시아 아르야, 그녀 자신이었다.
한참 동안 혼이 나간 텅 빈 눈으로 편지를 작성한 그녀. 펜을 놓고 편지 봉투에 편지를 넣음과 동시에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아아! 에반 님의 답장이 왔어.”
얀데르시아는 정성스럽게 편지를 꺼내 읽었다.
레이나의 더러운 계략에 빠져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왕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는 에반의 구구절절한 변명이 적혀 있었다.
끝은 언제나처럼 얀데르시아만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끝이 났다.
“아아······ 그러셨군요. 역시 그 천한 것이 그랬을 거라 짐작했었습니다.”
얀데르시아는 편지를 읽고 또 읽다 정성스럽게 편지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고 편지함을 열었다.
에반의 왕세자 즉위식 이후, 그녀가 보냈던 편지에 대한 그의 ‘답장’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얀데르시아는 방금 온 답장 또한 가지런히 편지함에 정성스레 꽂고 서랍을 닫았다.
“어찌해야 저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비밀방을 나오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녀.
마음 같아서는 에반을 몰래 데려와 비밀방에 가둬두고 싶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마력을 폐하고, 발뒤꿈치의 힘줄을 모두 끊어······.
“핫,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얀데르시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천한 것의 계략에 빠져 결혼식을 올린 에반의 소식에 정신이 이상해진 탓이리라.
결코 하믈 제국의 19황자 샤를의 심상영역을 무너트리던 에반의 참격이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이대로는 안 돼.”
얀데르시아는 최근 아르야 왕실의 늙은이들이 자신의 혼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해물이다.
배제해야 한다.
일단, 그들을 처리하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
새벽 4시.
아직 동이 트기는 한참 이른 시각.
알폰소의 일과가 그때부터 시작된다.
똑똑, 똑똑.
“시종장님,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막내 시종의 목소리에 알폰소는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싸늘한 가을바람에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의관을 정제하고 거울 앞에선 알폰소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방을 나섰다.
“기상하셨습니까, 알폰소 시종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시종장님.”
새벽부터 일어나 왕의 거처인 레온궁을 먼지 하나 없이 쓸고 닦는 왕궁의 사용인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알폰소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 그들에게 화답해주며 국왕 부부의 침실로 이동했다.
침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시종, 시녀, 그리고 국왕 부부의 호위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뜸하시더니 다시 후사를 보기 위해 힘쓰셨나 보군.’
에반은 은근히 그런 부분에서 쑥스러워하는 데가 있어서 거사를 치를 때마다 침실 주변에 그 누구도 얼씬도 못하게 했다.
둘의 결혼식이 벌써 석 달 전.
처음 한 달간은 하루도 쉬지 않고 레온궁에 사자의 포효가 울려 퍼졌었다.
‘침실 주변에 없다고 안 들릴 소리가 아니지 그게. 폐하가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있었나 몰라.’
알폰소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덕분에 에반이 남자를 좋아한다느니, 기능에 문제가 있다느니 하는 해괴한 소문들은 쏙 들어갔다.
‘······ 그래, 폐하의 소문은 쏙 들어갔지.’
자신에 대한 망측한 소문은 전혀 사라지지 않은 걸 알고 있는 알폰소는 인상을 구겼다. 그의 표정을 본 막내 시종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종장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세간에 나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게 떠올라서 말이지.”
“아······.”
“아······? 뭔가 들은 게 있나?”
“전혀!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알폰소의 실눈이 살짝 뜨고 막내 시종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막내 시종이 얼어붙었다.
얼마 전, 원혈목의 독기를 갈무리하며 여섯 번째 별 품은 독인(毒人)된 알폰소였다. 시종이 된 지 얼마 안 된 막내가 견딜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사, 사실은 얼마 전 빨래터를 지나다 시종장님과 베록 경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 저는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빨래터에서 그 말을 한 게 누구지?”
“그, 그게······ 하녀들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일하는 금남의 구역인지라······ 아! 절대 엿보려던 게 아닙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지나가다 들은 겁니다.”
알폰소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또다시 범인색출에 실패했다.
“어디 가서 이야기를 퍼트리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입은 자물쇠처럼 하라는, 시종장님을 처음 뵈었을 때 하셨던 말씀 꼭꼭 새기고 있었습니다.”
“좋아, 다음부터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면 재깍재깍 내게 보고하도록. 그때만은 입에 자물쇠를 풀어도 좋아.”
“알겠습니다.”
막내 시종에게 단단히 엄포한 알폰소는 품에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검술 수련은 건너뛰고 바로 집무실로 오시겠군.’
그는 다시 회중시계를 품에 넣고 막내 시종을 바라봤다.
“나는 오늘 번역된 외신을 살펴보러 갈 테니, 너는 폐하가 물린 이들에게 다시 업무를 시작하라고 해.”
“넵.”
알폰소는 곧장 시종장실을 향했다.
외교부의 서기들이 번개 같은 속도로 번역해 놓은 외신이 이미 도착해있었다.
책상 의자에 앉은 알폰소 기사들의 제목을 쓱 훑어보기 위해 신문을 펼쳤다. 전부 읽지 않아도 제목만으로 세계가 어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한 기사의 헤드라인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하믈 제국의 황제, 쓰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