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52)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52화(152/203)
152
<152>
북부의 전선이 안정된 후, 라누아와 그녀의 동생 자르얀을 데리고 왕국으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전쟁을 벌이는 것도 일이었지만, 상황을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서북부를 탈환하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덮어뒀던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미래의 나에게 모든 걸 떠넘겼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운 순간들이었다.
하여튼.
밤낮없이 식사도 걸러 가며 업무를 처리한 끝에 이제야 겨우 급한 불을 껐다.
덕분에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겨 레이나와 함께 라누아가 임시로 생활하고 있는 에메랄드궁을 찾았다.
본래는 라누아가 움직이는 게 맞지만, 왕궁에 온 지 겨우 일주일 된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따스한 날씨였기에 야외에서 차를 마셨다.
“해리, 해리는 여기 우유 먹고 있으렴.”
작고 연약한 존재인 신수 해리온.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해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시도 나나 레이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냐앙~!”
녀석이 테이블 밑에 놓은 접시에 코를 박고 우유를 찹찹 먹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라누아, 생활하는 데 불편한 건 없나요?”
내가 서북부 탈환 후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던 사이, 레이나가 라누아와 자르얀의 적응을 도왔다.
“없어요. 아니, 없습니다?”
대답한 라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넉 달 남짓 리오넬어를 배운 그녀는 존댓말이 상당히 헷갈린 것 같았다.
뭐, 당연한 일이다.
리오넬인들 조차도 헷갈린다.
레이나와 라누아, 두 사람의 첫 대면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서로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다 라누아가 먼저 고개를 숙였었다. 그에 화답하듯 레이나도 작게 고개를 꾸벅이며 끝.
자연스레 서열정리가 완료된 듯한 분위기였었다.
“라누아를 위한 교사진을 거의 다 구했어요. 다음 주부터는 수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만, 아직 우리 왕국어를 가르칠 사람을 구하지 못했어요. 조금만 더 자르얀에게 고생해달라고 전해주세요.”
아직 리오넬어가 초급자 수준인 라누아.
선생 겸 통역을 아직 못 구한 모양이었다.
그럴만했다.
칸족의 언어에 능통하면서 왕비가 될 이를 가르칠 정도의 학식과 자격을 갖춘 이가 그리 흔할 리 없다.
“괜찮습니다. 동생이, 자르얀이 왕국의 언어, 잘 가르쳐 줍니다.”
“자르얀도 누르갈 족장님이 명하신 것이 있다 들었어요. 언제까지 라누아를 가르치며 궁에서 지내게 할 순 없죠.”
“아, 네. 옳은, 말입니다.”
나는 병풍이 된 기분으로 두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차만 홀짝였다. 가끔 발치에서 재롱떠는 해리를 상대해주면서 말이다.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해도, 최소한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 지경까지는 안 갈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한 발자국 뒤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말하는 중간중간 아이를 품은 배를 쓰다듬는 레이나와 그걸 힐끔힐끔 쳐다보는 라누아가 눈에 들어왔다.
‘······ 라누아도 아이를 가지면 달라지려나.’
단짝처럼 지내던 두 처가 동시에 아이를 가진 후, 세상에서 다시 찾아보기 힘든 악녀가 된 이야기는 매우 흔했다.
‘서로를 죽여야 사는 여자’라는 제목의 유명한 연극도 있다.
만약 레이나와 라누아도 그럴 징조가 보일 때는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자르얀이 안 보이네요?”
레이나의 물음에 나도 의문이 들었다.
리오넬어가 서툰 라누아를 위해 자르얀이 항상 함께 움직인다 들었었다.
“아침 일찍, 별관을, 갔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라누아가 눈을 굴리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다음 할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어긋난 모양이군요?”
“아! 네. 자르얀, 책 많이 좋아합니다. 책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자르얀이 별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거기 읽을만한 책이 남아 있었나?’
별관이라면 프란과 이자벨, 그리고 내가 사용하던 연구실이 있는 건물이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자벨이 남부에 자리한 마력초전도체 연구단지로 간 이후 내가 개조해 사용하던 곳은 분명 작은 서류하나 남김없이 싹 비웠다.
타이탄의 ‘ㅌ’자도 안 남게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프란이 사용하던 곳인데······. 그곳 역시 스텔라라는 중대한 연구를 하던 곳이라 싹 비운 것은 마찬가지.
신경 쓰였다.
티타임 자리가 파한 후 별관에 들러 확인할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요?”
레이나의 물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별것 아니야. 요즘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있었더니, 오랜만에 에메랄드궁의 정원을 산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차도 식었는데 다 같이 산책할까요, 그럼? 어때요, 라누아.”
“좋아요? 좋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산책이 시작되었다.
두 여자와 편하게 산책하고 싶었기에 시종과 호위기사들은 무르고 정원을 걸었다.
“라누아, 여기가 폐하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란 건 들었죠?”
“네. 서재에 폐하의 책, 엄청 많았습니다. 칸족의 책도 있었습니다. 자르얀, 원래 항상 거기 있습니다. 오늘은 없었습니다.”
“그럼 자르얀이 별관에서 뭐 하고 있나 확인하러 가볼까요?”
레이나는 내가 별관에 가보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발걸음이 별관으로 향했다.
자르얀은 프란의 연구실 바로 옆방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제자인 앨리스가 사용하던 방.
“앗! 국왕 폐하, 그리고 왕비님까지! 앗! 벌써 시간이!”
우리를 발견한 그가 시간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라누아가 그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왕비님.”
뭐, 솔직히 자르얀이 그녀의 통역으로 온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잘못한 건 없다.
“라누아가 자르얀이 없어서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야. 조만간 왕비가 자르얀을 대신해 그녀를 도와줄 사람을 데려올 테니 조금만 더 고생해줘.”
좋게 좋게 넘겨주고 그가 읽고 있던 책에 시선을 주었다.
『불의 근원』
추억이 소록소록 떠오르는 마법서였다.
알폰소가 앨리스한테서 훔쳐 왔던 적탑의 기본서. 내가 저기서 프란이 숨겨놓은 메시지를 찾아냈었다.
왕도 바로나 여왕삼거리 34-231번지, 문 앞에서 ‘미녀 마법사님. 제발 제자로 받아주세요.’라고 크게 외치며 9번 절하기였지 분명?
근데 저게 왜 남아 있는 거지?
“자르얀, 그 마법서, 어디서 찾았지?”
“아, 이거 말씀이신가요? 책장 밑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걸 읽고 있었나?”
어렸을 때부터 약골이었다던 자르얀. 그는 마나 감응도가 미약했기에 주술사의 제자가 되지도 못했다고 들었다.
“아, 네. 너무 흥미로워서 그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었습니다.”
마법서의 내용이 이해가 갔다는 말.
『불의 근원』이 아무리 기초 마법서라지만 어지간한 범인은 읽자마자 학을 뗀다.
아, 잠깐만.
애초에 저걸 잃었다는 건 룬어를 알고 있다는 말인데.
“룬어는 언제 배웠지?”
“아, 부족 주술사의 허드렛일을 도우다보니 어떻게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더 많은 마법서를 읽고 싶으면 언제든지 요청하도록.”
“감사합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제가 이 마법사를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는데······ 뭔가 비밀이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
“설마 여왕삼거리 34-231번지의 미녀 마법사에게 제자로 받아달라며 9번 절하라는 이상한 문장 말인가?”
“아! 아시는 걸 보니 그냥 장난 같은 거였나 보군요.”
나는 [인명록]을 열어 자르얀의 정보를 다시 살폈다.
15살, 관계는 [우호].
[신뢰]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왕궁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는지 녹색 글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그 영향인지, 내가 그동안 그에 대해 파악한 덕분인지, 그의 [스킬창]에는 잠겨져 있던 [?] 하나가 해금되었다.
[천재]아무래도 장차 왕실사관학교의 마공학부의 노예, 아니 조교가 될 인재를 찾은 것 같다.
가만, 나중에 분명 칸족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건 어쩌지?
모르겠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
***
에메랄드궁의 지하에는 세상에 밝혀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있다.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최상급 마수 얼굴 없는 용. 그 최후의 개체가 깊게 잠들어 있는 것.
녀석의 이름은 지드래곤.
지드래곤은 요즘 꿈자리가 아주 사나웠다.
그 탓인지 단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몽롱한 잠기운을 쫓으며 지드래곤은 조심스럽게 지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흠칫했다.
모르는 인간들이 에메랄드궁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지드래곤은 정말 깜짝 놀랐다.
‘그, 그오!’
너무 오랜 시간을 자버린 것 같았다.
똑똑한 지드래곤은 인간이란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지드래곤 몇몇 인간의 기운이 익숙하다는 걸 알아냈다. 자신의 부하인 알폰소에게 굽신굽신하는 인간들이었다.
‘그··· 그오······.’
안심한 지드래곤은 일단 상황을 살피기로 결심했다.
에메랄드궁의 새 주인은 모르는 여자였다.
‘그오?’
에반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지드래곤은 에반을 찾아 에메랄드궁을 벗어날까 잠깐 고민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에반이 나가고 싶으면 꼭 미리 말하고 나가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결국 지드래곤은 조용히 에반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금방 자신을 찾아오리라 믿었다.
지드래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대로 며칠 안 가 에반이 나타났다.
‘그오!’
지드래곤은 반가운 마음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드래곤이 모습을 보여도 되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오······.’
자기 모습 때문이리라.
눈이 없어도 그를 대신하는 마력 기관이 존재하는 얼굴 없는 용. 지드래곤은 자신의 외형이 인간들의 기준으로 ‘징그럽다’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에반은 언제나 자신을 귀염둥이라고 불렀다.
얌전히 에반이 자신을 찾기를 기다리기로 한 지드래곤. 레이나에게 관심을 돌렸다. 에반이 자주 데리고 다니던 여자였다.
그녀의 배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새끼다!
자신이 잠깐 잠든 사이 에반이 짝을 만들고 새끼를 가진 거였다.
지드래곤은 당장이라도 몸을 동글동글 말아 춤을 추며 그를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 런. 데!
“냐앙~!”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조그마한 놈이 에반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귀여운 척을 했다.
‘그, 그, 그······ 그오!’
지드래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은 저 작은 생명체처럼 작지도, 귀엽지도 않았다.
차를 마실 때도.
여자들과 정원을 산책할 때도.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마법사의 집에서 조그만 남자랑 대화할 때도.
놈은 에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에반은 에메랄드궁을 나설 때까지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 그오······.’
지드래곤은 슬퍼졌다.
자신은 더 이상 에반의 귀염둥이가 아니었다.
늦은 밤.
자주 간식을 먹던 자리에 빼꼼 고개를 내민 지드래곤은 에반이 있는 레온궁 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오······.”
안녕.
지드래곤은 다시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