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6)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16화(16/203)
016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는데도 뜬금없이 레이나와의 관계가 개선된 후,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마음먹긴 했었다.
[인명록]의 기능 파악, 그리고 이어진 4왕자 놈의 수작질 때문에 잠시 우선순위가 밀려있었을 뿐이다.“알폰소, 레이나 경이 어떻게 2기사단에 입단하게 된 건지 알아?”
[도서관]을 이용해 순식간에 알 수 있는 정보지만, 공짜로 들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나는 기대감을 품고 알폰소를 바라봤다.
“어······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요.”
“아는 것만 말해봐.”
“레이나 경이 사관학교 재학 당시 2왕자님과 호위기사들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상위권 생도 몇과 호위기사들 사이에 지도 대련이 있었다는 소문이 입니다.”
있었다가 아니라 있었다는 소문?
아, 혹시.
“생도가 근위기사를 이기는 일이 일어난 건가? 그 주인공이 레이나 경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그 외에도 2왕자님이 레이나 경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는······.”
뒷이야기들은 자세히 들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나는 알폰소가 혼자 떠들게 내버려 두고 상념에 잠겼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간단하겠지만, 굳이 RP를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중요한 사실은 2왕자가 그녀를 본인 세력인 2기사단으로 끌어왔다는 것. 그 이유가 레이나 경의 재능인지 미모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재능 때문일 거로 추측되지만.
2왕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본인이 선별한 기사가 망나니 동생 놈 때문에 작위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기분이 좋을까?
‘그럴 리가 없지.’
레이나 경을 발탁한 본인의 자질이 의심받을 일이다.
정말 그녀의 작위가 박탈되는 상황까지 간다면 그걸 지켜보는 기사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하지 않을까?
자신의 그늘 안에 억울한 누명을 쓴 기사가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주군이라······.
1왕자라는 좋은 대안도 있고, 탈주는 지능 순이다.
어쩌면 2왕자는 아카드를 동생이 아니라 1왕자가 보낸 첩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역시 레이나 경이 서큐버스의 피를 이은 반마족이라는 건 너무 갔죠? 그렇다고 그렇게 비웃으실 것까지야. 저는 왕실 사용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혼자 떠들고 있던 알폰소가 내 웃음을 제멋대로 이해하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이제 구별이 잘 안 된다.
“됐어. 알고 싶은 건 충분히 알았어. 시간이 늦었는데 너도 어서 가서 쉬어. 아, 내일은 외출할 생각이니 미리 준비 좀 해두고.”
“네? 외출요? 설마 왕궁 밖으로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팔궁으로.”
“오팔궁이요? 오팔궁이면······ 2왕자님의 거처!”
“아, 먼저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려나.”
“진짜 2왕자님을 뵈러 가시려고요?”
나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알폰소의 질문을 귓등으로 넘기며 힐끗 시계를 바라봤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2왕자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선 잠을 잘 여유가 없었다. 나는 피로한 눈을 지압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2왕자님이 안 만나주면 어쩌시려고요?”
“······.”
에이, 설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
리오넬 왕국의 왕성, 엘라흐 궁전에는 수많은 별궁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사시사철 연분홍 꽃이 만개한 나무들이 있는 곳이 있다.
2왕비의 거처인 세라스궁.
수행원들을 대동한 한 남자가 그곳을 방문했다. 흑발에 적안,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을 지극히 차갑게 보이게 했다. 리오넬 왕국 사람치고는 다소 하얀 피부 탓에 더욱 그랬다.
다미안 리오넬.
왕위 자리를 놓고 1왕자와 암중 투쟁을 벌이고 있는 리오넬 왕국의 2왕자였다.
세라스 궁의 사용인들을 이끌고 그를 마중 나온 수석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자님.”
“어머님은?”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휘이잉-
별안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연분홍 꽃잎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
하지만 다미안은 시야를 가리는 꽃잎들에 인상 찡그릴 뿐이었다.
‘다 베어버리고 싶군.’
2왕비가 고향인 아르야 왕국에서 들여와 애지중지하는 나무들이었다. 한 그루라도 상처입히면 퍽 고달파질 게 뻔했다.
“모시겠습니다.”
바람이 잠잠해진 후, 다미안은 수석 시종의 안내를 받아 접객실로 향했다.
그의 모친, 2왕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에 타오르는 듯한 적발을 틀어 올린 그녀. 40을 갓 넘긴 나이임에도 누가 봐도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왔구나.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본디 시녀들이 준비해야 할 다과상. 2왕비는 손수 차를 우려내 다미안에게 전달했다. 주인이 직접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아르야 왕국의 풍습이었다.
“부를 땐 바빠서 못 온다더니, 오늘은 먼저 기별을 넣었더구나.”
“그 자식, 어디다 숨기셨습니까.”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2왕비는 빙긋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참고 있던 다미안의 짜증이 치솟았다.
“아카드 리오넬. 4왕자 말입니다.”
“네 동생을 남 부르듯 부르니 마음이 안 좋구나. 그런데, 아카드의 행방을 왜 내게 묻는지 모르겠구나.”
“그놈이 숨을 곳이 여기뿐이지 않습니까!”
평정심을 잃은 그의 모습에 2왕비는 혀를 찼다. 그녀가 주변인들 한차례 둘러보자 눈치가 생명인 그네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은 접객실.
“네 동생은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잠시 왕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나저나 아직도 욱하는 버릇이 남아있구나.”
“······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놈 때문에 제가 2기사단에 추천한 기사가 군사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네 동생이 일방적으로 맞는 동안 구경만 했다는 아이 말이구나.”
“덕분에 제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기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요. 기사 작위 박탈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것 같던데, 혹시 어머님 지시입니까?”
2왕비는 대답 없이 들고 있던 차를 음미했다.
“맛보려무나. 주인이 준비한 찻잔에 손도 대지 않는 건 굉장한 모욕이란다.”
“그건 아르야 왕국의 풍습입니다. 저는 리오넬 왕국의 왕자입니다.”
“그리고 네 어미는 아르야 왕국 출신이란다.”
다미안은 결국 마땅찮은 표정으로 찻잔에 손을 가져가 한 모금 입에 적셨다.
“······ 이제 제 물음에 답해주시죠.”
“그 아이가 꽤 훌륭한 검이 될 것 같아 2기사단에 입단시킨다고 했었나.”
“충분히 제련할 시간만 주어진다면 1왕자 를 찌를 날카로운 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2기사단에서 겉돌고 있다고?”
“그녀가 입단하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제가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손잡이가 없는 검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단다.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지?”
“······.”
2왕비의 마지막 말에 다미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의 머릿속에서도 레이나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광경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를 2기사단에서 퇴출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손잡이가 없는 검일지라도 날카로운 건 사실. 1왕자 쪽에서 냉큼 데려가 후에 저를 찌를지도 모르니까요.”
“어렸을 때 기르고 싶어 하던 도둑고양이를 바라보던 눈빛을 하고 있구나. 잔뜩 할퀴고 돌아와 울던 모습이 기억나는구나, 후후.”
“어머니!”
“걱정하지 말거라. 왕실 재판이 무사히 끝나면 그 아이는 가벼운 징계 수준으로 마무리될 테니. 아카드에게도 잘 말해두마. 어떤 멋진 손잡이를 만들게 될지 기대되는구나. 만약, 실패하면 미련 가지지 말고 처분하거라. 1왕자 측도 가질 수 없도록 말이다.”
다미안은 다 식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성인식을 치른 지 한참이 지났건만, 아직도 2왕비의 치마폭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그리고 그래서도 안되는 현실이 갑갑했다.
2왕비의 모국인 아르야 왕국에서 보내오는 자금이 없다면 왕위 계승은 물 건너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미안은 목을 넘어간 차의 끝맛이 그렇게 씁쓸할 수가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망나니 동생 놈 때문에 저를 지지하던 귀족과 기사들이 동요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단언에 2왕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
자신의 거처인 오팔궁으로 돌아온 다미안. 그는 외투를 벗어 시종에게 던지듯 건네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접객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오늘 아침 식사 중 들었던 전언을 떠올렸다.
– 왕자님, 에메랄드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5왕자가 찾아뵙고 싶다고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 선까지 올라오지도 않았을 보고. 다미안에게 있어 에메랄드궁의 유령왕자는 오팔궁의 마구간지기보다도 중요도가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 비는 시간은?
– 2왕비님을 뵙고 돌아오신 후 3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이 있으십니다.
– 그때 보자고 해.
그랬기에 다미안은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었다.
최근 그의 귀에 에반의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더군다나 바로 며칠 전엔 망나니 동생을 두들겨 패기까지.
대체 그 유령왕자가 어떻게 변해버린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30분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수 있었다.
다미안이 2왕비의 거처에 방문했을 때, 접객실은 활짝 열려있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기다릴 때의 관례였다.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던 에반이 다미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미안 형님.”
“네가, 에반?”
에반의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다미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유령왕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흑발, 흑안의 소년이 올곧은 눈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눈만 마주쳐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던 유약한 아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안 본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군. 몰라봤어.”
“감사합니다.”
에반은 구태여 긴 말을 붙이지 않았다. 픽 웃은 다미안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앉아.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빨리 용건을 말해 봐.”
자리에 앉은 에반은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사람들을 물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호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어차피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너와 망나니 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물론, 왕실 재판의 결과는 그렇게 그 사실대로 안 나오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이죽거림에도 별 반응이 없는 에반의 표정에 다미안은 흥이 식었다.
“재미없군. 다들 물러나 있어. 길버트 경도.”
“안 됩니다, 왕자님!”
“길버트 경은 저 녀석이 내게 해코지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잔소리 말고 나가 있어.”
“······ 알겠습니다.”
호위기사를 비롯해 다미안의 수행인들이 빠르게 접객실을 나갔다. 에반의 뒤에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알폰소도 조용히 그들을 따라갔다.
“자, 이제 말해 봐. 내 휴식 시간을 방해한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어.”
다시 말해 그만한 가치가 없으면 각오하라는 의미.
“이번에 열릴 왕실 재판,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벌써 재미없어지려고 하는군. 내가 왜 네게 힘을 보태주어야 하지?”
“잊을 만하면 다미안 형님의 평판을 갉아먹는 4왕자, 계속 안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머리를 크게 다쳐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나보고 어머니와 같은 배에서 나온 동생을 내쳐라?”
에반은 굳게 닫힌 접객실의 문을 한 번 힐끔 바라본 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미가 다른 저를 외면하는 것과 아비가 다른 4왕자를 내치는 것.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다미안은 순간 에반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이해를 못 했다. 곧 행간을 파악한 그의 눈가가 스산해졌다.
“지금 그 망나니 놈이 왕실에서 자란 뻐꾸기 새끼라는 이야기를 한 건가?”
“모르셨습니까? 저는 다들 알고 쉬쉬하는 줄 알았는데.”
천연덕스러운 에반의 대꾸에 다미안은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