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00)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200화 (완결)(200/203)
200<完>
<200>
아돌, 버논, 베록. 세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들도 알았다.
자신들은 기괴하게 변한 샤를의 일격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에반이 싸우는 데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
“쥐새끼 한 마리 벗어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아돌을 시작으로 버논과 베록도 한 마디씩 남기고 자리를 이탈했다.
에반은 그들의 말에 대꾸해주지 못했다. 그의 온 신경은 샤를에게 집중된 상태. 아우렐리스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힘의 정수를 샤를에게 넘긴 것으로 보였다.
천운이 닿았다면 그 힘을 잘 갈무리해 온전한 정신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에반이 보기에 샤를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에반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자멸할 거야.’
문제는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
에반은 일단 전략적 후퇴 후 상황을 살피는 것도 고려해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샤를이 그리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그의 표정에서 자신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광기가 느껴졌다.
“에반 리오넬······ 너만 없었어도!!”
별안간 샤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 추적 끝에 불구대천의 원수를 찾아낸 것 같은 표정. 에반은 미카엘의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콰앙!
땅을 박찬 샤를.
산산이 조각 나 사방으로 비산한 돌덩이와 흙먼지가 에반의 시야를 가렸다.
쇄애애액─
샤를의 창이 조종석을 노렸다.
까앙!
번개 같은 동작으로 창을 쳐내는 미카엘의 검.
쇄액- 깡!
쇄액─ 까앙!
쇄애애액─ 까가강!!
연이은 샤를의 공격이 쏟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창과 검이 수십 차례 교차했다.
일견 막상막하로 보이는 공방.
‘젠장.’
에반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미카엘이 현시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타이탄은 맞다. 하지만 아우렐리스의 정수를 삼키고 드라고니아처럼 변해버린 샤를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끼긱- 까앙!
끼기긱- 까앙!
성능 이상의 움직임 탓에 미카엘의 여기저기서 데미지가 빠르게 누적되고 있었다.
‘오래 버티지 못해.’
뚜득, 뚜드득.
관절 부위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특히 검을 휘두르는 미카엘의 오른팔에 가해지는 부담이 상당했다.
시간을 끌면 답이 없는 상황.
‘큰 거 한 방으로 끝낸다.’
필요한 건 그 일격을 날릴 한순간의 틈.
결단을 내린 에반의 눈이 조종석을 향해 찔러오는 샤를의 창을 쫓았다.
쇄애애액─
미카엘이 몸체를 살짝 틀며 창에 어깨를 밀어 넣었다.
콰지직!!
미카엘의 어깨에 창이 박혔다.
“놈!!”
샤를의 눈이 커졌다.
광기가 골수에 치밀어오르며 이성이 흐릿해진 그였지만, 에반이 일부러 맞아줬다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끼긱- 끼기긱-
거친 쇳소리를 내며 움직인 미카엘의 왼팔이 어깨에 틀어박힌 창을 꽉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에반이 다루는 아홉 개의 별이 일시에 빛을 폭발했다.
고오오오오오.
미카엘을 중심으로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검술의 극의.
에반의 검술 중 가장 강력한 기술.
에반식 리오넬 제왕검술, 오의 개천.
미카엘의 검이 서둘러 창에서 손을 떼는 샤를을 향해 휘둘러졌다.
콰과과과과과과──
공간을 찢어발기는 참격.
샤를의 귓가에서 위험을 알리는 경종을 맹렬히 울려댔다.
경험해봐서 안다. 저건 규격 외의 비기였다. 용의 비늘로 뒤덮인 지금의 육체도 공간과 함께 갈가리 찢겨질 터.
“노오오오오옴!!!”
샤를이 삼킨 아우렐리스의 정수, 여의주가 빛을 뿜고, 샤를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흑염창마옥(黑炎槍魔獄).
하믈 제국의 내전 기간, 상대 군에겐 곧 죽음을 의미했던 샤를의 심상영역.
상대의 심상영역을 상쇄시킬 수 있는 에반 앞에선 무의미한 행위였다.
그래야 하는데.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의 흑염창마옥은 뭔가 달랐다. 상쇄가 되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가가가······.
공간을 찢어발기던 참격이 흑염창마옥에 잠식되어 사그라들었다.
-카아아아아!!
-키이이이!!
창을 든 거대한 지옥의 간수, 창귀가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세계의 눈을 피해 구축되는 것이 초고위 마력 각성자의 심상영역. 현실에 투영되는, 물리력을 갖춘 환상과도 일맥상통한다.
한데 지금, 이 순간 흑염창마옥이 잠식한 공간은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현실과는 완전히 유리된 이면 세계에 가까웠다.
아홉 개의 별을 다루며 지상의 존재에서 벗어나기 시작된 이들에게 허용된 또 하나의 세계.
고유권역.
샤를은 광기가 골수까지 치민 상태에서 아홉 개의 별을 다루기 시작한 존재가 수십, 수백 년을 매진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온전한 샤를의 힘이 아니었다.
아우렐리스가 남긴 여의주에 각인된, 하믈 제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저주의 잔재가 일으킨 이적이었다.
“에반 리오넬────!!!”
샤를이 만든 창귀의 지옥.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가 창조신과 다를 바 없었다.
샤를의 손에는 어느새 미카엘을 관통한 것이 아닌 새로운 창이 쥐어져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고유권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죽어어엇!!!”
샤를이 창을 내지름과 동시에 창귀들이 창을 들어 올렸다.
-카가가가가가!!!
-키이이이─!!
놈들이 일시에 미카엘을 향해 창을 투척했다.
쇄액- 쇄액- 쇄애애액─
수천 발의 창이 미카엘을 향해 날아들었다.
에반이 피할 곳은 없었다.
‘샤를 한 하믈······.’
9성의 경지에 오른 후, 아직 고유권역을 얻지 못한 에반이었다. 그걸 이런 식으로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고유권역이구나.
에반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갔다.
바리사다로부터 심상영역의 연장선이란 설명은 들었지만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직접 겪은 이제는 이해한다.
심상영역은 세계의 눈을 효과적으로 가릴수록 강력해진다. 고유권역은 그래선 안 되었다.
대등해야 한다.
여기 나의 세계가 있다고, 당당하게 어깨를 나란히 해야 했던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조종석을 꿰뚫고 머리를 관통할 것 같은 샤를의 창과 창귀들이 투척한 창은 에반의 안중에서 사라졌다.
에반의 의식은 어느새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있었다.
수많은 시선이 느꼈다.
호의적인, 적대적인, 심드렁한 가지각색의 시선들.
세계? 신들?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반은 그의 심상을 당당히 내비쳤다.
승리의 전장.
여기, 몰락한 왕국의 마지막 왕이 염원을 담아 만든 세계가 있다.
에반은 그를 바라보던 눈이 하나둘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심상이 인정받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에반의 코어 속 아홉 개의 별이 일시에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파앗─!
-우와아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에 에반은 현실로 돌아왔다.
-국왕 폐하를 지켜라!!
어디선가 나타난 거구의 기사들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미카엘의 주위를 감쌌다. 승리의 전장, 에반의 고유권역의 속한 그의 권속들이었다.
파박, 파바바박!
창귀들의 창이 기사들의 방패에 꽂히고.
쇄애애액─ 푸욱!!
샤를이 내지른 창 역시 큰 방패를 든 기사에게 막혔다.
-폐하를 위하여!!
다만 기사는 성치 못했다. 샤를의 창에 가슴이 꿰뚫린 그는 빛의 먼지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에반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곳은 승리의 전장.
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죽어선 안 된다. 빛으로 화하던 기사가 다시 본래의 형상을 되찾았다.
“이, 이럴 순 없어!! 어떻게 네 녀석이!!”
광분한 샤를은 에반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왕국의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쇄액- 푸욱!
쇄애액- 푸욱!
강맹한 그의 창도 불사의 기사단 앞에서는 공허한 몸짓일 뿐이었다.
에반은 기사들에 둘러싸여 헛된 창질을 계속하는 샤를을 바라보며 미카엘의 검을 움켜쥐었다.
이곳에서라면 어렴풋이 구상만 했던, 현실에서 사용할 순 없는 그걸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를 산 그의 심득이 담긴 검술.
검에 휩싸인 오러가 잘게 진동했다.
현재의 기술력으론 관찰할 수 없는 미시 세계에서 오러를 이루는 마나의 입자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마나핵 분열.
이 세계의 상식으론 아직 도달해선 안 될 물리 법칙이 에반에 의해 실현되었다.
“노오오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샤를은 에반이 준비한 공격이 행성을 파괴할 정도라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 하나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거란 걸 직감했다.
에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을 뿐.
‘창천검(刱天劍).’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폭발. 뭉게뭉게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며 잿빛 가루가 하늘을 뒤덮었다.
고유권역 전체가 그 여파에 휩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오직 에반과 그의 권속들만이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
『에반 리오넬, 황제를 제압하다』
『샤를 한 하믈, 즉위한 지 채 일주일도 안되 전사하다!』
샤를이 죽었지만, 전쟁이 곧바로 끝났던 건 아니었다.
『차기 황제는 자신이라 주장한 23황자!』
『15황녀, 야욕을 드러내다』
『목소리를 높이는 전전대 황제의 후손들』
하믈 제국은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종족 연합 아덴, 하믈 제국으로 진격하다!』
『칸트라, 아덴에 이어 군을 움직이다』
아덴, 칸트라를 시작으로 그동안 하믈 제국과 앙숙 관계였던 국가들이 일시에 침공을 감행했다.
악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리홀로호의 시민들. 브리센 연합과 접촉』
『하믈 제국의 우르드 자치구역, 봉기하다!』
하믈 제국의 강력한 폭압에 시름 하던 소수 민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고 일어났다.
『신공민회의 발족! 하믈 제국 북부에 급속도로 퍼지는 공화주의』
거기에 완전한 실패로 끝난 줄 알았던 공민회의 후예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우외환으로 인해 하믈 제국이 조각조각 나게 되리란 건 이제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 하믈 제국과 지리적으로 먼 국가도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믈 제국의 몰락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우리 리오넬 왕국은 과거 서북부를 침략하는데 일조했던 적흥주, 은화주, 황원주를 비롯해 세계 최대 곡창지대 중 하나인 청운주까지 총 네 개의 주를 집어삼켰다.
거기서 왕국은 진격을 멈췄다.
솔직히 리오넬 왕국의 역량은 엘렌베이라 지역를 포함하는 적흥주와 은화주까지가 알맞았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게 어디 쉽게 멈출 수 있는가. 먹고 토하기 직전까지 집어삼켰다. 저지르고 돌아보니 리오넬 본토의 7배에 달하는 영토였다.
신나서 못 먹어도 고를 외치던 왕국의 대신들도 정신을 차린 뒤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폭주할 업무량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안 되는 탓이었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거짓말 안 보태고 나는 하루에 한 시간을 채 못 자며 격무에 시달렸다.
순식간에 하믈 제국의 삼 분의 일을 집어삼킨 리오넬 왕국에 위기감을 느낀 몇몇 열강, 특히 라비아 제국에서 시비를 걸 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타이탄 때문이었다.
하믈 제국과의 전쟁에서 기존 전략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든 타이탄의 활약을 보았는데 어찌 시비를 걸겠는가.
당시로서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라비아 제국과 아이멘 제국에서 하믈 제국의 저거트급 생산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폐하, 나가실 시간입니다.”
알폰소가 나를 재촉했다.
“잠깐만.”
나는 녀석에게 손을 들어 보인 뒤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문득, 전생을 자각하고 처음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머리통이 깨져서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있던 소년의 모습은 이제 거울 속에 없었다. 화려한 왕관을 쓴 강인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오늘은 리오넬 제국을 선포하는 날.
-리오넬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인데도 밖에서는 백설들이 외치는 함성에 귀가 멎을 것 같았다.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문가에 두 왕비와 아들, 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부터 나는 리오넬 제국의 황제였다.
<完>
***
<어느 조교의 기묘한 하루>
리오넬 제국력 200년 8월 10일.
5일 뒤, 황실 아카데미에서 리오넬과 아르야가 하나가 된 지 20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강연이 있었다.
주제는 리오넬의 수호신에 관한 것.
해가 진 시간, 황실 아카데미 역사학과의 조교 로안나 하인스는 연구실에서 그에 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이건 다나르 님의 자료고, 이게 에반 리오넬 대제님에 관한 거, 이쪽이 바리사다 여신님.”
리오넬 제국에는 수호신이 무려 셋이나 존재한다.
운명과 시간의 신 다나르.
재물의 신 에반.
문학의 여신 바리사다.
기존 수호신에 관한 강연은 주로 인간이었던 에반과 반마족이었던 바리사다가 재물의 신과 문학의 신이 된 비화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특별한 강연이 될 예정이었다.
“······ 그리고 이게 올해 초에 발견된 지식의 신 아르카나에 관한 고서.”
리오넬 제국의 주류는 리오넬 본토에 뿌리를 둔 사민족.
그런데 얼마 전 교수가 고서를 해독하다 아르카나 여신이 사민족을 수호하던, 지금은 잊힌 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괜찮으실까······ 아직 반 정도뿐이 해석을 못 했는데.”
로안나는 교수가 조금 걱정되었다.
고서의 해석이 뒤집히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 강연에서 주장했는데 후에 해석이 뒤집히면 그런 굴욕이 따로 없을 터였다.
똑똑, 똑똑.
“로안나, 들어가도 되나?”
“아, 네!”
문이 열리고 안경을 쓴 무표정의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에드워드 와이트.
와이트 공작가의 삼남으로 일찌감치 계승 싸움에 손을 놓고 황실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 그는 문자학, 해석학에 있어 세계에서 첫 손에 꼽히는 역사학자였다.
“자료정리는 잘 되고 있나?”
“네. 근데······ 정말 이걸 주제로 괜찮을까요?”
에드워드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물론이지. 설마 내 해석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뇨. 그건 아닌데······ 그래도 완전히 해독하시고 내년에 발표하시는 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네.”
로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아르카나의 고서가 발견되고 학자들 간의 해독 경쟁이 벌어진 것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막혀있던 해석에 성공했지. 덕분에 강연의 내용을 조금 변경해야 할 것 같아 찾아왔네.”
“넷?!”
이틀 밤을 새우며 정리한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로안나의 숨이 턱 막혔다.
“새로 해석하신 내용이 뭔데요?”
“아르카나와 다나르가 실은 하나의 신에 갈라져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것.”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세 가지로 나누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그런데 다나르의 교리와 그 성자들이 일으켰던 이적을 생각해보면 다나르는 그 셋 중 무엇을 관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로안나의 머릿속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아이를 몇 분 전의 과거로 되감는 듯한 이적을 일으켰던 다나르의 성녀, 마리의 일화가 떠올랐다.
“······ 과거?”
“그래. 다나르는 시간의 신이라기보단 과거의 신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고서에서 아르카나를 지식과 시간의 여신이라고 표현한 문구를 발견했어. 분명,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돼.”
“아!”
로안나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에드워드 교수가 해석한 아르카나 여신이 일으켰던 이적들은 모두 ‘현재’와 관련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려졌다.
“그러면 ‘미래’를 관장하는 시간의 신이 한 명 더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겠지. 내 가설이 옳다면 언젠가 그에 관련된 고서가 발견되겠지. 어쨌든 여기 새로운 해석한 부분이니 참고하게.”
“······ 알겠습니다.”
로안나는 에드워드가 건네는 두툼한 서류를 보며 풀이 죽은 채 답했다.
그리고 5일 뒤.
에드워드 교수의 주장은 학자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신빙성 있다는 쪽과 터무니없다는 쪽.
로안나는 그래도 에드워드 교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학자들이 절반은 된다는 것에 만족하며 자료를 정리해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으앗!”
비명을 지르는 그녀.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상황에서 누군가 재빨리 그녀를 잡아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안 다치셨으니 다행입니다.”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던 로안나는 부드러운 남자의 미성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금발에 곱슬머리, 따스한 푸른 눈동자에 안경을 쓴 미남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학자일까?
“강연을 들으러 오신 분인가 봐요?”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아까 에드워드 교수에게 서류를 전달해주시는 거 보니 조교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아, 네. 맞아요. 에드워드 교수님의 조교인 로안나 하인스라고 합니다.”
“혹시 이걸 에드워드 교수에게 전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꽤 좋아할 겁니다.”
남자가 로안나에게 공책을 하나 건넸다.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고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 세계 최고로 꼽히는 에드워드 교수의 조교인 그녀인데 말이다.
“이건······.”
공책을 살피다 고개를 든 로안나.
“!!”
감쪽같이 사라진 남자에 그녀는 눈동자를 크게 깜빡였다. 남자가 사라지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로안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남자에게 받았던 공책은 그녀의 손에 그대로 있었다.
‘······ 유령?’
황실 아카데미의 유명한 괴담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로안나. 그녀는 얼굴이 새파래져 서둘러 에드워드 교수의 연구실로 달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처음 보는 문자가 적힌 책은 버리지 않았다. 과연 학자를 꿈꾸는 그녀였다.
“교수님! 교수님! 저 이상한 남자한테서 이상한 공책을 받았어요!”
강연 후 기력이 빠져 쉬고 있던 에드워드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로안나가 흔드는 공책에 시선을 주었다. 표지의 글자를 본 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안나! 그 공책 어서 내게 보여주게.”
“네? 이 공책이 뭔지 아세요?”
“그 공책은 모르지만, 거기 쓰여있는 문자는 알지.”
“아!”
로안나는 에드워드에게 책을 내밀며 물었다.
“저는 처음 보는 문자인데, 어느 시대의 문자인가요?”
“200년 전 한 사람이 창안한 문자지.”
“한 개인이요?”
“그래, 에반 리오넬 대제께서 남긴 몇몇 메모가 전부 이 문자로 이루어져 있지. 근데 이렇게 책의 형식으로 남아있는 건 처음이군. 자료가 워낙 적어 그동안 대제가 남긴 문자를 해독하는 건 불가능했데, 어디서 이런 공책이······ 심지어 이 필체. 분명 대제께서 손수 작성하신 거야. 로안나, 이걸 대체 누가 준거지?”
“그러니까 이상한 남자였는데, 금발 곱슬머리에 안경을 끼고 눈동자가 푸른······.”
그녀의 말이 중간에 흐려졌다.
공책이 필적이 에반 리오넬 대제라는 에드워드 교수의 말 때문이었다.
매일 황실 아카데미 중앙분수를 지날 때 보이는 에반 리오넬 대제의 조각상과 아까 마주친 이상한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털었다.
대제가 승천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녀는 공책의 제목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에드워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은 제목 읽을 수 있으세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여기 이 두 단어는 확실히 아네. 대제께서 남긴 메모에는 유독 이 단어들이 많았지.”
에드워드가 책에 쓰인 단어를 가리켰다.
그 단어는 ‘미래’와 ‘신’이었다.
에반 리오넬 대제가 남긴 공책, 미래와 신이라는 단어.
로안나의 머릿속에서 아르카나와 다나르는 하나의 신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에드워드 교수의 주장이 떠올랐다.
혹시 대제가 그 마지막 조각, 미래를 관장하는 신의 파편이었을까?
‘에이, 설마.’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