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6)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26화(2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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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이 프란을 만나던 그 시각.
왕실기무대 정보부 수석 서기, 밀로아 백작은 산더미 같았던 서류들을 모두 처리한 뒤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스읍, 후- 홀짝.
담배 한 모금에 홍차 한 잔.
피로에 찌들어 혼탁했던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1왕자님이 왕실위원회 의원들에게 연락을 돌리셨다 합니다.
조금 전, 보조 서기가 올렸던 보고.
‘5왕자의 일은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밀로아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양도 양이지만, 그 중요성 또한 상당하다.
서북부 일대를 점령한 하믈 제국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는 건 기본. 최근 동부는 소규모 해적들을 규합한 거대 해적단이 등장해 그녀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거기에 암중으로 2왕자 진영과의 소리 없는 전쟁까지.
몸을 쪼개 업무를 분담할 수 있는 마법을 개발하고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전 재산을 투자할 의향도 있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그녀에게 있어 5왕자의 일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여흥에 불과한 것이었다.
불체포특권?
아끼는 시종 한 명 살리자고 용을 쓰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불쌍한 녀석, 이번엔 그냥 넘어가 준다.
그렇게 넓은 아량을 보이며 넘어갔어도 될 일. 조금 체면이 상하긴 하지만, 5왕자를 신경 쓸 시간에 지금과 같은 여유를 즐기는 게 훨씬 더 이득이다.
‘좀 너무했나? 따지고 보면 5왕자도 2왕자가 4왕자를 팽하는데 도구로 쓰였을 뿐인데.’
그런데 왜 정신을 차려보니 불체포특권 무효화 시키기 위한 청문회를 여는 데까지 상황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뭐, 이제는 끝난 일.
왕실위원회를 구성하는 30인의 왕족 중 13명이 1왕자를 지지한다.
‘2왕비가 정신을 차렸으니 2왕자 쪽 의원들은 5왕자와 관련된 일에는 최대한 관심 두지 않으려 할 테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꼬장한 노인네들은 무조건 참석할 테니까······.’
어떻게 계산해도 에반이 행사한 불체포특권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똑똑, 똑똑.
“밀로아 백작님! 남부에서 올라온 급보입니다.”
밀로아는 반의반도 못 피운 담배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옘병.”
스읍-후-
빠르게 한 모금 머금었다 연기를 내뱉은 그녀.
“들어와.”
재떨이에 담배를 거칠게 비비며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
에반의 말에 크게 박장대소했던 프란.
흔들림 없는 에반의 표정을 본 그녀는 느슨해졌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좋아, 말해 봐. 북부해방군이 4왕자를 암살한 범인이란 의혹을 벗어나고, 왕국민에게 무뢰배 집단이 아님을 알리며, 해방군 내 강경파가 만족할 수 있도록 북부 몰락에 관여한 왕족을 끌어내린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말이야.”
내가 말할 때는 몰랐는데, 남한테 들으니 터무니없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해내야 할 일.
그래야 내 첫 가신을 지키고 북부해방군과의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다.
“먼저 북부해방군이 4왕자를 죽였다는 의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진범이 나타나면 됩니다.”
“진범? 무슨 수로? 혹시 진범의 정체를 알아? 쉬쉬하는 소문으로는 2왕자가 망나니 동생을 처리했다는 의견이 많긴 한데, 맞나?”
표면적으로만 소문이 쏙 들어갔을 뿐,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2왕자가 아카드를 암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맞습니다. 2왕자 한 거. 정확히는 지시한 거죠.”
“호, 증거라도 있나 봐.”
“아뇨.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합니다. ······ 그런데, 2왕자 쪽이 진범이면 안 됩니다.”
프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네. 진범이 나타나면 되는데, 그 진범이 2왕자야. 그런데 진범이면 안 된다고?”
“네, 2왕자가 진범이면 안 됩니다. 제가 4왕자를 처리하라고 조언했거든요. 2왕자는 제 조언을 따랐고요.”
그녀의 표정이 웃기게 변했다.
“그러니까, 네가 2왕자에게 4왕자를 암살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이루어진 거다?”
“왕실 재판 결과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와 2왕자, 생각보다 끈끈한 관계입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이야기가 길어지니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2왕자가 진범이라는 게 드러나면 곤란합니다. 저도 다칠 확률이 높거든요.”
눈가를 찡그리며 잠시 생각하던 프란이 입을 열었다.
“지금 진범인 2왕자 말고 다른 놈한테 뒤집어씌우자는 거 맞지? 4왕자를 암살했다고 북부해방군을 몰아가는 게 2왕자인데, 오히려 도와주라고?”
“미운 놈보다 더 미운 놈을 때릴 수 있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북부해방군과 함께 온 힘을 쏟으면 2왕자가 4왕자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걸 증명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지?
‘아무것도 없어.’
얻는 게 아예 없지는 않을 거다. 다만 잃을 게 더 많다는 게 문제지.
무엇보다 그건 1왕자 진영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 지금 내게 이런 폭탄을 넘겨준 것들이 신날 일? 절대로 할 수 없다.
“미운 놈보다 더 미운 놈······.”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들기며 생각에 잠겨 있던 프란. 잠시 뒤,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1왕자를 지지하는 왕실위원회 의원들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북부 파견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이왕이면 골수까지 썩어 문드러진 인간을 진범으로 만들어버리면 강경파도 아주 만족하겠죠.”
“대충 이해했어. 그런데 말이야, 1왕자를 지지하는 왕족이 4왕자를 암살할 이유가 없잖아. 오히려 망나니 자식 죽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태반인 판국에. 사람들이 납득하겠어?”
“납득할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말이지?”
심증이 있어도 증거가 없으면 범인을 못 잡지만, 그 반대는 가능하다.
“‘증거’만 있어도 범인은 잡을 수 있습니다. 왜 얼마 전에도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연쇄 살인을 벌여 왕도가 들썩인 일도 있었지 않습니까. 치안대가 범인을 심증으로 잡았습니까, 물증으로 잡았지.”
그리고 일단 범인이 잡히면 범행동기는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면서 저절로 피어나기 마련이다.
“······.”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프란.
나는 잠시 한 템포 쉬다 입을 열었다.
“증거, 북부해방군이 사력을 다하면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 5년간 놀고만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다.
이 부분에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왕궁에 묶여있는 내가 그런 일이 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외부의 조력이 필요하다.
불안한 점이 있다면······.
‘북부해방군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가.’
나는 그런 속내가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숨겼다.
“······ 하나 빼먹은 것도 말해 봐. 왕국민이 북부해방군을 단순한 무뢰배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거.”
“거기서부터는 북부해방군이 저와 협력하겠다는 확답은 주어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금, 아니 꽤 많이 민감한 내용이거든요. 듣고 나시면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건지 이해하실 겁니다.”
내 답변에 프란은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그녀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1분 1초가 영겁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눈을 떴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어. 그런데 말이 쉽지, 그 과정은 그렇게 쉬워 보이진 않네.”
인정한다.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열심히 [에반식 아가리술]을 시전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내가 [도서관]을 활용해 북부해방군을 사력을 다해 돕고, 그들이 딱 내가 생각한 수준의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해봤다.
‘성공률은 한 30% 정도 되려나?’
내가 프란을 찾기 전, 2왕자에게 고개를 조아려보려던 이유였다. 빚은 좀 지지만, 그건 100%니까. 그에 반해 지금 내가 프란에게 주둥이를 턴 것들은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성공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무조건 됩니다.”
다행히 머릿속 생각이 입 밖으로 뛰쳐나오진 않았다.
“불가능해도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이미 비슷한 일을 해냈고요. 4왕자의 암살이라는 뒷배경에 제가 있을지 상상이라도 해보셨습니까?”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
프란은 계획의 성공을 자신하는 에반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리처드의 얼굴이 겹치지?’
지금은 볼 수 없는 친우와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에반에게서 자꾸 그의 얼굴이 보였다.
– 프란, 지켜봐. 언젠가 우리 베이른 자작가가 이 척박한 북부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될 거니까. 나, 리처드 베이른이 그렇게 만들 거야.
곧, 이유를 알았다.
프란에게는 절반이지만 요정족 엘프의 피가 흐른다. 그녀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감정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자신에 대한 믿음, 확신.
둘은 그게 닮았다.
그리고 리처드는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다짐을 현실로 만들었었다. 몰락해가던 베이른 자작가를 북부의 변경백으로 만들었었고, 본인은 북부의 검이라 불리었었다.
‘너는 어떨까?’
프란은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을 보며 속으로 그렇게 물었다.
잠시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혼자 듣고 넘기기에는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였어. 그런데 이건 알고 있어. 나는 북부해방군 녀석들에게 어떤 결정도 강요할 생각이 없어. 한 발짝 뒤에서 서 있는 내가 그래서도 안 되고.”
“감사합니다.”
“뭘, 감사해. 난 그저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전해줄 뿐이야.”
“그게 감사하단 겁니다.”
속에 뱀을 수천 마리 키우고 있는 듯한 에반의 미소.
‘역시 리처드랑 전혀 닮지 않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할 말 다 했으면 가봐. 알폰소 녀석에게 연락이 갈 거야.”
“알겠습니다.”
“아, 잠깐 기다려.”
일어서려던 에반을 잠시 제지한 프란은 공방실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뒀더라. 분명히 여기였던 것 같은데.”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빼서 뒤집어 바닥에 펼치는 프란. 안 그래도 지저분했던 공방실이 순식간에 쓰레기장을 방불케 변해버렸다.
“여깄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야 그녀는 낡은 서책을 하나 찾아냈다.
“받아.”
“이건?”
“리처드 녀석이 남긴 베이른 마나연공법. 받을 사람이 이제야 나타났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받기 싫어?”
“그······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프란을 미간을 찡그리며 에반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손에 자신이 구겨 던졌던 종이가 쥐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자신이 리처드가 남긴 마나연공법을 찾는 동안 읽어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읽어봐?’
마법사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그냥 낙서에 불과한 기하학적 정보들.
저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건 같은 마법사뿐이다. 마법사가 될 수 없음에도 마공학에 미쳐있는 괴짜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딱 봐도 티가 나니 논외.
그녀는 최근 마법서를 잃어버린 제자를 엄하게 혼낼 때, 알폰소가 훔쳐 간 게 분명하다며 엉엉 울던 게 떠올랐다.
‘저 녀석 주려고 가져갔던 건가?’
마법서를 훔쳐 가던 알폰소.
5왕자가 검술로 4왕자를 두들겨 팬 소문.
베이른 마나연공법을 받고도 기뻐하지 않는 표정.
프란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 코어를 연성했구나.”
그것밖에 없었다.
수련할 수 없는 마나연공법을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아, 네, 뭐······.”
코어를 연성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들킨 에반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엑! 코어요? 아니, 왕자님. 기사들도 깜짝 놀랄 검술 재능이신데! 코오어어어?”
알폰소가 기겁했다.
당연했다. 그는 에반이 괴물이라 불리는 레이나 잔느 못지않은 검술 재능을 지녔다 믿고 있었다.
“시끄러, 나중에 말해줄게.”
알폰소의 입을 다물게 한 에반이 프란을 바라봤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딱히 후회하고 있지도 않고요.”
“쯧, 뭐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니 됐어. 가봐.”
“알겠습니다. 가자, 알폰소.”
둘이 나가고 프란의 귀에 제자와 알폰소가 크게 말싸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그녀의 제자가 씩씩대며 돌아왔다.
“스승님! 역시 알폰소 짓이 맞아요! 아까 그 왕자님이 자기가 잠시 읽었다며 돌려준대요!”
“누가 훔쳐 가든 어떻든 앞으로 마법서 또 잃어버리면 내쫓을 줄 알아.”
“힝. 너무하세요!”
프란의 엄한 눈초리에 토라진 표정을 짓던 제자. 이어지는 침묵이 답답해졌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그 왕자님 저보고 혹시 스승님한테 ‘미녀 마법사님, 제발 제자로 받아주세요.’라고 외치며 9번 절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이상한 왕자님 같아요.”
“뭐라고?”
“아까 그 왕자님이 저한테 ‘미녀 마법사님, 제발 제자로 받아주세요.’라고 외치며 9번 절했냐고 물어봤다고요!”
풀지 말라고 낸 문제를 풀어낸 에반의 등장에 프란의 눈가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