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8)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28화(28/203)
028
왕실재정부 수석 서기, 클리앙 와이트 백작.
깔끔하게 빗어 올린 금발.
주름을 찾아볼 수 없는 정장.
감정변화를 찾아보기 힘든 얼굴.
겉모습만으로도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약혼녀의 외도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무덤덤한 표정으로 빈틈없는 일 처리 후 퇴근하던 클리앙. 부하 직원들은 가끔 그가 인간이 아닌 마법사가 조종 중인 골렘일지도 모른다고 쑥덕거린다.
남들에게는 비밀이지만, 클리앙은 본인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 강박증이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시간에. 후······ 말씀해보시죠.”
한데, 지금 그는 본인의 루틴을 벗어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서 불쾌함 대신 다른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흥미.
에반이 그에게 제안해온 내용은 그만큼 2왕자 진영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었다.
왕실위원회를 구성하는 의원은 총 30명.
1왕자를 지지하는 이가 13명.
2왕자를 지지하는 이가 11명.
나머지 6명은······ 일단은 중립.
왕실위원회 의원들이 모여야 할 정도의 중요 사안은 대부분 과반 찬성이 이루어져야 통과가 가능하다.
‘5왕자 말대로 한 명만 끌어내릴 수 있다면. 13:11과 12:11은 엄청난 차이야.’
클리앙은 1왕자 진영이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조금씩 앞서 있는 걸 인지하고 있다. 아주 미세했던 격차가 이제 확연히 거슬릴 정도.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망나니 놈 때문에 2왕자와 2왕비의 사이도 냉전인 상태야.’
에반이 정말 한 명이라도 1왕자를 지지하는 왕실위원희 의원을 끌어내린다면, 흐름을 뒤바꾸는 기점이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에반을 증오하는 2왕비일지라도 도움은 못 될망정 방해는 하지 않을 터. 클리앙은 평생을 왕궁에서 살아온 그녀라면 그 정도 감각은 있으리라 판단했다.
때로는 원수와도 웃으며 덕담을 나눌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왕궁이었다.
「청문회에서 제가 행사한 불체포특권의 무효화에 대한 투표에서 다미안 형님을 지지하는 의원분들이 반대표를 던져주게 해주시면, 아까 말했던 대로 1왕자 형님을 지지하는 왕실위원회 의원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드리죠.」
“몇 명을 말이죠?”
「당연히 한 명이죠. 클리앙 백작님, 그렇게 안 봤는데 욕심이 과하시군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면 여태까지 왜 가만히 있으셨는지?」
말은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두 명 이상도 끌어내릴 수 있는 것 같은 에반의 말투에 클리앙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인정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특히나 암중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1왕자와 2왕자 사이에는 더더욱.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지레 놀란 상대가 칼을 뽑고 난동을 부릴지 몰랐다.
그런 면에서 밀로아가 4왕자의 출생 비화를 파헤치고 있었다는 걸 놓쳤던 일은 2왕자 진영에게 있어 숨기고 싶은 오점이자, 작은 실금 같던 격차가 미세한 틈으로 변한 걸 인정해야 하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기도 했다.
‘아직 그 여자는 5왕자에 대해 자세히 몰라.’
클리앙은 지금 에반의 제안이 밀로아의 뒤통수를 가격할 황금 같은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
에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좋습니다. 단, 청문회 시작 전까지 약조하신 사항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요.」
“근데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죠?」
“다미안 왕자님을 지지하는 분들이 전원 반대표를 던져준다 해도 5왕자님이 행사한 불체포특권을 막는다고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왕실위원회 의원 중 중립을 표방하는 6인.
그들이 있었다.
전대 왕위계승 싸움에서 밀려, 권력의 중추에서 밀려난 전대의 왕당파.
「선왕 폐하를 따르던 그분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통 참석하시면 기권표를 던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모르는 일이죠.”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만 다미안 형님께 잘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클리앙 백작님의 말이라니, 든든하군요. 그럼 끊겠습니다.」
에반과의 교신을 끊은 클리앙은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5왕자, 에반 리오넬.’
그는 왕실 재판 당시, 5왕자를 무엇으로 우화할지 모를 번데기 정도라 여겼었다.
그 생각을 지금 정정했다.
에반 리오넬은 이미 번데기를 찢고 나온 상태였다.
‘왕실위원회 의원을 끌어 내린다······.’
다만, 2왕자의 정원에서 노닐게 할 나비인지, 눈살을 찌푸리게 될 흉측한 나방인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나비를 닮은 나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2왕자의 꽃밭에서 꿀을 빨면서 꽃들을 시들게 하는 그런 나방.
1왕자를 지지하는 왕족을 끌어내린다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는 반대로 말하면 자신들이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계할 필요가 있겠어.’
클리앙은 힐끔 시계를 바라봤다.
6시 30분.
본래라면 퇴근 후 왕궁의 정문 밖 50m 지점을 지나고 있을 터였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에반에 대한 경계심은 흐려지고 지독한 불쾌감이 그를 덮쳐왔다.
클리앙은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 후의 티타임만 거르면 8시부터의 루틴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서류뭉치에서 삐져나온 부분들이 너무나 신경에 거슬렸다. 그곳들을 칼로 자르듯 매끈하게 정리한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외투를 챙겨 수석 서기실을 나섰다.
***
“걱정 안 되세요?”
클리앙 백작과의 교신을 끊은 내게 알폰소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클리앙 백작이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는 거요. 왕도 바로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유명한 소문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 맞으면 큰일이잖아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번 일에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무너트릴 정도로 클리앙 백작이 멍청하진 않을 테니까.”
약속, 특히 정치하는 인간들의 약속?
그것만큼 허황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전생이나 현생이나 결정적 순간에 뒤통수를 맞고 권력의 옥좌에서 끌려 내려온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게 보면 클리앙 백작이 쌓아온 정치적 신뢰는 2왕자 진영의 가장 큰 무기일지도 모른다.
그걸 이번에 나 때문에 무너트려?
그럴 리가 없다.
다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다.
2왕자의 생사가 결정되는 거대한 풍랑이 닥쳐왔을 때도 그는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아니더라도 그의 주변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나는 그런 내 생각을 알폰소에게 말해줬다.
“그래도 항상 최악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
녀석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왕자님, 저녁 식사를 하셔야죠. 잠시 주방에 다녀오겠습니다.”
“어, 네 것도 같이 챙겨달라 해.”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간 알폰소가 서재문을 닫는 순간.
「클리앙 와이트와의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반갑지 않은 알림이 떠올랐다.
‘이건 또 뭐야?’
다급히 [인명록]에서 클리앙을 찾았다.
‘우호’였던 관계가 ‘평상’으로 내려가 있었다. 분명 방금 서로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건가?’
하긴,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왕실위원희 의원 하나를 끌어내린다는 말을 한 놈이 있다면 크게 경계했을 거다.
오히려 관계가 평상보다 더 내려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관계 : 평상]나는 클리앙의 상태창에 떠 있는 평상이라는 글씨를 보면서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심리를 정확히 알려주는 거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그동안 파악한 바에 의하면 상태창에서 보이는 ‘우호’, ‘평상’, ‘경계’ 같은 단어는 타인의 감정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경계라고 진짜 나를 경계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꺼리는 정도의 감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단지 긍정적 관계인지 부정적 관계인지를 뜻하는 단어일 뿐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10’, ‘-5’처럼 숫자로 표현해주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뭐, 나중에 업적을 달성하다 보면 또 달라질 수도 있다. 일단은 주어진 범위 내에서 알뜰하게 활용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 나는 클리앙의 상태창을 꺼버렸다.
지금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 보통 참석하시면 기권표를 던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모르는 일이죠.
왕실위원회를 구성하는 6인.
그들의 대표격인 인물을 만나볼 필요······.
똑똑, 똑똑.
“왕자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고소한 스튜 냄새에 허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배부터 채우는 게 먼저 같았다.
***
리오넬 왕국의 북부.
은밀한 곳에 위치한 북부해방군의 본진.
회의실에 네 명의 간부가 모여있었다.
산적처럼 지저분한 수염을 기른 남자.
흑의를 입은 남자.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여자.
로브의 후드를 푹 뒤집어써 얼굴이 잘 안 보이는 여자 마법사.
산적은 안대녀와, 흑의남은 여마법사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모여있었군.”
검은 망토로 전신을 가린, 여우가면을 쓴 이가 나타났다. 남자? 여자? 중성적인 목소리 탓에 성별을 구분하기가 힘든 이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다들 바쁜 거 알면서.”
산적이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고의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좀 있어서.”
여우가면이 망토를 가리켰다. 어둑한 회의실이라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든 핏자국들이 잔뜩이었다.
“어쩐지, 네가 들어 오자마자 때놈들의 기름진 피 냄새가 나더라니. 토할 것 같네.”
안대녀가 코를 잡고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하믈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국 사람이란 뜻에서 ‘대인’이라 부르고 주변 왕국민들은 ‘소인’이라 부른다.
북부해방군을 그를 비꼬는 차원에서 때놈들이라 칭하는 거고.
“어쨌든 미안하다.”
“뭐, 네가 제일 멀리 있었던데다 때놈들과 마주쳤다니 이해는 해.”
여우가면과 안대를 한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의남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잡담은 그만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떤가? 다들 프란 님의 연락을 받았을 텐데. 나부터 의견을 말하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5왕자와 접촉해봐도 좋을 것 같군.”
그의 말에 생각에 잠든 해방군의 간부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여마법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스- 아니, 선생님이 우리 한 명 한 명한테 일일이 연락을 돌리신 걸 보면,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5왕자를 좋게 본 것 같긴 해. 그런 의미에서 나도 일단 만나보는 건 찬성.”
“흥, 우리 해방군 소속도 아닌 사람의 말만 듣고 얼굴도 못 본 애송이를 만나볼 순 없다! 이번 기회에 우리를 처단하려는 왕실의 미끼일지도 모르지.”
“너! 선생님이 비록 우리 해방군 소속은 아니시······.”
“그만! 지금 다투자고 모인 게 아니야.”
빠르게 끼어든 여우가면 덕에 산적과 여마법사간의 말다툼은 사전에 차단되었다.
“나도 반대야. 지난 5년간 유령왕자라 불렸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된 것 자체가 너무 작위적이야.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가만히 상념에 잠겨있단 안대녀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2:2인가······.”
여우가면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의견조차 약속이라도 한 듯 강경파와 온건파가 갈리는구나.’
네 명의 시선이 여우가면을 향했다.
“또 너의 선택에 달렸군. 말해봐라.”
“이번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가 아니야. 확실히 정해.”
“알폰소를 아끼는 건 알지만, 함정이라면 정말 우리 북부해방군이 괴멸될 수도 있어. 잘 생각해.”
답변을 재촉하는 그들의 말. 여우가면이 입을 열었다.
“내 결정 전에, 프란 님 말고도 5왕자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를 데려왔다. 덕분에 아까 조금 늦었던 거고.”
“들어오라고 해.”
“궁금하군. 5왕자를 가까이에서 본 이의 평가가.”
여우가면이 문 쪽을 보며 말했다.
“들어와.”
한 여인이 똥을 밟은 표정으로 회의실을 들어왔다.
왕실기무대 감찰부가 알폰소를 잡아가려던 그날, 무사히 에메랄드궁의 주방을 탈주한 신입 주방 보조였다.
그녀는 에메랄드 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온종일 설거지만 했던 자신이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